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8 17:35
엊그제 조OO 듀게님의 영화 사이트에 잠깐 들어갔다가 <Annihilation>의 평점이 높은 걸 보고 영화를 찾아서 봤아요.
<엑스 마키나>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Alex Garland의 두 번째 영화죠.
<Annihilation>의 각본은 직접 쓴 게 아니라 소설의 각색이지만 영화를 통해 이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흥미진진해요.
저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렉>과 같은 SF 영화의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의 영화는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이 감독의 영화가 과학과 관련된 지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인물들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전달하기 때문일 거예요.
<엑스 마키나>에서 튜링 테스트의 변형된 질문을 던질 때부터 저는 이 감독이 참 좋았죠.
(상대가 로봇인 걸 알면서도 그 상대가 의식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고 그 상대에게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 상대를 위해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이 일을 해내는 인공지능 로봇이 진짜다!! 뭐 이런 거죠.)
<엑스 마키나>에서 에바는 케일럽이 그녀가 실제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마침내 그녀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듦으로써 이 변형된 튜링 테스트를 멋지게 통과해요.
그런데 그걸 보여주는 과정에서 감독은 케일럽이 에바에게 매혹되고 그녀에게 헌신하게 되기까지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흥분과 격정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보여줘서 관객 또한 이 영화에 감정적으로 개입하게 만들었고 저는 그 점이 참 좋았어요.
<Annihilation>에서는 감독이 던지는 질문이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진 않는데요.
(이하 스포일 수 있어 마우스로 긁어야 글씨가 보임 ^^ '일희일비' 님께 배운 방법이에요.)
이 영화에는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의 몸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그런 공간이 등장해요.
그 공간은 사실상 소멸의 공간이죠. 끊임없이 유전자가 변형되는 인물들은 그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어느 순간 몸이 팽창하면서 폭발하기도 해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주위 환경에 의해 저절로 변해가고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사람들,
인간의 유전자를 그대로 베껴서 나타난 또 다른 생물체, 자신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생물체와 마주하며
자신의 존재가 대체될 수 있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사람들.
인간이 여러 생물체들에 가하고 있는 유전자 변형, 그리고 인간 자신에게 가하려고 하는 유전자 변형의 극단적인 모습,
과학이 열망하며 나아가려고 하는 곳의 극단적인 결말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하고 감독이 묻는 것 같기도 해요.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자신처럼 변화시키고 싶어하고, 또한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존재들처럼 변화시키고 싶어하지만
그런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세계는 어쩌면 이렇게 악몽과도 같은 세계가 아닐까 하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것이 단지 관객의 머리 속에서 지적인 유희가 되지 않도록 그런 상황이 야기할 수 있는
공포와 고통을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 (특히 나탈리 포트만의 마치 유리처럼 들여다 보이는 그 생생한 표정들)을 통해
관객도 실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관객이 스스로 그 상황을 체험하며 그런 질문을 떠올릴 수 있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이 감독이 갖고 있는 훌륭한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세련된 SF 영화였던 <엑스 마키나>보다는 좀 더 거칠고 강력한 판타지와 호러의 결합 같은 이 영화를 보면서
첫 번째 영화보다 더 모험적인 시도를 하고 어떤 문제를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하려고 애쓰는 감독,
첫 번째 영화와 마찬가지로 독창적이고 지적이면서도 인물들의 생생한 감정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려는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고 앞으로도 이 감독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다 쓰고 나니 안 보이게 한 부분이 너무 많아 내용이 별로 없는 듯한데 어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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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hilation>에 관한 내용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급하게 <The Florida Project>에 대한 감상도 좀 덧붙이자면...
사실 전 이 영화는 즐겁게 감상했다기 보다는 민폐 모녀의 행동을 보면서 좀 괴로웠는데
감독이 제기하는 문제는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이런 엄마와 딸이 있는데 이런 엄마에게 딸을 계속 맡겨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딸을 데려가도 되는가?
어떤 것이 이 딸을 위하는 길일까?
사회적 약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사실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은 언제나 있죠.
이 영화는 그런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요.
사회적 약자,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막연히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그 개별적인 사람이 실제로 마주쳤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2018.03.18 18:06
2018.03.18 18:43
점점 넷플릭스를 해야 하긴 하나...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가는군요. <엑스 마키나> 좋았어요.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면 보고 싶군요 매우. 음.
2018.03.18 19:07
저도 <엑스 마키나>를 만든 감독이라는 걸 알고 당장 찾아봤었는데...
혹시 넷플릭스 한 달 무료 서비스는 이미 쓰셨나요?
어쩌면 아버지나 어머니 이메일이나 연락처로 회원가입 가능할지도... ^^
2018.03.18 18:57
2018.03.18 19:24
영화 속에 엄마의 과거는 자세히 안 나와서 잘 모르겠는데 만약 딸이 이런 방식으로 큰다면
딸이 컸을 때 단지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해결이 될까요?
어쩌면 엄마도 이 딸처럼 키워졌는지도 모르죠.
사회는 당연히 이 엄마와 딸에게 살 곳과 일자리와 마련해 주려고 애써야겠지만
만약 그들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식이라도 뺏어다가 성실한 사회 구성원이 되게끔 세뇌시켜야 하는가... 아, 잘 모르겠어요. ^^
2018.03.18 19:31
2018.03.18 19:30
2018.03.18 20:57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의 부재에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라면 이 민폐 모녀보다는 더 선하고 성실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계층의 세습은 단지 경제적 부 혹은 가난이라는 물질의 세습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의 언어/지식/가치관 등 문화의 세습에 의해 더 공고해지고, 사실상 세습될 물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문화적으로 세습된 것들이 더 강력하게 자신이 속한 그 계층에 옭아매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세상에서 제일 근원적인 관계를 끊을 권리가 국가에게 있는가?
아니면 아이를 그런 부모에게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인가?
저는 잘 모르겠고 제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여서 흥미롭다고 느꼈어요.
(물론 제가 생각한 게 감독의 의도나 다른 분들이 느끼고 생각하신 것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고... ^^)
2018.03.18 21:04
2018.03.18 21:07
2018.03.18 21:25
'서던 리치'가 소설 제목이었군요!! ^^ 저는 Sudden Reach라는 단어를 급조해서 넣은 줄 알았는데
Southern Reach였네요. 제가 소설을 별로 안 읽는 사람이다보니 맥락을 몰랐어요.
원제에 없는 영어를 만들어 넣은 줄 알았는데 원작소설 제목이라니 용서가 됩니다. ^^
저는 이 감독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적은 게 참 마음에 들어요. <엑스 마키나>는 딱 4명이었고
<Annihilation>도 주요인물은 딱 6명 정도, 총 10명을 안 넘는 듯...
2018.03.19 10:08
<Annihilation>는 <엑스마키나>도 그랬지만 재미있게 봤는데 뭔가 좀 아쉬워요. 근데 이걸 딱히 집어내기 힘드네요 ㅎㅎ 프리 프로덕션은 최고였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왜 배경이 플로리다 였는지가 방점인거 같아요. 저도 그쪽 지식이 별로 없지만 현재 플로리다에서 저렇게 여관 전전하며 혹은 차에서 지내는 가족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엄마의 민폐와 아이와의 관계만을 그리고 싶었다면 굳이 플로리다였을 필요는 없었을거 같아요.
2018.03.19 22:27
<Annihilation>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감독 의외로 배짱이 있구나 싶은 실험적인 장면들이 있었죠.
아차하는 순간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장면들인데 실낱 같은 긴장감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더군요.
어떻게 시각화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스러웠을 법한데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와 느릿하고 고요한 시각 효과와
으스스한 느낌의 음향 효과가 합세해서 (제가 보기엔) 잘 버텨냈어요. ^^
그래도 이런 장면들과 다소 모호한 스토리를 보면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긴 해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플로리다가 배경인 것에 뭔가 깊은 뜻이 있었군요.
각자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영화가 흥미로운 것 같기도 해요.
3월 12일에 넷플릭스에서 개봉해서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고
댓글이 없을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자급자족 댓글 하나 ^^
Crosby, Stills & Nash - Helplessly Hoping
이 영화의 한글 제목이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이던데 '서던 리치'는 좀 빼주면 안 될까요?
'소멸의 땅'만으로도 충분히 멋진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