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게시판에 긴 글을 적었지만, 실명으로 남게 되는군요.

실명으로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유는 아래 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절한 듀게분의 도움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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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담당기자님

 

어제 <취재파일 4321 -나는 동성애자입니다>에 출연했던 여성 커플 중 한 명입니다. 전화나 메일로 좀더 말씀드릴까 하다가 공개 게시판에 쓰는 것이 더 좋을 듯 하여 이곳에 글을 올립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기자님께서 취재 과정 내내 저희 커플을 많이 배려하셨고, 끝까지 저희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어제 밤 프로그램 방영 후에 연락을 드려, VOD에서 우리 장면을 삭제할 수 있는가, 라면서 항의의 뜻을 비춘 것에 적잖이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불만의 뜻을 표한 이유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저는 ‘아시아의 연애 문화를 취재하겠다는 이유로 저의 데이트 장면을 찍어간 서구의 TV프로에서 “아시아의 기이한 성매매 업소”를 같이 내보냈을 때의 당혹스러움’에 비유했습니다. 더 쉬운 예를 들자면 다음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TV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문화를 다루겠다고 합니다. 연락을 받아보니 상대 기자도 신뢰감을 주는 반듯한 사람 같습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몰랐지만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고 싶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다 싶어서 취재에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방영 후에 보니 ‘개고기를 먹다니 한국인은 야만인’같은 인터뷰 장면이 길게 나오고, 목줄에 묵인 개를 산채로 몽둥이로 때려잡는 장면이 방영됩니다.

 

놀라서 연락을 하니 ‘국제 사회에서 한국 문화와 관련되어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개고기 관련 일이었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개고기를 파는 곳에 가서 잠입취재를 하니 실제로 잔인하게 개를 때려잡고 있었다.’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하지만, 한국의 문화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달해야 균형이 잡힌 방송이 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네티즌들은 ‘그 방송 봤어? 한국 진짜 좀 야만적이더라. 그 정도인 줄 몰랐네.’ ‘그 동안 한류 때문인지 한국의 좋은 면만 봤나봐.’ 라고 말합니다.

이리 될 줄 모르고 취재를 도왔던 이가, 심지어 그간 차별받아온 재일 조선인이었다면, 갑갑함과 후회는 매우 크겠지요.

 

 

네, 바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게이 찜질방’과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 사이의 연관성은 ‘개고기 문제’ 와 ‘한국 문화’ 사이의 연관성과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비유를 계속하자면 - ‘한국 사람들 중 개고기 안 먹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더 무력해질 뿐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한국 문화’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개고기가 주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외국에 방영되는 20분짜리 한국 문화 특집 프로그램에 잔인한 개 도축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기보다, 반대로 편견과 선입관, 한국인에 대한 혐오를 자아내기에 더 적절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귀사의 프로그램이 그 의도와 달리 위험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으며, 그 방송을 보는 동성애자들에게 수치감을 안겨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프로그램에 제가 일조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다가 지금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신원보장을 확실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이 애쓰고 노력하신 점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TV 속의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없을 수 없다는 것, 처음부터 알고 갔습니다. 얼굴 모자이크하고 음성변조해도 제스춰나 말투나 분위기는 남습니다.

 

가족들이 혹시라도 이 방송을 보면 어떻게 하나 가슴 졸였습니다. 몰랐으면 좋겠지만 모를 리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여 나를 알아보거나 의심한다 해도, 이 프로그램을 보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없앴으면 좋겠다, 이거 xxx아냐? 하고 경악하다가도 프로그램이 마칠 때쯤이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조용히 넘어가줄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두렵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효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이거 xxx아냐?’ ‘아, 역시 동성애자가 되는 건 무섭고 외롭고 변태스러운 일이구나. 빨리 저 길에서 끄집어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당장 몇 시간 후에 그런 연락들이 밀어닥치는 게 아닐지 우울하고 불안합니다. 몇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기자님, 저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요. 저는 이반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이 오는 데 이 프로그램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순진했던 것일까요. 기자님이 보내신 취재요청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기 이전에 동성애자들의 삶과 미래를 조명해

시청자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준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저희 방송에서는 해묵은 동성애 찬반 논란을 떠나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사회에서 포용하고,

사회적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

 

동성애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번쯤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이번 방송을 통해 제공하고자 합니다.

 

동성애자분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연인 관계인 실제 커플의 평범한 일상 취재가 필수적입니다. (...)”

 

이 글이 진심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지적하고자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찬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방송의 구도는 찬반 논란이었습니다.

 

하고픈 말은 더 많지만, 글이 길었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가 못 다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잘 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아이템을 잡아 많이 노력하시고 수고하신 것, 취재 과정 내내 호의와 예의를 지키신 것,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후 더 좋은 작품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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