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거창한 제목처럼 적어놨네요.ㅎ


목요일에 덩케르크 상영을 앞두고인지 

봐야지 했던 영화들이 대부분 수요일 (오늘) 정도에 상영이 끝난다는 걸 발견하고

며칠간 황급히 영화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중에 <내 사랑>, <엘르>, <아메리칸 허니>가 좋았어요. 특히 뒤의 두 개가.



1. <내 사랑>

제목 번역을 왜 이렇게 대충 했는지 모를 일이에요.

사랑 이야기라고 확정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을까요?

여성 화가의 전기 이야기라고 하는 것과,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 것 중....아..후자가 조금이라도 더 잘 팔렸을 것 같긴 하네요. (하, 씁쓸.)


샐리 호킨스의 정말 연기력에 감탄했고요. 참 애정가는 인물이었어요.

에단 호크의 그런 거친 모습과 볼품없(어보이려)는 몸은, 보는 내내 낯설었고요.


보통 구박을 받으면 움츠러들고 쫄보가 되기 마련인데

궁시렁댈지언정 할 말은 쭉 뱉는 여주와

버럭해놓고는 눈치 보는 남주의 쿵짝이 재미지고요. 


(덧1. 사실 이런 남주 캐릭터는 로코에서 흔한 인물이죠. 평소 싫어하는 캐릭터이긴 합니다. 성격 파탄자에 남성우월주의 뿜뿜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인간사이의 애정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연민이 가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때리고 윽박지르고 그건 용서될 수 없는 폭력입니다그려.

 덧2. 근데 실존 인물로서의 그 남자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여자에게 폭력적이었다고도 하더군요.)



2. <엘르>

오직 이자벨 위페르 때문에 보고 싶었던 영화.

성폭력, 강간을 소재로 한 영화들 중 가장 새롭고 신선한 영화였습니다.

포스터도 제대로 안 보고 가서 첫 장면부터 깜짝 놀라긴 했는데, 곧 이어 이자벨 위페르가 온통 영화를 쭉쭉 이끌어가는 것에 내내 감탄했습니다.

몇몇 장면들이 폭력적이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건

그 폭력 장면 이후의 그녀의 얼굴을,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의 새로운 표정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에요.


니들이 아무리 그래도 내 삶을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내 삶을 망칠 수 없다. 내 즐거움(에의 의지)을 망칠 수 없다, 는 자세가 너무 감탄스러워서

배우고 싶었어요.


(덧. 물론, 이해가 쉬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듀게분들의 감상을 여쭙는 글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때까지는 그냥 지금 보고 있는 영화들에 대해서 그렇다할 느낌표가 빡 찍히진 않는 느낌이었는데요.


3. <아메리칸 허니>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합니다. 이전에 지인이 "<문라이트>를 재밌게 봤다고? 그럼 이것도 한 번 봐봐. 좋아할 거야." 라고 해서 제목만 알고 있던 영화입니다.

아메리칸 어쩌고 하는 영화가 제 성향에 맞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 포스터에 적힌 '청춘'에 대한 문구가 맘에 들지 않아서, 지인의 추천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갈 뻔 했어요.

제 눈엔, 포스터도 제목도, 향락적 쾌락적인 미국 젊음 예찬 영화같아 보이거든요. 


그리고 사실 영화의 초반 1시간 정도까지는 그냥 아...여주인공이 매력적이네, 정도 말고는 뭐, 다소 지루하게, 기대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와, 그런데 이거 점점, 그리고 다 보고 나오니까 생각이.


1) <내 사랑>과 <엘르>에 이어, 이 영화의 캐릭터도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거리에 몸을 맡긴 젊은 흑인 여자 (흑인 + 거리의 + 젊은 + 매력적인 + 여자 의 조합-_-;;) 가 지금껏 소비되어왔던 걸 생각해봐요.

그 인물이 '안타깝지만 자연스럽게' 겪(게 만드)는 성추행, 강간, 마약, 도둑질, 이런 것들.


<아메리칸 허니>의 주인공은 그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지언정, 관습적인 묘사들이 가르키는대로 행동하지 않더군요. 살아있었어요. 생각하고. 


그제서야, <문라이트>를 재밌게 봤다면 이것도 재밌어할 거라는 지인의 말이 이해가 가더군요.



2) 

'이 따위 시대'에 살게 되어버린 젊은 세대에 대한 담론이라고 생각해요.


중하류충 계급의 젊은이들이 + 쾌락 향락 타락 3종세트를 갖는 것에 대해 세상은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들은 영화에서도 조연이었고요. 주인공의 도덕성과 바람직한 심성을 부각시켜주는 상대적 이미지, 배경으로서만 존재했었어요.

하지만 지금 시대를 보세요.

이제 중하류층 계급이 신분상승을 하는 사다리는 녹아없어져버린지 오래고,

자신이 도덕적 갈등과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인생은 규정되어져버린 게 이 따위 시대의 현실이죠.

(물론 그것은 이전에도 늘 존재하던 사회적 구조적 문제였던 것도 맞지만)

그래서 이제 정말 

그 가정에서, 그 지역에서, 그 나라에서, 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후 그/녀가 거리로 나온다한들, 누구도 그/녀에게 손가락질 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나, 도덕적 양심을 건너뛰어넘어버린 원인이자 곧바로 결과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영화의 초반 한 시간은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겉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는 대답이 나올 순간마다, 우리 주인공은 반대의 행동을 해요. 반대의 질문을 던지고. 그게 엄청나게 정치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싫어서'에요.


이게 얼마나 새롭던지요. '그건 나쁘니까 하면 안 돼'가 아니라, '난 그게 싫어, 그래서 안 할래'.


세상이 아무리 매연을 풍기며 매캐한 공기를 만들어내도 그게 싫고 다른 게 좋다는 인물에게

오랜만에 '순수'를 느꼈어요.



영화 중후반 쯤, 아주 뻔하디 뻔한 질문이 나옵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진부한 질문인데, 그 질문이 이렇게 거리낌없이 마음이 아릴 줄 몰랐어요. 저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이 인물은 처음 받은 질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에겐 정말 그것이 처음이고, 처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왜 처음일 수밖에 없는지, ..이 따위 세상이 정말 한탄스럽더군요.



'이렇게 해야 빨리 배운다'로 현실을 빨리 알아버리게 되어, 대부분 세상에 굴복하고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지만,

그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빠져 잠기고 싶기도 하겠지만, 다시 숨을 몰아쉬고 나오는 것처럼,

정말 간절히, 그녀의 순수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덧. 포스터에 적힌 문구에 대해... '방황하는 별의 노래'까지는 아무 의미없는 말이라 넘어간다쳐도, '놀라운 청춘들의 반란'은 좀 잘못된 단어 선택 투성이라고 생각해요.)

(덧. 이 영화의 섹스씬도 정말 감탄입니다. 한쪽 성별의 입장에서 타인의 신체를 대상화한다거나, 불쾌함을 유발한다거나 카메라가 은근슬쩍 노림수마냥 클로즈업 하는 것 없이 그저 두 사람의 섹스일뿐. 섹스씬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대할 때 내내 대상화하거나 가치 판단하거나 내려다보지 않고, 같이 선 입장에서 평등하게 있는 느낌이에요.)




<아메리칸 허니> 에서 생각했던 것들 덕분에, <내 사랑>, <엘르>까지도 제게 좋은 이야기들이 된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삶의 자세를 깨닫는다던가 하는 일 별로 없었는데, 

최근에 섹드립에 힘들어하고 개복치 인간-_-으로서 힘들어하다가 

이런 인물들을 주루룩 만나고 나니

새로운 인간상을 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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