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는 왜!?

2019.01.13 07:15

어디로갈까 조회 수:670

진행하고 있는 마케팅 이미지에 참고하라며, 상사가 오래 전 영화 < Prenom Carmen> 파일을 보내줘서 새벽참에 봤습니다.
매혹적인 여성에 대한 집착이라는 기본 설정 외에는 메리메의 <카르멘>과는 별 상관없는 작품이더군요. 음악도 비제가 아닌 베토벤을 사용했고요. 현악 4중주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의 힘차고도 우아한 연주와 고다르의 도저한 형식주의가 경지에 이르렀구나 싶긴 했습니다.

십대부터 줄곧 이런저런 루트로 고다르의 작품을 접하면서 '그는 얼마나 남다른가!' 감탄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의 저에겐 이 작품이 좀 난감하게 다가왔어요. 고다르 자신이 직접 연기한 괴팍한 영화감독 '장 아저씨'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했고요.
오늘 제가 느낀 난처함은 고다르의 심각한 자의식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현실의 감각적, 일상적 구체성에 대해 '정신병원으로 피신이라도 하고 싶은'이라고 자기를 설명하는 지식인의 과장된 자의식이 거북하더군요. 또한 '이봐~  이 영화는 이렇게 서술되는 이야기라고~' 라는 투의 제스처는 오늘날의 유행감각이 조소를 보낼 만한 것으로 여겨졌어요. 완성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낡아보였습니다.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텍스트의 전면에 노출하는 건, 이제 그 예술적 의미가 퇴색해버렸죠. 그러나 그 낡음은 외면되었을 뿐, 추월된 적이 없는 낡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식에 대한 자의식은  일종의 '포즈'일 텐데, 포즈는 'pause'와 상관 있죠. 
오늘날의 독자/관객/대중이 포즈를 경원하는 건, '멈춤'이 내러티브에 방해되기 때문인 듯해요. 그러나 포즈 없는 이야기를 원하고 편안해 하면서도, 일면으론 경시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합니다.  기호학적이란 말 앞에는 중도적(과학주의적)이거나 좌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는데, 이 영화는 그 둘 다를 보여주더군요. 아니 전자를 거쳐, 그것을 넘어서서, 후자를 지향하는 듯 보였어요. 

이를테면, 은행강도가 들어 사람이 죽는데, 그 와중에 미녀갱 카르멘과 경찰이 사랑에 빠져 바닥에 뒹굴고, 한 고객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신문만 보죠. 이런 불합리하고 낯선 장면들은 마치 이런 제안을 하는 듯합니다. 
'관객이 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의 1) 기호학적 2) 혁명적(?) 3) 예술적 자의식에 따른 <문제 제기>이다. 그 외의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샛길: 기호학적 의식이란 사물에 결부된 이데올로기를 감식하는 능력이죠.  따라서 그건 광고처럼 도구적인 효용성일 수도 있고, 
현실을 낯설게 발견하게 하는 어떤 이미지처럼 혁명적일 수도 있겠죠.  전자는 광고 & 소비의 쌍을 이루지만 후자는 인식, 그리고 소외의 쌍을 이룬달까요.)

아무튼 오래 전 많은 영화광들이 굉장히 매료됐다는 이 영화를,  오늘 저는 '처분한다'는 태도로 봤습니다. 이해와 감탄을 기대하며 몰두했던 시간이 그다지 즐겁지 않았어요. 
이 영화가 제게  난처한 것도 유행의 한 감각인 걸까요?  그렇다면 유행 - Mode. 이념적 지향이 들어 있다면 Tendency - 이란  무엇일까요?  '유행'은 사람들이 바라보길 원하거나 이미 향해 가는 어떤 방향과 관련이 있는 듯 보여요. 혹은 아직 물질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해 이미지를 통해 타협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막 써도 될지 모르지만, '유행은 타협이다' 라고 써봅니다. 이미지를 매개로 욕구를 절반쯤 실현하고 절반쯤 부정하는 법. 즉 처리하는 법.

글쓰는 동안 다시 한번 정신병원의 고다르를 떠올렸습니다. 초월자가 되는 것도 좋죠. 그건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비겁하지만 경제적으로 대처하는 길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분배의 정의'란 것이 있기 때문에 (과연 있나?) 그런 초월자에겐 회색 침대시트 정도만이 보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닐지도 모르죠. 역시 미녀갱 카르멘과 한 번 은행을 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시대적 진단에 따라 고다르처럼 영화를 찍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낫다면, 뭐가 나을까요?  뭐 적어도 이런 주절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있을 테지요.

덧: 1.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었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고 고다르의 영화사적 위치를 적시한 건 미셀 푸코였다죠.
그러나 고다르는 푸코를 일관되게 싫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참여 의식을 제외하면 사르트르와도 맞았을 것 같지 않은데... - -

2. 프랑수아 트뤼포 사후에 발간된  <서한집> 서문에 쓰여진 고다르의 글이 기억나서 찾아봤어요.
- 우리를 입맞춤처럼 묶어주었던 건 다름 아닌 스크린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우리가 오른 벽이었다. 
벽 외에는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벽을 오르기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고, 벽은 마침내 다가온 명성과 장식과 선언들에 깔려 무너져 버렸다. 우린 '새턴'에게 잡아먹혔다.
프랑수아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난 아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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