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일본 만화/라노베 쪽에선 이세계 물이 많이 나오네요. '이세계 식당 노부'의 히트를 시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요. 1) 기존의 라노베/모험물/게임 공식을 살짝 바꿔서 미래를 알고 있는 주인공/조연이 게임 풀듯 이세계 인생을 헤쳐나간다, 이런 류가 있고, 2) 한편으로는 선진 기술을 가지고 낙후된 이세계에 가서 보람을 느낀다, 이런 류가 있더군요. 


두번째 부류가 우려스러웠습니다. 하다못해 자위대가 이세계 가는 라이트노벨/만화도 있어요. 내용을 보자하면 일본의 문화, 특히 식문화는 세계에서 최고고, 중세 독일로 추정되는 이세계는 도무지 맛을 몰라요. 감자나 삶아먹고 시금털털 맥주나 마실 따름이죠. 거기서 회를 선보이고 장어를 먹이고 일식 된장을 전파해요. 일본인들은 정말 저성장이 지긋지긋하구나, 뻗쳐나가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중에는 에어컨, 간이 발전기, 핸드폰, 식물의 종자도 들고 갑니다. 귀찮으면 아예 이세계와 현재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물자와 기술을 실어날라요. 때에 따라선 복권에 당첨되서 이 많은 물건을 현재 일본에서 살 수 있다는 설정을 넣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세계의 돈을 가상공간에 넣으면 현재 일본의 식료품이 자동배달된다는 편리한 설정을 넣기도 해요. 할아버지 세대들은 버블 세대 이야기하면서 자기네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잘나갔나 열심히 일했나 하루하루 고성장을 맛봤나 이야기하는데, 우리도 지금 이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고 이세계에 가면 그 정도는 할 거라구! 하는 상상을 보는 것 같아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세계가 전쟁으로 초토화가 된 한국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2. 그런데 이 일본식 라노베를 한국식으로 접목시킨 소설/만화가 있더란 말이죠. 지금 네이버에 '베스트 도전만화'에 10화까지 만화가 연재 되었어요. 

https://comic.naver.com/challenge/list.nhn?titleId=714775


처음엔 이게 뭐야 싶었는데 한 화 한 화 보다가 뒷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서 원작소설을 구매하고 말았네요. 군대 이야기 재미 없다고 누가 그랬나요? 관심병사이자 가난한 가정 출신인 강성재가 군에 입대하는데, 취사병 보조가 된 뒤 '요리사의 길 튜토리얼'이라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요리사로서의 레벨을 올려간다는 내용이예요. 양파 천 개 까면 레벨 올라가고, 레시피 배울 때마다 레벨 올라가고 그렇습니다. 이건 일본에선 나올 수 없는 소설이지 싶어요. 남자들은 모두들 군대에 가는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소설이네요. 홀린 듯이 한 화 한 화 마라톤 식으로 읽었습니다. 취사병 하다가 간첩도 잡고 포상도 받는 황당한 이야기지만, 제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디테일을 자세히 써줘서 흥미롭게 읽게 되네요. 


특히 소설에서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자기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중대장'이라고 부르는 게 특이했어요. "대대장은 성재를 믿는다" 이런 식으로 대사가 나가요. 이게 정말이냐고 군대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정말이라고 하네요. 아니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른다고? 이건 무슨,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자기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며 "엘리자베스는 메어리를 믿어요"하는 말투잖아요. 만화와 비교해가면서 원작소설을 읽었는데, 판타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군대 생활을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생기더군요. 첫째 군대 소설이긴 하지만 군 생활이 안끝나요. 도대체 언제 제대하는 건지? 빨리 제대하고 식당 차리는 걸 보고 싶은데 제대가 안되요. 이미 제대 된 거 아닌가 싶은데 7개월밖에 복무 안했다는 거예요. 읽는 나도 이렇게 지루한데 복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하루가 천년같을까? 싶더군요. 둘째 상관들이 역겨워요. 소설 속에서 좋은 상관을 많이 배치해놓았는데도 그렇습니다. 사회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아저씨들인데 나보다 계급 높다고, 먼저 입대 했다고 굽신거리게 만드는 것, 권위적으로 구는 것, 헛소리를 다 들어주고 있어야 한다는 상황이 참 암담하더군요. (써놓고 보니 이게 곧 사회생활의 특징 같기도 하군요) 세번째 군대라는 상황 자체가 작품에 긴장감을 줍니다. 아무리 성재가 잘 나가도 또 열심히 군생활을 해도, '군대'안에 있기 때문에 무슨 황당한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상관의 인정을 받으려는 남자들 간에 질투나 정치게임도 아슬아슬하구요. 


네이버에서도 금방 베스트 도전에 올랐던데, 곧 정식연재 되거나 하면 드라마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3. 전직 외교관 장부승씨가 오마이뉴스/내일신문에 '대한민국 외교관에겐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가?'란 글을 기고했네요. 이 글을 읽으니 2005년 아시아나 노조의 요구가 떠오릅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당시 노조의 요구 사항에는 다음  두 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승격시 영어시험 면제와 운항 전 음주측정 금지 였습니다. 이 중 영어시험 면제 관련해서는 조선일보가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2004년 9월 국제만간항공기구가 한국 등 영어를 모국어로 안쓰는 국가들에 대해 영어 실력이 없는 항공 종사자들은 현업에서 배제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매년 전체 항공 사고 중 15~25%가 ‘커뮤니케이션 문제’ 때문에 일어나며  국제선의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많이 난다는 판단 아래 이같은 요구를 한 것이다.... ICAO는 특히 아시아나 남미계 조종사들이 영어 실력이 뒤떨어지는 탓에 항공 안전에 위협을 초래하는 해프닝이 자주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항공사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항공사들은 “영어 때문에 항공기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정부가 ICAO 요청에 과잉대응했다고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


하기사 기사 자세히 뜯어보면 항공사들의 말도 틀리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전체 항공 스케줄 중에서 항공 사고가 나는 경우 자체가 많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그 항공사고 중에서 다시 15-25%가 커뮤니케이션 문제 때문에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이 중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영어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나눈다면, 영어 때문에 항공기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 = (1) 항공사고가 날 확률* (2) 15-25%* (3) 영어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률을 곱해야하니 영어 때문에 항공기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강변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는 그러니까 나이 먹어서 영어 공부하기 고달프다, 내가 미주 노선 뛸 일이 얼마나 있냐, 사고 얼마 안난다, 이런 소린데, 전형적인 안전 불감증이죠.  


링크한 장부승씨의 기고 읽어보면, 비슷한 논리를 따라갑니다. 외교관의 일 95% 이상이 한국말로 다 하는데 왜 외교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 외국어라고 생각하냐? 란 내용이죠. 특히 서기관이나 과장급 되면 매일 읽어야하는 문서량이 몇백 페이지는 된다, 그러니 한글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가 더 필요하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서기관이나 과장급 일에 속하는 한글 보고 문서를 읽다가, 만일 느낌이 이상하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원문을 확인해야하지 않나요? 그럴 때마다 통역관을 부를 순 없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문서 처리 속도가 또 늦어지겠죠. 또한 해외 인사를 만나서 이야기 할 때 뉘앙스를 이해 못해서 한글 문서 작성에 애로를 겪으면 안되지 않을까요? 


뭣보다도 이 글은 중간에 예시가 잘못 되었습니다. 위에서 16번째 문단을 보면, 외무고시 2부제도를 예로 듭니다. 외무고시 2부제도는 재외 동포 자녀 중에 외국어 잘하는 인재가 많으니, 해외 인재를 활용하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막상 응시자나 합격자 중에서 재외 동포 자녀는 거의 없었고, 현직 외교관 자녀나 국내에서 나고 자라다가 해외에서 잠시 공부하고 온 자녀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해외에서 나고 자란 해외동포나 그 자녀는 응시율 자체가 높지가 않았다."고 하네요. 외국어 잘하는 재외동포를 뽑으려고 했지만 지원 자체를 많이 안하더라. 외무부에서 결국 뽑은 사람들은 현직 외교관 자녀 혹은 (아마도) 주재원 자식들이였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걸 "우리 외교 현장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인력 수요와 우리 정치권이나 혹은 정부 수뇌부에서 생각하는 외교관의 하는 일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근거로 듭니다. 


이건 좋은 근거가 못되요. 해외동포들이 외무고시 2부 제도에 응시 자체를 많이 안했다면 그건 해외동포들이 대한민국 외교부에 응시할 충분한 유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직 외교관 자녀들이 대거 외교부에 응시할 유인이 (그리고 아마 직간접 정보도) 훨씬 많다는 걸 시사해요.  "우리 외교 현장의 업무 수요나 방식을 고려해 볼 때, 해외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평생 살아온 분들이 외교부에 들어온다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란 말도, 외교부에서 해외 인재를 소화할 만한 조직 역량이 안된다는 뜻 밖에 안됩니다. 이건 그냥 '우리 조직에는 내 자식, 내 친구 자식이 가장 적합하더라. 왜냐하면 조직 문화가 게으르고 배타적이라서'란 소리 밖에 안되지 않나요?


이 분은 한글 구사가 외교관 업무에 가장 중요하다는 걸 주장하는 분이고, 조직에 있는 동안 수많은 한글 문서를 만들어보셨다는데, 오마이뉴스에 기고하기 전에 자기 논거를 다시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6305&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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