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2019.01.10 20:07

흙파먹어요 조회 수:772

언제나 넷플릭스가 건드리지 않는 곳을 잘 살펴가며 밟는 왓챠가 이번에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업로드 했습니다.

왓챠가 옛날 영화들은 잘 내리지 않으니까, 계정이 있으신 분들은 잊지 않고 가슴 어디에라도 잘 넣어뒀다가

문득 올려다 본 사무실 창 밖 하늘이 유난히 소줏빛인 날이 오면, "프란체스카 이 박복한 여자야..." 

무명천으로 눈물을 훔치며 챙겨 보자구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했을 때 저는 열 다섯이었고, 

두루마리 화장지의 용도가 의심스러운 학교 앞 DVD방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스물 다섯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학교 앞 DVD방은 진작에 사라졌고, 그 무렵 좋아했던 여자애는 아이 엄마가 되었다지만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의 짧아서 길었던 사랑은 필름속에서 여전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불확실을 남긴 채.


- 빛이 다르거든요.


다리에 도착해 기껏 셋팅을 마치고도 셔터를 누르지 않는 킨케이드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프란체스카가 묻습니다.


-왜 찍지 않는거죠? 


킨케이드는 겸손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대답합니다. 


- 빛이 다르거든요. 해질무렵이 되면 근사한 장면을 찍을 수 있을 거에요. 


한낮의 뜨거운 볕을 지나 가장 빛이 아름다운 날에 프란체스카에게 찾아 온 사람. 

언제나 설렘으로 충만했던 그리운 고향 이탈리아 바리를 아는 사람. 

유쾌한 농담과 함께 식사를 나눌 줄 알고,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때를 위해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 


하지만, 가장 화창했던 날에 꿈처럼 시작된 이들의 사랑은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오후 암전되고 말아요. 

생활은 개인 날과 궂은 날이 혼재된, 어제와 내일이 맞잡은 사슬 위의 오늘이었고. 

짊어 진 등짐이 가벼운 킨케이드와는 달리, 프란체스카에게는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가방에 담아 놓은 희노애락이 너무나 많았어요. 


킨케이드는 간절한 눈길을 보내며 프란체스카 앞에 서 있었지만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장에 태우고 자신이 사는 도시를 향해 내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몇 번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의 등으로 몇 번의 이별을 말 했기에 

사랑에 빠진 이유를 아는 만큼, 이별해야 하는 이유도 너무나 잘 아는 킨케이드. 

누가 그의 비겁함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스물 다섯의 저는 왜 프란체스카가 부여잡은 차문을 열고 달려나가 킨케이드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궁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어서 가요. 프란체스카. 가서 당신의 인생을 찾아요. 바로 오늘이, 당신이 사랑하며 살아갈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랍니다.

이제는 그녀의 결정에 그냥 가슴이 아플 뿐이에요. 

메릴 스트립이 차창에 머리를 묻으며 괴로워 할 때는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오는 거지요. 


그 괴로움이 그저 뒤늦게 찾아 온 사랑과의 작별이 아쉬워서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몰래 그토록 바라왔던 다른 세상으로 뻗은 다리가 그녀 눈앞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허무하게 휩쓸려가고 있는 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프란체스카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한껏 멍청한 새벽이면 책상에 앉아 흰 종이에 원을 그립니다. 

이제는 늙어가는 내 부모가 바라는 나, 해야할 일들이 기대하는 나, 언젠가는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없는 미래의 나, 

되고 싶었던 나, 될 수도 있었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그렇게 줄곧 멍청한 상태로 앉아 있다가 알람이 울리면 세수 하고, 떨어진 거 아무거나 주워 먹고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현관에 서서 되는대로 꽉 묶어 둔 신발끈을 보곤 훅 눈물이 솟아 오를 때가 있는 거에요.


그렇지만, 프란체스카는 눈물을 감추는 법에 익숙한 여자였어요. 

비에 흠뻑 젖은 킨케이드를 뒤로 하고 돌아온 그녀는 감쪽같이 미세스 존슨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길러냈고, 남편 존슨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봤어요. 

그리고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가 평생 엄마가 엄마인줄만 알았지, 엄마가 프란체스카인 줄은 몰랐던 자식들의 눈으로 읽힙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그 날, 미세스 존슨으로 돌아 온 프란체스카에게 남은 인생은 무엇이었을까요? 

킨케이드와 함께 보낸 며칠. 그 며칠이 프란체스카 인생의 고작이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그 며칠이 그녀의 남은 반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은 늙지 않은 지금 얘기하고 싶진 않은 거지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모르겠는 것 투성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제 나이 마흔 다섯살에는 분명 이 이야기가, 킨케이드의 마음과 프란체스카의 결심이 다르게 읽히게 될 거라는 것. 

쉰 다섯에는 또 다시, 예순 다섯에는 그때 또 다시. 

이 이야기는 새롭게 읽히고, 새롭게 발견이 되겠지요. 


그때 저는 어떤 후회를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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