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아이언스가 왜?

2019.02.13 16:45

어디로갈까 조회 수:1306

점심식사 후 있었던 동료들과의 블라블라 타임에서 '어디로갈까'에게 어울리는 파트너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선정되었습니다. -_-
제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고 요즘 핫한 배우도 아닌데 여덟 명 중 여섯 명이나 그에게 표를 던져서 놀랐어요. 더 충격이었던 건 '파멸에 이르는 운명적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 될 거라는 선정 이유였습니다. 

제레미 아이언스. 스크린에서 그를 대하면 저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평온한 질서 속에 사장된 인간의 자기파괴 충동을 내적 체험하게 된달까요.
더할나위 없이 세련된 매너의 영국 신사. 그는 늘 성공한 남자로 단정한 차림을 하고 등장하죠.  우아한 발성, 잘 단련된 몸매, 포커 페이스화된 지적인 표정. 하지만 완벽해서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외관 아래에는 언제든 자신의 삶을 전복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위험한 충동이 엿보입니다.
그의 인상과 그가 맡는 역할은 정확하게 일치해요.  영화 속의 그의 캐릭터는 성공을 구가하며 삶의 안락을 즐길만 할 때, 난데없는 격정에 휘말여 몰락해버리는 역할이 대부분입니다.

<데미지>에서 그는 아들의 여자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 결국 가족의 파멸을 불러오죠. ('상처입은 사람은 위험하다'는 말은 안나에게 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잘 어울려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는 다의적 인물인 기혼녀(메릴 스트립)와의 밀회와 결별로 황량한 시간을 가로지르며 깊이 상처입었죠. < M 버터플라이>에선 더 무너져서, 중국의 신비에 매료되어 여장 남자에게 빠져들었고요.  <데드 링거>에선 쌍둥이 형제, 즉 또 다른 자신과의 사랑에 미쳐서 결국 몽환적인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로리타>에서의 나레이션은 그의 내밀한 욕망을 기록한 일기장의 고백으로 들려오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죠.

그의 어떤 점이 내적 파열을 일으키는 인물에 그를 캐스팅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무표정하고 엄격한 마스크, 영국식의 절제된 발성.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표정이나 목소리보다 주목해야할 미묘한 파장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다가와도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거느리는 서늘한 긴장감이 그것이에요. 그의 마스크와 목소리, 마른 몸매와 몸짓은 살짝 흔들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틀처럼 느껴져요.

그러나 다른 배우와 변별되는 그의 카리스마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금기를 범하고 몰락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우리에게 그대로 느끼게 해줍니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건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죠. 삶 전체를 뒤흔드는 영향력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금기라는 위험한 충동에 자신을 선선히 내맡기는 것. 

인간은 그렇게 충동에 굴복할 때에야 비로소 진실의 실체를 고뇌와 더불어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바타이유가 설명한 바 있죠.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이 세계의 질서로 무사 편입하려 들기 때문에 바타이유의 설명대로 행동하며 살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하는 영화가 주는 매력의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레미 아이언스. 절정의 한 순간과 영원한 고통을 맞바꾸며 삶을 번지점프하는 캐릭터. 사랑과 성적 열병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내적 체험으로 충만한 수도자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남자. 관계를 파괴하고 비난에 몰려 은둔자로 고립되는데도, 그것이 영광의 조건으로 여겨지게 하는 이미지.  불행의 표상이면서 당대의 행복추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배우라는 건 얼마나 짜릿한 유쾌함일까요. 

덧: 유튜브에서 찾아본 그의 최근 근황이  'BAFTA Award for Best Film'에서의 이 모습이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8AMUYaCUS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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