영화에 익숙해집니다. 영화 보는 게 일상이며, 자연스럽고 아무 거리낌없이 스케줄에 끼어듭니다. 영화를 보고 걸어 나오면서 전과는 다른걸 느껴요.


[우리들]은 더할 나위없이 정직하고 똑바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상당히 큰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듀나님께서 이 영화가 '치유물이니 곡성을 봤던 눈을 씻으러 보러가세요'라고 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 보고 나서 찾아보니 듀나님께서는 '아프고 힘든 영화에요'라고 하셨더군요. 그렇다면 제가 봤던게 무엇인가 규명하고 싶어 찾아다녔는데 그 오해를 불러낸 원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피사체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곡성과 비교해서 누군가 했던 말이었던 것 같아요. 치유물이라는 텁텁한 단어를 쓰진 않았고, 영화 전반의 분위기가 곡성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였을겁니다.


본 이후로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사실 시간이 흐르기도 전부터 그러했지만, 제 머리 속에서는 [우리들]과 [비밀은 없다]가 이상하리만치 섞여 분리하기 어려워져버렸습니다. 어떠한 영화들은 갈등을 담지 않지만, 적어도 한국 영화에서 갈등을 담지 않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다들 한국에 흐르고 있는 특정한 갈등을 담아내고 싶은 욕망을 뿌리치질 못하고 그 잔을 들어 영화에 흘려넣습니다. [우리들]에서도 결국 여타의 드라마에서 이르르는 정서적 파국과 비슷한 광경에 도달하고, 저는 그것을 목격하며 상당히 괴로워졌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이, 한국의 따돌림을 변주하는 영화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떨 때는 복수극으로, 또는 공포영화로, 어쩌면 사회고발식으로 나왔습니다. 영화 외에도 웹툰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영역이며, 그에 대한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영화나 만화에서의 해답이 독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으면, 판타지로 치솟아 올라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테니까요. 저는 가끔, 따돌림의 강도를 체현하기 위해 갈수록 그 폭력행위가 강하게 변주되는 것들을 바라볼 때 상당히 고통스럽습니다. 누군가 그걸 보고 재생산할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그러한 '따돌림 서사를 서술하기 위해 작가가 만들어내는 괴롭힘' 자체를 마주보는게 고통스럽기 때문이죠. 그것은 마치 이 정도는 해야 따돌림인것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는 듯이, 주연이나 조연을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힙니다.


[우리들]에서도 제게는 상당한 수위의 괴롭힘이었습니다.


[비밀은 없다]에서 저는 끝없이 영화의 미래에 대한 회귀선을 다시 그었습니다. 딸이 실종된 순간부터, 영화의 어떤 지점에서는 (심지어는 영화가 끝나고 난 지점에서라도) 딸이 어떤 방식으로든 발견이 되어야 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한국의 영화에서는 동물과 미성년(심지어 유아)은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던져진 동전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쪽을 바라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는 것에서 상당한 슬픔을 느꼈고, 결국에 그런 중간점을 지나치게 되더군요. 영화의 중간 부분, 얼마나 호쾌하고 어처구니 없이 진행되는지를 편집을 통해 죽을힘을 써서 만들어낸 부분을 생각해봅니다. 엄마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를 반복하며 딸을 원하고, 친구는 완벽하게 반복으로 그 시발점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친구를 구원하려 노력합니다. 그 둘은 교차편집되지만 동일한 부분은 대상에 대한 강렬한 애원일 뿐, 전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비밀은 없다]를 보고 나오면서, 과연 내가 본 영화는 무슨 영화였을까, 내가 무슨 영화를 봤다고 결정해야 되나를 고민했습니다. 보통 영화에서 누군가를 공백으로 만들면, 그 사람이 이상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사라진 자식의 이상화를 끊임없이 밀어냅니다. 보통 언제나 공백이 되고서야 그 자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되는데, 아마도 시청자들은 주인공과 같이 실종자에 대한 정서가 변화하였을 것입니다. 보통은 주인공과 떨어져서 익숙한 장르에 힘입어 훈수를 두거나 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은 적어도 낯선 이야기였으니까요.


[비밀은 없다]의 궤도는, 제 1우주 속도를 넘어섰다고 잠시 착각을 주었다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굉장히 큰 타원을 그리며 되돌아 옵니다. 어째서 감독은 정치 스릴러의 일부였을꺼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음 다시 축소된 혈연관계로 되돌아오도록 설계를 했을까요.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도식을 복잡한 형태로 길게 빙 돌아오도록 만들며 같은 집에 함께 사는 인간들(약간 연장하면 교육공간까지)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정립하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대충, 인간 혹은 여성 관계의 변화라고 생각을 하며 영화를 닫았습니다. 여자 둘이 사이의 한 명을 두고 공전하다 서로를 발견하는 이야기라고요.


[부산행]은 어떤가요. 저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갔으며, 딱 기대하지 않은 만큼의 여러가지 서사를 받아냈습니다. 저는 마지막 문을 여는게 분장을 했다고 강렬하게 재인식시키는 할머니보다는, 마동석이 반대편에서 열어젖히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절반-악역이 참회하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1960년의 [하녀]를 보면서 저는, 영화란 그 당시 사람에게 가장 깊게 내재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가족을 구성한 남자 주인공은, 외도를 하며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현대에도 비슷한 공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 영화에서 공포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부산행]에서 주인공은 이혼에 도달하고 있으며, 자식을 배우자에게 바래다줘야 합니다. 좀비를 부차적으로 낮춰버리고 서술하자면 '좀비 사태가 일어날만큼 문제가 생겨야 이혼하려는 배우자에게 겨우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데, 결국 핑계를 대서 가지도 못한다'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부산행]에서까지 [우리들]과 [비밀은 없다]에서 익숙해진, 끝없는 여-여 페어를 보게 된다는게 최근의 아이러니입니다. 어찌하여 주인공 무리에 적절하게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는 자들로 구성된 약자가 배정되는 것인지 이해는 할 수 없었었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공포는 잘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감기]의 여-여 페어보다는 [부산행]의 여-여 페어가, 아니 둘 다 별로군요. 다음번 재난물에서 여-여 페어가 나온다면 좀 더 능동적이고 이상적이었으면 싶습니다.


세 영화의 결론에 도달할 때, 우리는 여성 두 명이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최근 한국 웹에서 일어나는 일렬의 형태를 생각했을 때 특정 영화들은 다른 세계로 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가장 먼저 성별이 그 관계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 얼마나 무거운 것을 짊어지도록 하기 위해 이만큼이나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어내는 관계들을 미분하면, 결국 나와 다른 사람 한 명과의 관계로 줄일 수 있습니다. 나와 나의 관계까지 미분할수도 있겠지만, 남과의 관계를 경험하지 않고서 자신과만의 관계를 구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논외로 두겠습니다. 세상에서 메크로적인 복잡함을 통해 집단을 분화시켜서 서로의 관계를 호출하고 설정할 수 있으나, 미분하면 우리는 이상적인 일대일 관계부터 모색해야 합니다. 저는 최근 연역을 조금 양보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귀납적으로 접근해보고 있습니다. 물리적 삶 속에서 맞닥들이는 관계부터 세심하게 맛보기로 한 것입니다.


오랜만에 이상한 글을 쓰긴 했는데, 안 쓰는 것보단 낫겠지요.


P.S. [우리들]을 보면서 저는 새삼 제가 학창시절을 생존해냈다는 것들 기억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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