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카페를 나오며

2019.03.18 06:14

어디로갈까 조회 수:1281

1. "뭐가 그렇게 싫어요?"라고 묻고 싶었습니다. 카운터 뒤의 소녀에게.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 싫다'는 감정의 샘플 같은 표정을 하고 제 카드를 낚아챘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드를 카운터 테이블에 놓지 않고 반드시 상대의 손에 건네요.)
이 세상의 구성원인 한, 그렇게 '아,  싫어~'라는 태도가 정당할 만큼의 순수한 존재양식은 가능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부당하게도, 순간 저는 그 소녀의 표정을 향해 '그러는 건 잘못이에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 어떤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모르는 십대 소녀를 향해 그런 입바른 지적을 할 뻔했어요. 맥락 없는 충동적 감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그런 표정이 상상되는 십대들의 글을 너무 많이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나/우리는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에, 당신/어른들은 우리의 혐오를 감수해야 한다'는 실제의 표정을 통해, 수많은 유사표정을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 물어보고 싶었어요. "대체 뭐가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요?"

2. <순수>를 정의하는 따위의 고색창연한 시도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몇 자 적어봅니다.
저는 <순수>야말로 노년을 위한 가치여야 하지 아닐까, 생각해요. 어떤 가치든, 가치란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서 그것이 발견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노년에게, 절대빈곤은 나쁘지만 많은 재산까지는 없어도 괜찮겠죠. 그들 노년에게, 심각한 질환은 안 좋지만 대단한 정력까지는 없어도 괜찮겠죠. 하지만 그들 노년에게, 남길 것만으로 남은 마지막 모습이 순수라는 어휘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잎과 열매들이 다 떨어지고 난 후에도 나무에 줄기는 있듯(있어야 하듯), 그들 노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치가 <순수>이기를 희망합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해보는 건, 노인에 대한 실망은 인간 혹은 인생 전반에 대한 실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손은 젊음의 한 특성인 것 같아요. 그건 자신의 고유성을 방어하려는 위악 혹은 나쁜 버릇 같은 것이에요. 안타까웠을 뿐, 저는 카페의 그 소녀에게서 <실망>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덧: 한 십년만에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들을 찾아봤어요.
https://www.google.co.kr/search?q=%E5%A5%88%E8%89%AF+%E7%BE%8E%E6%99%BA&rlz=1C1NDCM_enKR748KR748&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iThMnpiYrhAhWD7GEKHdNECooQ_AUIDigB&biw=1280&bih=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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