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4 12:48
미국의 시인 겸 평론가인 도로시 파커. 앨곤퀸 호텔 누리집 갈무리
면도칼은 아프고
강물은 숨막히고
산은 흠을 남기며
약물은 경련을 일으키네
총은 불법이고
올가미는 풀릴 지 모르고
가스는 냄새가 고약하니
차라리 사는 게 낫겠다
- 도로시 파커 <다시 시작하라>
도로시 파커(1893~1967).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평론가였다. 신랄한 독설과 풍자로 유명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3번의 이혼, 알코올중독, 우울증, 자살 기도,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파커의 삶에는 2개의 뉴욕 호텔이 있다. 전성기였던 1920년대, 맨해튼의 앨곤퀸 호텔에서 평론가들과 함께 세상과 문학을 논했다. ‘앨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전설을 그렇게 쌓았다. 또 하나는 볼니 호텔. 센트럴파크 인근 레지던스 호텔인 이곳에서 홀로 말년을 보냈고, 숨진 채 발견됐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염문을 뿌렸고,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장례식에 유일하게 참석했고, 영화 <스타 탄생>(1937) 시나리오를 써 아카데미 각본상도 받았으나, 2차대전 이후 좌파로 찍혀 미 연방수사국(FBI)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자신의 재산을 마틴 루서 킹 목사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묘비명은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이다. 말 그대로 불꽃처럼 살다 갔다. 파커가 묵었던 앨곤퀸 호텔 1106호는 ‘파커 스위트(suite)’로 이름 붙여 특별상품화되어 있다.
권태호 논설위원 h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0695.html#csidxbc4bf46f30e9f96925ea4f1462a9432
(전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도로시 파커는 누구인가...
도로시 파커/사진=Poet Foundatin 제공
....도로시 파커는 보그(Vogue)와 베니티페어(Vanity Farir)에서 드라마 등의 논평을 쓰며 평론가로 일을 첫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신랄한 독설로 베니티 페어에서 해고된 이후 라이프 지(Life)로 자리를 옮겼다.
도로시 파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Algonquin Round Table)이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은 1920년대 당시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인 '바이셔스 서클'(Vicious circle)이 주도한 비공식적 작가모임이다. 존 F.케네디의 어린 시절 소원 중 하나가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알곤퀸 호텔의 도로시파커 스위트룸/사진=알곤퀸 호텔
.....멤버들은 뉴욕의 알곤퀸 호텔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시사와 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알곤퀸 호텔의 라운드 테이블에서 많은 책과 영화가 탄생했으며 주간잡지 '뉴요커'(Newyorke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뉴요커의 본사는 지금도 알곤퀸 호텔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파커도 뉴요커에 논평을 여러편 실었다.
1922년 파커는 '그런 작은 그림처럼(Such a Pretty Little Picture)' 이라는 제목의 첫 단편을 발표했다. 1925년에 발표한 첫번째 시집 '이너프 로프'(Enough Rope)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29년엔 자신의 자서전인 단편소설 '빅 블론드'(Big Blonde)로 오 헨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파커의 이야기에는 가족, 인종, 전쟁 및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묻어난다. 소외계층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내 흑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알곤퀸 호텔(왼쪽)과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 가운데 여자가 도로시 파커./사진=빌글래드스톤
.....파커는 글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30년대 할리우드로 옮겨 1937년 영화 시나리오인 스타탄생(A star is born)을 써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커는 정치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대항한 좌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 이혼을 맞은 파커는 다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호텔에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1967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진채 발견됐다. 파커는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17091110172359379&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기사 전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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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파커는 당대 사교계의 유명인사였군요. 그런 반면 뛰어난 문인이기도 하고 사회의식도 남달라서 매카시즘과 싸우고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서고...한 시대를 정말 화려하고 치열하게 산 사람이군요.
그리고 이 사태에 대한 젊은 작가의 글 하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0002
(전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시를 가르치는 자리를 달라고 했다면 필시 창작 강의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나는 창작 강의가 주를 이루는 문창과에 다니면서 많은 강사와 교수를 만났다. 그중에서는 국문학이나 문예창작학 석박사 학위가 없는 경우도 분명 있었고,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학위를 가지고 교수 자리에 있기도 했다. 당시 학위를 제한하지 않는 예외 조항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성'이 인정되는 경우였는데, 첫 시집만 54쇄가 팔려 한 시대를 풍미한 최영미 시인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 것일까?
네 해 전을 기준으로 한 모교 정교수의 평균 연봉은 1억463만 원이었다. 재작년 기준 문인 중 예술활동 관련 수입이 없는 사람이 절반에 가까우며(49.2%), 연간 500만 원 미만을 버는 사람이 34.6%다. 반면 예술활동으로 연 50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은 전체의 0.1%다. 예술활동 밖에서조차 수입이 없는 사람 역시 37.9%에 달한다. 예술 이외의 활동으로 5000만 원 이상을 버는 사람은 5.6%이다.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500만 원 미만인 경우, 여남 비율은 각각 59.8%, 50.8%로 남성에 비해 여성이 10%포인트 더 많다. 고수익(연 4000만 원 이상) 집단을 성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두 배가 넘게 차이 난다. 물론 적은 쪽이 여성(4.3%)이다(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실태조사 2015).
학교를 다니면서 들은 수준 미달의 강의가 꽤 있었다. 임용 때 운 좋게 들어와서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수업이 지루해 졸고 있는 학생들을 교실 문밖으로 내보내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수업 시간을 한 시간 지각하는 게 매사 양반이고 "내가 홍대 가면 너네 또래의 바텐더들이랑 술 먹는다"는 별로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강사도 있었다. 물론 비즈니스맨처럼 강의계획서를 짜 와서 아주 성실하게 가르치는 수업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 덕에 나는 졸업할 즈음에는 이 학과가 학문 분과로서 존속해도 되는 학과인지 다소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모교 대학원에 안 갔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업에서 뭔가를 배웠다는 뿌듯한 기분으로 교문을 나설 수 없었다. 굳이 문예창작'학'씩이나 가르쳐서 나 같이 느끼는 학생을 만들어 낸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학문의 존폐를 논하기 전에,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읽고 쓰는 일이 숨이 막혔"던 것이다.
참 우연이다. 앞서 적은 '수준 미달'의 수업을 한 교수들이 모두 남성이었다니. 아니, '수준 미달'의 여교수 수업을 접할 기회라도 많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강사들 몇 명을 제외하곤 여자 정교수의 창작 강의는 소설과 시에서 각각 한 번씩 들을 수 있던 게 전부였다. 또 우연찮게도, 그 수업들이 내가 들은 창작 강의 중 제일 좋았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최 시인에게 창작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자리를 줬어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 공부할 만한 학문을 찾아 대학원에 진학한 동문이 내게 말했듯 "(교수들이) 엄연히 학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예술가 연기하는 게 보기 좋지 않았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녀도 시창작 전문가가 맞다.
더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누구에게는 기회가 주어졌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예창작학과에는 여학생들의 비율이 늘 절반 이상이거나, 혹은 훨씬 더 높다. 그러나 과거 홍보팀에서 3년쯤 동문들의 진로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했을 때, 막상 작가로 데뷔하는 비율을 살펴보니 성비가 비슷하거나 남학생들이 더 많은 것으로 보였다. 왜 그랬을까? 데뷔한 이후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글쓰기를 하는 여성 작가를 떠올리면, 찾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학과 내 정·부교수 중 여성 교수는 단 한 명이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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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이 국문학 학위가 없어서 대학에 강의 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분이 서양사(학부)와 서양미술사(대학원) 학위만 있어서 그런가 했었는데 문예창작과 시 강의라면 충분이 자격이 있다는 얘기네요. 맞아요. 20년 전이긴 하지만 50만부가 넘는 시 베스트셀러를 냈고 이후로도 꾸준히 23권이 넘는 저서들을 냈는데 대학 외부 강사 자격은 충분한거 아닌가요?(정교수 자리를 원한것도 아닌데;;)
젊은 작가의 좋은 글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제가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 사정은 잘 모르지만 비싼 등록금 내고 저런 교수들한테 수업받았으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아이고....부모님 등골...T.T)
2017.09.14 13:10
2017.09.14 13:21
2017.09.14 14:15
휴우.................. (아주 깊은 한숨)
2017.09.14 15:40
2017.09.14 15:39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출간된지 근 백년이 다되어가는데 별로 나아진 게 없는 듯하네요.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도 한 인터뷰에서 영국 정부의 지원금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지 않았다면 해리포터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던데 이런 환경에서 우리 사회는 노벨문학상을 채근하고 있는 현실이죠. 최영미 시인도 진절머리를 내고 등을 돌리게 만든 문단계 성폭력까지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네요. 위키를 보니 대학 강의 경험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변혁을 꿈꾸다 좌절해 예술인이 된 예민한 감수성의 시인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마도 이 사회에 그리 많지 않았을 테죠. 정말 이번 일이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네요.
https://ko.m.wikipedia.org/wiki/최영미_(시인)
2017.09.14 15:45
듀게 모임 나갔다가 <참고문헌없음>이라는 책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 문단내 성폭력도 엄청 나더군요;; 사례들 보다가 진짜 기함하는 줄…-_-; 문단과 출판계에 그런 개쓰레기들 천지…진짜 끔찍하더라는…>.<
조앤 롤링이 당시 정부로부터 받은 생활 보조금이 한화로 대략 월 40만원 정도 되더군요. 그 돈이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지원된다고 했었죠. 그런데 더 중요한건 주택 지원이었습니다. 아이가 자랄 때까지만이긴 했지만 월세 걱정없이 살았으니 저 돈으로 버티면서 카페 가서 글을 쓸 수 있었겠죠.
2017.09.14 16:20
2017.09.14 16:41
2017.09.14 16:28
제가 이번 소동 초반에 기레기들과 대중들의 천박한 난동에 어이가 없었던 이유는, 문학쪽은 몰라도 미술계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제가 오래전부터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어 최영미 시인의 제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사연이 있습니다. 미술계의 경우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네임드 작가보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신인 작가들 을 대상으로 레지던스 사업체들이 일종의 투자개념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계약을 하는데, 이건 무슨 적선같은게 아니고 일종의 거래입니다. 서로 당당한거죠.
최영미 시인이 불쌍한 호텔에 갑질했다는 것도 개소리지만 구걸한 것처럼 욕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에 개소리라고 생각해요.
한국사회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한심스업게 천박한 상태인지 제대로 보여준 사건으로 남는다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수준에서 돈 좀 된다고 한류니 뭐니 난리를 치다 중국시장 하나 막히니 바로 폭망을 하지....
2017.09.14 16:44
2017.09.14 17:49
지자체 지원은 성공 사례보다는 실패하거나 적폐덩어리가 되는 사례가 더 차고 넘처서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 소동에 대한 대항 사례로 들고 싶지 않습니다;
지자체는 일종의 엔젤펀딩 개념에 공무원들의 관료적인 마인드와 중간관리 혹은 위탁관리 주체들(보통 지역별 XX협회 따위)의 패거리질까지 더해져서 특권화된 수혜자들이 그야말로 기생충화 되어가는 사례가 많이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투명하게 제안하고 협의하며 각자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최영미 시인이 시도한 사례가 지자체 지원 경우보다 훨씬 바람직한 모델입니다.
2017.09.14 18:51
오, 그렇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다 없어져야 할 학과들. 저런 학과들이 창작을 죽이고 있고 문학공산품의 노동자 양성소. 결국 그들만의 문법을 익힌 돈 되는 독자들만 배양해서 또 그것이 문학이라고 주입하고 창작이 아닌 모방의 뫼비우스에 갇히게 되는 곳. 미대, 문학과, 음대, 예술대는 다 없어져야 해요. 미8군 주변 바 출신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가 월세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것을 보여주던 오래된 방송이 있었죠. 좋은 학교를 나온 어줍잖은 실력의 음대 교수는 갑질해가면서 국내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게 음대만의 일이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