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양지바른 언덕

2018.12.05 20:47

은밀한 생 조회 수:1567

저에겐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가 있는데요 12월 말쯤에 이 친구의 생일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송년회 겸 이 친구 생일파티 겸 그렇게 12월에 꼭 만나죠.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친구 생일을 안 챙겨본 해가 없어요. 물론 제 생일도 이 친구가 늘 챙겨줬지요. 그 애에게 어울릴만한 카키색 점퍼를 사뒀습니다. 사실 전 코트를 좋아해서 이 친구도 코트를 사주고 싶은데 매장에 데리고 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양할 아이라서, 그렇다고 제가 맘대로 코트를 사자니 코트는 자기 몸에 맞는 핏과 디자인이 뚜렷한 영역인데다 이 친구는 코트보다는 점퍼를 좋아하는 취향인지라 적당히 아무데나 외출용으로 막 입기 좋은 예쁜 걸로 샀어요.

사실 베프가 이 친구 한 명이에요. 나머지 저의 인간관계는 적절한 거리감을 둔 그런 무해무익한 관계들로 구성돼있어요. 아무런 이해타산과 소속감이 없는 그런 지인들요.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꼭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이 친구와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이 내내 사이좋게 잘 지내와서 다른 친구를 둘 필요를 못 느낀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제가 무리를 지어 어울려 다니는 걸 안 좋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게 어딜 가나 잘 어울리고 성격 참 동글동글한 이 친구도 베프는 저 한 명이에요.

저는 이 친구를 늘 “나의 양지바른 언덕아” 라고 불러요. 이걸 카톡이나 편지뿐 아니라 육성으로도 불러요. 어떤 분들이 보면 오글거린다고 기겁하시겠죠? 그렇지만 사실인걸요. 이 친구는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마음에 뒤틀림이 없고 생활은 성실하고 성품은 순한데다 자신의 단점과 장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남과 비교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에요. 색으로 치면 개나리색 같은 친구죠. 물론 타고난 밝음과 순탄한 인생살이의 필연적인 결과로 어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가끔 자기 딸아이도 엄마는 이런 감정에 대해 절대 모르세요 한다지만. 저는 이 친구의 그 안정감과 밝음이 좋아요. 그 밝음이 워낙 태생적인 거라서 타인에 대한 멸시를 감춘 교만한 밝음의 폭력성과는 다른 근본적인 따스함이거든요. 양지바른 언덕의 그 따스한 햇빛처럼요. 눈 아프게 새하얗고 차가운 형광등이 아닌.

그리고 이 친구의 신기한 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거예요. 저는 사실 죽을 때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내 시커먼 덩어리 같은 걸 상상하면 너무 무섭거든요. 어둡고 차가운 공간에 형체 없이 희미한 자각만 있는 채로 떠 있는 그런. 그런데 나의 양지바른 언덕 베프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덤덤하게 얘기해요. 음 워낙 마음이 안정적이고 견고한 아이라서 그런 건지, 고등학교 때와 성인 이후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보낸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인지. 여튼 이 친구는 죽음이 두렵지 않대요.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땐 늘 서로 꼭 포옹을 하는데 가끔 이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휴 아쉽다” 라고 말하면 왠지 마음이 조금 슬퍼져요. 이렇게 만날 날이 혹시 우리의 생각보다 얼마 안 남은 거고 10년이 금세 지나서 어머 벌써 10년이나 지났니? 할까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자 하면서 쓸쓸함을 여미죠.

뭐 먹을래? 물으면 난 너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아
어디 갈래? 물으면 난 너 가고 싶은 곳이면 다 좋아 대답하는 내 친구.
예쁘고 새침한 고양이와 웃기게 생겼지만 진중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아들딸도 키우고 남편도 키우는 내 귀여운 친구. 웃는 모습이 영심이 같고 몸이 유연해서 발등을 120도 각도로 꺾을 수 있는 친구. 동물 울음소리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 내며 욕은 하지 않고,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 같은 건 한 적이 없는 나의 양지바른 언덕.

어서 보고 싶네요.
12월이 되면 늘 이 친구 생일 선물 궁리부터 해요.
여러분의 베프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시간되시면 한번 해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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