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1 01:18
어차피 오래 사귈 수 없는 걸 알고 만난 거라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니 참 섭섭하네요.
헤어질 운명 전에 그의 마음도 아무래도 처음 같지 않은 것 같아 더 섭섭하고요.
그런데 이번 연애는 여러가지로 저에겐 좀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일단 이 친구는 외모가 그렇게 근사하지 않아요. 네이단 레인이 살이 빠진 모습 같은데 머리가 반은 벗겨지고 배는 불룩하고 어깨는 매우 좁고 팔근육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사실 여태껏 사귄 사람들 중 절반은 게이월드에서 나름 유명한 외모의 소유자들이었거든요. 이전엔 외모를 많이 봤었나봐요.
저는 처음에 별로 만날 생각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만나고 싶다 그래서 술이나 얻어먹자 하는 맘으로 나갔습니다.
첨에 만났을 때부터 외모는 정말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이야기 하다보니 너무 웃긴 거에요. 그리고 특유의 웃음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뭔가를 나에게 설명해주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난민문제, 영어의 어원, 이 도시의 역사 등등…미술관에서 작품들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아했고요. 함께 웃고 이야기하면서 정말 이 친구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사랑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만약 ‘내 남자친구야’라고 소개하면 저를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전 이 친구의 형편없는 외모와 어처구니없는 패션센스까지 참 좋았습니다.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면 커밍아웃할 용기도 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만남이다 보니 인생 살아온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10대의 가슴 설레는 그런 감정이라기 보단 이사람 저사람 이런일 저런일 겪으면서 알게 된 인생의 경험을 서로 공감한다는 게 참 멋진 일이더라고요. 그래서 흰머리카락과 벗겨진 머리, 주름살이 더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어떤 역사를 견뎌온 아름다움이랄까요..그런 걸 느꼈습니다.
섹스에 관해 이전 ex들과는 좀 달랐던 게…좋고 싫고를 명확하게 말해주는 거였어요. ‘난 너가 이렇게 해주는 게 좋아’ ‘이번엔 이게 참 좋았어’ ‘지금 날 아프게 하고 있어. 이렇게 해줘.’ 등등 구체적으로 말해주니까 훨씬 편하고 즐거운 관계를 가 수 있었습니다.
이제 조만간 헤어지면 내가 어떻게 지낼까 솔직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텅빈 침대에서 아침에 혼자 깨어나면 공허하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극복하겠죠. 어쨌든 이번 연애를 통해 좀 더 진실한 관계가 어떤 건지 깨달았고 제가 생각보다 sweet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다음 연애에는 제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들어요. 너무 늦게 깨달아 더 이상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2018.09.21 03:33
2018.09.21 04:36
공감해 주셔서 감사요. 확실히 20대 때 하던 연애랑은 느낌이 다르네요.
2018.09.21 08:12
흰머리 탈모 배 이야기에 어쩐지 공감이 됩니다.
연애 얘기는 아니고, csi 어느 화에서 동료 누군가가 죽고 경감님 모습을 오래 보여주는데, 옆모습에서 그 튀어나온 배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군요. 모습이 망가져서 슬픈 게 아니라 그 사람 배가 그렇게 되는 동안 겪었을 세월이 참 슬펐어요.
나한테서 나쁜 걸 뽑아내는 사람이 있고 좋은 걸 뽑아내는 사람이 있던데 자꾸 좋은 면 발휘하게 하는 분을 만나셨나 봅니다.
2018.09.21 09:03
공감 감사합니다. 맞아요. 이런 거 젊었을 땐 크게 못 느끼던 것들인데 서서히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정말 이번 연애에서는 영화 속 장면같은 경험을 여러번 해서...제 스스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던지라...제 스스로가 성장하는 계기가 된 거 같습니다.
연애 감정을 이해하니 지금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