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즘은 부쩍...얼굴 본 지 오래된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서 한번씩 보고 있어요. 그럴 만한 에너지가 있을 때 그래야 하니까요.


 요즘 로제 샴페인이 땡긴다는 펀치를 만나서 낮술을 했어요. 밤술을 하면 좋았겠지만 밤술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있어서요. 



 2.전에 썼듯이 요즘은 그래요. 일반인 여자를 만나면 성폭력을 저질러도 되는지 안 되는지 미리 확인을 받죠. '성폭력'이라고 하면 뭔가 안좋게 들리겠지만, 그냥 이 단어를 쓰기로 했어요. 왜냐면 무엇이 성폭력이 되고 무엇이 성폭력이 안 되는지는 전적으로 여자가 정하는 거잖아요? 상대에게 예쁘다는 말만 한마디 했을 뿐인데 8개월 후 성폭력으로 징계를 받는 세상이니까요. 그것도 미팅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외모 얘기가 나온 건데, 이 정도면 내가 아무리 용감해도...겁이 날 만 하죠.


 하지만 성폭력을...그러니까 펀치에게 '성폭력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언행을' 해도 되냐고 직접 묻는 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물어 봤어요. 여기서 술마시는대신, 위로 올라가서 방을 잡고 술마시면 어떻겠냐고요. 밑에 내려가서 술을 사와서 말이죠. 그러자 펀치가 대답했어요.


 '아...그런데 여기 방 비싸지 않아? 잠깐 있다가 가기엔 돈 아까우니까 그냥 여기서 마시자.'


 그리고 나는 놓치지 않았어요. 펀치가 그 말을 하기 전에 1초 정도 머리를 굴렸다는 걸 말이죠. 그걸 눈치채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 더 질러 봤어요.



 3.'아, 정말 그게 이유라면 걱정마. 네가 마시고 싶다는 술이 여기 호텔방 값보다 싸거든. 아래 내려가서 비슷한 술을 사들고 호텔방을 잡아도 그래도 더 싸. 자 이제, 위로 올라가지 않을 새로운 이유를 또 개발할거야? 아니면 우리 이제 호텔방으로 올라가는거야?' 


 라고 말하자 펀치는 2초 정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어요. '여은성님 요즘 기분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네. 아주 그냥 활발해지셨어.'라고 말하고 그냥 여기서 마시자고 말했어요.


 하긴 나도 거기까지 왔을 땐 아래 내려가서 술을 사들고 오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펀치와 만난 곳은 남산에 있는 곳이어서 술을 사러 편의점이나 가게에 가려면 걸어내려가는게 아니라 택시를 타고 왔다갔다 해야 했거든요. 위에 올라가자는 말은 그냥 성폭력을 저질러도 되냐고 물어본 거지, 정말로 위에 올라가자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위에 올라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요. 마침 라운지에서 하프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거든요. 하프 연주자가 나오는 날이 있고 아닌 날이 있는데 마침 하프의 날이었어요. 하프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으니, 처음부터 위에 올라갈 마음은 없었어요.



 4.휴.



 5.일단 다과부터 먹고 싶어서 애프터눈 티와 샴페인을 주문하며 샴페인은 이따가 가져다달라고 했어요. 먹으며 뭐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펀치의 친구 얘기, 친구의 친구 얘기, 친구의 친구의 친구 얘기(라기보다 욕)를 재밌게 들었어요. 사실 나는 말할 게 별로 없거든요. 맨날 그 날이 그 날 같으니까요. 누군가를 만나서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순간, 다양한 관계의 얘기를 들으면 재밌어요. 재밌으면서 부럽기도 하고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제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직원에게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미소와 함께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지금부터 칠링을 해서 가져다 주겠다고요. 아까전에 미리 준비해 달라고 했었는데...이제야 칠링을 한다니...지금 당장 샴페인을 마실 수 없다니...기분이 갑자기 매우 안좋아졌어요. 그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펀치가 말해 왔어요.


 '아까전엔 기분이 되게 좋아 보이더니 지금은 바람빠진 풍선 같아.'라고 말하는 펀치에게 물어 봤어요. 조울증을 아냐고요. 양극성장애라고 하면 당연히 모를 테니...조울증을 아냐고 물어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그건가.'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6.'사실 나는 내가 조울증인지 확실하게 몰라. 하지만 어쨌든 요즘은 조증의 시기인 것 같긴 해.'라고 말하자 펀치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긴 어쩌면 내가 조증이 아닐 수도 있죠. 원래 인간은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시기를 겪으니까요. 어쨌든 펀치에게 설명해 줬어요. 


 조증이라서 기분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 기세가 '무언가에 가로막힐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곤 한다고요. 그리고 바로 지금...다과에서 샴페인으로의 리듬이 끊긴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말하자 펀치가 물어봤어요. '그럼 조증이라고 해서 늘 기분이 좋거나 한 건 아니구나.'라고요. 그래서 나의 기분을 모르는 펀치에게 이 시기의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해 봤어요. 



 7.'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거야. 기계식 시계를 알아?'라고 말하자 펀치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샴페인을 좀 마시며 말을 이어갔어요.


 '기계식 시계에는 200개도 넘는 부품...모래알만큼 작은 부품이 들어 있지. 시계를 보면 그냥 돌아가는 듯이 보이지만, 그 밑에선 작은 부품 하나하나가 맞물려서 정교하게 돌아가는 중인 거야. 그 부품들 중 하나만 잘못돼도 시계는 고장나 버리니까 가끔씩 몽땅 분해해서 재조립해줘야 해. 모조리 분해한 다음에 부품 하나하나를 세척하고 정비한 다음 다시 원래대로 완벽하게 맞춰놓는 거지.'


 펀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시계를 그렇게 맡긴다며, 자신도 봤다고 대답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작년-이래봐야 며칠 전까지-에 모임에서 몇번 본 그녀의 남자친구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구두도 신고 시계도 반드시 차고 다니고 운전도 할 줄 알고 정서도 안정되어 보이고 펌도 2주에 한번씩 하는 것 같은...뭐 그런 사람 말이죠. 아, 이건 tmi군요. tmi는 나쁜 문명. 어쨌든 그래서 시계 비유를 다시 해줬어요.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거든. 내가 시계고, 어떤 무시무시한실력을 가진 시계공이 나를 몽땅 분해한 다음에 모든 파츠를 하나하나 세척하고 비틀림을 복구시키고 다시 각각의 파츠를 원래대로 재조립해 놓은 것 같다는 기분 말이지. 머리에 껴있던 안개도 많이 걷히고, 평소보다 몸도 가벼워지고 머리는 초고속으로 회전시킬 수 있고...뭐 그런 기분이 들거든.'


 펀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어요. 그럼 그건 좋은 거 아니냐고요. 그래서 고개를 젓고 다시 말했어요. 


 '방청소를 아무리 깔끔히 해도 조금 지나면 방은 원래대로 돌아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불안한거지. 그게 아주 천천히든, 아주 빠른 속도로든,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 상태도 다시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면 차라리 오버홀을 겪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어쨌든 펀치와 이런저런 소리를 하고...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어요. 그리고 다음에 남자친구를 포함해서 8명을 모아달라고 부탁해 놨어요. 8명을 모아야 내가 원하는 드래곤시티 테이블에 갈 수 있거든요. 그녀는 알았다고 말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되물었어요. 자신의 남자친구를 꽤 좋게 보는 것 같다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말해 줬어요. 슬슬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퇴근길 러시아워에 걸릴 것 같아서요.


 '난 남자는 무조건 싫어. 난 남자들은...뭐랄까. 혐오한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뭐 하나라도 줏어먹을 거 있는 놈이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내가 뭐 하나라도 배우거나 하나라도 흉내낼 만한 게 있는 놈들 말이지. 펀치님 남자친구도 그런 놈들 중 하나야.'


 그러자 펀치는 피식 웃고 한번 예를 들어 보라고 했어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배울 만한 걸로 말이죠.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말해 줬어요.


 '예를 들면...구두 고르는 법. 난 구두를 거의 안 신잖아. 아니면 파마. 이런 머리면 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주에 한번씩 해야 하는지. 아니면 로션. 이런 피부면 무슨 로션을 발라야 하는지, 잠자기 전에도 발라줘야 하는지 뭐 그런 거 말이지.'


 

 8.펀치는 남산을 걸어내려가며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그 나이까지 살았냐고 물어왔어요. 그래서 말해 줬어요.


 '아니 사실 난 더 배울 것도 없어. 그런 건 그냥 여흥이야. 하지만...가끔 그렇거든. 가끔 다른 사람 흉내를 내고 다른 사람인 척 하곤 한단 말이지. 노래방에 가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모임에서 나이 많은 남자들의 꼰대질이나 훈수에 씩 웃어주기도 하고.'


 펀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알려진 것보다는' 사회성이 많은 것 같긴 하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말해 줬어요.


 '왜냐면 매순간 나로 사는 건 돌아버릴 일이거든. 가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거나, 연기를 해줘야 해. 그러고 돌아오면 나로 사는 걸 좀더 재밌게 할 수 있는 거지.'


 사실 이 말은 펀치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어요. 펀치같은 보통 여자를 만나고 나니, 호스티스랑 노는 게 평소보다 10배 더 재밌었거든요. 반대로 호스티스랑 만났으니 펀치같은 여자랑 만나는 게 10배 더 재밌는 거고요.


 이건 복싱과 같은 거예요. 복싱에 절대적인 필살기란 건 없잖아요? 왼손이 오른손을 살려주는 동시에 오른손이 왼손을 살려주는 게 복싱이니까요. 왼손과 오른손이 똑같이 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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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런 뻘스러운 일상은 평소라면 일기에 쓰여질 일 없어요. 한데 오늘 쓴 이유는, 여기서 말하다가 나온 시계공 얘기가 마음에 들어서요. 전에 서퍼를 예로 들었을 때 우울증을 겪는 조울증 환자는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와도 같다고 했었죠. 


 한데 이 대화를 나누고 보니 파도보다는 시계공이 더 옳은 비유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날...밤 사이에 나를 뚝딱 고쳐놓고 가곤 하는 시계공 말이죠.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고 더이상은 안 올 지도 모르는 시계공을 기다리며 살면 안되는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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