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2017.05.19 15:05

easter 조회 수:1976


대선이 끝나고 이삼일 후에 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재인은 대통령 후보감이 아니고 대통령감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재인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매력, 뛰어난 외모, 겸손하고 우직한 성품, 살아온 단단한 이력 들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매력적인 대통령 후보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노무현은 매력적인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대통령 후보였죠.


어떤 이가 대통령 '후보감'이란 말은 그가 매력적인 정치인이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언어입니다. 노무현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공들인 연설까지 모든 영역에서 리버럴 정치인이 가 닿을 수 있는 최상의 지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되고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동영상들에서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빠뜨림 없이 120% 전달됩니다. 


그를 보면 내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의 전달자 또는 화신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오롯한 개인으로 나를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그가 자신의 성공과 좌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오는 사람. 


그 느낌을 형성하는 핵심은 그가 가진 언어였습니다. 문장이 길건 짧건, 상대가 어른이건 아이건, 그가 발화하는 언어는 마치 여러 차례 강한 교정을 거친 것처럼 초점이 명확하고 의도가 분명하며 간결하고 함축적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언어의 직조를 통해, 대화와 토론과 연설과 설득을 통해 한 국가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은 노무현과 똑같은 영역의 경쟁자였습니다. 그가 언론에 그렇게 예민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과거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그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외모나 보여지는 모습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언어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노무현의 어록과 대화, 연설, 유서를 기억하고 곱씹었습니다. 그랬던 그의 언어에 대한 기억을 죽이기 시작한 이들은 노무현의 이미지를 자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한 저 유명한 팬덤, 어둠의 노사모들입니다. 그들은 노무현을 페티시즘의 대상으로 삼고 위험한 유희를 즐겼지요. 지금은 노무현을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의 언어를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인지, 지금 그와 가장 닮은 사람은 정말로 누구인지, 떠올리기 싫어합니다.




정치인의 성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입니다. 특히 리얼타임으로 전달되는 입말. 상대방에게 최상의 호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고 최악의 적대를 갖게 할 수도 있으며, 지지자들로 하여금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운동해 가게끔 만드는 언어.


그렇다면 대통령의 성패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언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재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노무현과 달리 자신의 지지자들을 '언어'로 열광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한다고 노무현처럼 메시지를 던지지도 않습니다. 이미지? 이미지는 언어와 달라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는 지지자들의 덕질로 생산된 이미지들과 자발적 서포터들이 모아놓은 미담들, 자가생산되는 신화들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많은 지지자들은 일베처럼 이미지의 페티시즘에 빠져 있지요. 정반대 방향의 페티시즘 말입니다.  



문재인과 지지자들의 관계는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문재인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의 위상은 다른 국민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맞습니다. 노무현은 큰 착각을 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이 자신을 '감시하겠다'고 했을 때 애닳아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이 자신을 지켜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지지자들이 지킨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어떻게 지키나요? 한경오를 길들여서? 그렇게 기자들의 입을 막아 부정과 부패의 기미를 추적하는 일을 자기검열시켰을 때 가장 빨리 망하는 건 대통령입니다. 


지지자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 나라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어떤 사태가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대통령의 성공 확률은 높아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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