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일들 8

2019.07.05 06:25

어디로갈까 조회 수:959

어제 저녁은 동료 레아나, dpf와 함께 먹었습니다. 레아나의 생일 턱이었어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레아나가 제게 "너는 눈 앞에 있을 때만 현실의 사람인 것 같아. 퇴근 후 집에서 널 생각하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라고 말하더군요. dpf가 빙긋 웃으며 거들었어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지." 
대학시절, 친구들도 비슷한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저란 존재는 '이야기'로 읽히는 게 아니라 '장면'으로만 비친다는 의미일까요?  제가 삶을 직시하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그들에게 비치는 걸까요?  

사실 삶을 직시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건 방대한 노고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작은 저의 삶조차도 어떤 방대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작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 저는 꽤 진지하고 성실한 노력을 해왔노라 자신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수치스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게 아니라 미소가 떠오르니 그것도 참 모를 일입니다.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동시에 바로 그만큼, 오직 그만큼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두 마음의 크기가 동일해요. 삶에서 조금은 비켜나고 어긋나 있어야 한다는 이 확연한 감각이 바로 사소한 제 인생의 방대함이고 집요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가 이 자세의 관건이에요. 다시 말해, 마음이 흥건해지거나 난폭해지지 않고 '어긋나기'.
고요하고 밀도 높은 긴장으로 흔들림 없이, 아니 흔들리되 모든 순간 흔드는 것들에 저항하면서 그렇게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소망.

제 일상의 윤곽은 명확하고, 몸도 병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막막하고 힘겹다는 느낌이 자주 들어요. 이것은 외면과 내면의 완벽한 분리를 의미하죠. 지금처럼 이중생활이 완벽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딸, 동생/누나, 친구, 동료, 노동자로서의 역할 속에 제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문제는 그 역할 속에만 제가 있다는 것이겠죠. 일상 속에 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속에서만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저의 불안입니다. 
자아의 분열이나 생활과 괴리된 무엇이 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과 사회적 페르소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삶 속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 아침에 머릿속에다 써봅니다. 오랫동안 제겐 '이런 삶'과 '저런 삶'이 공존했어요. 그러나 지금의 제겐 하나의 삶 뿐입니다. 그 하나의 삶 속에서조차 미흡하기 그지없는 제가 다른 삶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生은 다른 곳에'라는 말에 민망하도록 끌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요. 다른 삶의 이미지를 잃고 난 후에는 이 삶에 대해 여유있는 자세를 취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_-

2. '한 사람의 성품을 알려면 그의 말이나 침묵,  슬픔이나 생각 이전에 웃는 모습을 보라!'고 도스토옙스키가 말했죠.
레아나의 웃음은 무엇보다도 신뢰를 나타내는 그런 웃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생일 식탁에서 "성년이 된 이후로 나는 신뢰나 기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녀의 자의식이 어떠하든, 제 눈에 레아나는 '이쪽'과 전혀 다른 '저쪽'의 현실을 살면서도 '이쪽'의 현실과 박자를 맞추는 법을 잘 익힌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업무 외의 대면에서는 토라진 아이 같은 포즈를 잘 취해요. 또한 상황을 다 파악하고서도 짐짓 모르는 척 말간 표정을 짓기를 즐기죠. 그 연기가 몹시 서툴다는 걸 자신도 잘 알기에, 언제든 그녀는 신뢰가 가득 담긴 커다란 눈을 뜨고 웃을 채비를 하곤 합니다.  봄날의 정원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그런 웃음이에요. 얼마나 예쁜지 형용할 수 없답니다.

레아나도 자신의 작은 삶 속에서 '너머'를 바라보고 '저 너머의 빛'에 의해서 살아가기를, 저처럼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tante auguri a t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79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5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00
126020 [왓챠바낭] 괴이한 북유럽 갬성 다크 코미디, '맨 앤 치킨' 잡담입니다 new 로이배티 2024.04.18 54
126019 오늘 엘꼴도 심상치 않네요 [7] new daviddain 2024.04.18 64
126018 프레임드 #769 [2] new Lunagazer 2024.04.18 30
126017 [근조] 작가,언론인,사회활동가 홍세화 씨 [10] update 영화처럼 2024.04.18 332
126016 80년대 국민학생이 봤던 책 삽화 [6] update 김전일 2024.04.18 197
126015 나도 놀란이라는 조너선 놀란 파일럿 연출 아마존 시리즈 - 폴아웃 예고편 [1] 상수 2024.04.18 137
126014 체인소맨 작가의 룩백 극장 애니메이션 예고편 [1] update 상수 2024.04.18 94
126013 [웨이브바낭] 소더버그 아저씨의 끝 없는 솜씨 자랑, '노 서든 무브' 잡담입니다 [3] update 로이배티 2024.04.18 195
126012 이제야 엘꼴스럽네요 [3] daviddain 2024.04.17 173
126011 프레임드 #768 [4] update Lunagazer 2024.04.17 53
126010 킹콩과 고지라의 인연? 돌도끼 2024.04.17 127
126009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이 찍은 파리 바게트 광고 [1] update daviddain 2024.04.17 180
126008 농알못도 몇 명 이름 들어봤을 파리 올림픽 미국 농구 대표팀 daviddain 2024.04.17 126
126007 아카페라 커피 [1] catgotmy 2024.04.17 122
126006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3] 조성용 2024.04.17 339
126005 [핵바낭] 또 그냥 일상 잡담 [4] 로이배티 2024.04.17 256
126004 마리끌레르 영화제 예매 결과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상수 2024.04.16 135
126003 프레임드 #767 [4] Lunagazer 2024.04.16 45
126002 넷플릭스 찜한 리스트 catgotmy 2024.04.16 203
126001 조지아 고티카 커피 [5] catgotmy 2024.04.16 22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