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예쁜 시인

2019.01.19 08:30

어디로갈까 조회 수:1605

지구를 탈탈 털면 제겐 단 한 사람의 조카가 있습니다. 여섯살바기에요.
신세대 답게 그 나이에 여러 종류의 SNS 계정을 가지고 있는데, 좀전에 텍스트 계정에 들어갔더니 글이 세 편이나 올라와 있더군요.
그 중 심쿵했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 -

# 어느날 보라색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물밖에 없단다.
"물이면 갠차나요." 
자~ 물 받아라.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오늘 보라색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핀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피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예쁜 시(?)라니! 특히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핀 것은 아니었다'는 구절의 놀라운 인식에 깜놀했습니다.
갠차나요, 라고 쓴 것 외에는 맞춤법도 모두 바르고요. 
감격한 '어디로갈까'이모, 그 글에다 이런 답글을 달았습니다. 

# 며칠 전, 강한 바람이 불어 빨래가 떨어지면서 아레카(고무나무)의 줄기 하나를 꺾어놓았어요. 
아레카의 부상이 걱정돼서 깊은 밤 베란다에 나가봤죠.
캄캄한 구석에 놓인 화분 쪽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앉았으려니,
아레카가 끙끙 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 아레카, 어떻게 돼가고 있니?
"잘 안돼."
- 왜 안돼?
"어디를 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 모르는구나... 어떡하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해볼게."

뻗어 올라가던 줄기는 자신이 한 번 끊어졌는데도 다시 잇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텐데라는 걱정이 들었지요.
줄기 하나가 끊어졌다고 생명이 멈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아레카에게 알려줄까 하다가 말았어요.
원래의 줄기와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레카는 더 이상 자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만남에 대한 기대를 품고서, 
아레카는 지금 어둔 베란다에서 끙끙거리며 하늘로 팔을 뻗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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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덧: 시인의 프로필. -_-

거주지: 런던
출생배경: 결혼 일년 차이자 유학 육개월 차였던 언니의 몸에 눈치없이 안착하므로써, 그녀를 절망감에 떨며 6박7일 간 울게 했음.
이후. 자신의 성급함을 자숙하며 없는 존재인 듯 순하게 자라줌. 출산과정에도 적극 협력하여 진통 3 시간 만에 안전하게 세상에 도착함.

성장배경: '내 아이에게 소젖을 먹일 수 없다'는 제 엄마의 수유관에 따라 백일 후부터 캐리어에 실려 엄마 아빠와 함께 등교해 대학원 생활을 함. 빈 강의실에서 부모 친구들의 동냥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음. 
부모의 긴박한 스케쥴에 따라 간혹 남의 집 더부살이를 했고, 하고 있음. (밀라노, 파리, 더블린, 서울 등을 떠돈 유랑의 시간들이 족히 일 년은 넘음.) 
낯가림이나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으며, 진정한 21세기형 유목민으로서의 마인드 -자유롭고, 타인을 환대하고, 언제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늘 접속되어 있으며, 박애를 지닌 마인드 -를 가지고 있음.

특기: 독서. (등을 반듯하게 펴고 최소 2 시간은 책에 집중할 줄 아는 애독가.)
그림 그리기.(인디카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한 경험이 있으며 미래주의 화풍을 자랑함.)
축구. (메시와 손흥민의 광팬. 유아 축구팀에서 메시의 백넘버를 사용하고 있으며, 손흥민에게서 받은 사인이 재산목록 1호.) 

취미: 화분에 물주기, 늦잠 자는 부모 머리맡에서 동화책 읽어주기, 설거지하기, 롤러 블레이드 타기, 친구들과 토론하기.
(최근 가장 격렬했던 토론 주제는 '산타클로스는 정말 존재하는가?'였는데, 결론은 '믿고 싶다'로 났다고 함.)

언어습관: 정통 런더너 영어를 구사하며, 제 부모만이 대화 상대인 탓에 나이와 어울리지는 않는 모국어를 구사함.
(지식인들이 쓰는 개념어를 일상어에서 툭툭 구사함. ㅋ)

근황: SNS에 포스트모던한 축구소설(영어)를 연재 중이며, 틈틈이 공개일기(한글)와 시, 동화(한글)를 쓰고 있음. 
왕성한 집필활동 와중에 여자 친구 Rosie를 두고 사각 관계에 빠짐. 연적들에게 동지애를 느끼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음.

현재 최대고민: 친구 셋과 록밴드를 결성했는데 (본인은 베이스 기타와 보컬 담당), 드럼파트를 확보하지 못해 애타는 중임.
혹시 이모가 드럼 비용을 후원해준다면 멤버는 확보할 수 있다는 연기를 슬쩍슬쩍 피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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