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별다른 스포일러는 없겠죠.



1. 러시아 인형처럼


아래 맥거핀님의 추천 리스트를 보고 당장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하고 골라잡았습니다.

일단 타임 루프물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기본적인 재미는 하잖아요... 라고 적다 보니 아닐 수도 있겠죠. 그냥 제가 이 장르를 살짝 좋아합니다.



 -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못 되게, 이기적으로 지 맘대로 살던 36세 뉴요커 여성이 어쩌다 자기 생일에 죽어요. 하지만 살아나겠죠. 그리고 죽음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도 하고 나중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죠. 그리고... 뭐 뻔하잖아요. 중간부터 살짝 튀는 설정이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살짝 달라지긴 하지만 그 설정 마저도 이미 예전에 다른 루프물이나 시간여행물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으니 역시 참신할 건 아니구요.



 - 하지만 이런 흔한 이야기에 독특한 질감과 재미를 부여하는 건 바로 주인공입니다. 설정도 좋고 묘사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캐스팅이 압권이에요. '캐스팅이 다 했다'라고 말해도 큰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나타샤 리온의 캐릭터 소화력은 압도적입니다. 그냥 주인공이 만사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자기 살 길을 찾아 헤매며 여기저기에서 담배 꼬나물고 그 걸걸한 허스키 음색으로 진상 부리는 구경만 해도 시간이 훅훅 가요. 주인공이 뻔하지 않으니 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도 그렇게 뻔하지 않게 느껴지구요. 아니 이렇게 멋진 배우가!! 하고 검색을 해 보니 출연작 중에 제가 본 게 거의 없던데 참 신기하네요. 이렇게 괜찮은 배우가 아메리칸 파이 시절부터 꾸준히 작품을 해 왔는데 내가 이토록 완벽하게 모르고 살아왔다니. 역시 드라마를 더 많이 보며 인생 낭비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시리즈에 개성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건... 아주아주아주 노골적이라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로 PC하고 페미니즘적인 등장 인물들과 사연들입니다. 애초부터 주인공의 절친 둘 중 하나는 동양계에 다른 하나는 결혼까지 계획 중인 레즈비언이구요. 아랍(?)쪽 사람들도 비중이 아주 크게 나오고 초반 한정이지만 랍비와 유태인들도 나오죠. 주인공은 백인 배우이지만 엄청 진한 빨강머리이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남 기분 신경 안 쓰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언을 날리고 다니는 캐릭터인데 그렇게 입만 열면 상대방 속 긁는 소리만 하는 인간이 어떻게 PC함에 위배되는 대사들을 피해가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였습니다. ㅋㅋ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넷플릭스 시대 개막 이후로 이런 식의 PC한, 페미니즘 서사가 엄청나게 많아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서 전세계를 상대로 영업하는 매체라서 그런 걸까요. 암튼 뭐 좋은 일이겠죠.



 - 아 그리고... 한 시즌으로 끝나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보다가 막판에 가서야 '새 시즌 제작 확정!!!' 이라는 홍보 문구를 발견하고 기분이 참 거시기해졌습니다만. 처음부터 다음 시즌을 고려하고 만든 작품이 아니라 그런지 결말은 아주 깔끔하게 맺어집니다. 저처럼 시즌제 드라마의 엔딩 떡밥 놀이가 싫은 분들도 걱정 않고 보셔도 돼요.



 - 결론적으로 코믹한 분위기의 루프물 좋아하시는 분들은 큰 기대 없이 보실만 하구요. 좀 개성있게 매력 쩌는 여성 캐릭터가 혼자 다 해먹는 드라마를 원하셨다면 일단 한 회 정도는 시도해 보세요. 길이가 짧고 에피소드 수도 적어서 일단 꽂힌다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습니다. ㅋㅋ



 - 근데 생각해보면 좀 괴상하네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작부터 확실하게 진상 캐릭터이지만 또 시작부터 이미 매력적이에요. 현실에서 친구나 가족으로 엮인다면 끔찍하겠지만 티비 속 캐릭터로 지켜보기엔 매력이 쩔죠. 그래서 사실 이걸 보면서도 그냥 주인공이 살아남기를 바라지 크게 달라지길 바라게 되진 않습니다. 근데 그렇다면 이게 드라마의 주제가(...)



2. 바이올렛 에버가든


일본 애니메이션입니다. 전체 13화에 한 에피소드의 길이는 20분 남짓 정도. 

넷플릭스 목록 서핑을 하다가 몇 번 썸네일과 제목을 목격했지만 재생 시켜 볼 생각은 전혀 안 하다가... 갑자기 이걸 보게 된 건 이 시리즈의 제작사 때문입니다. 쿄토 애니메이션이요. 지금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쿄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에 조롱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 이 회사의 팬들이 안타까운 심정을 표하며 이 회사에 대해 이리저리 설명하는 글을 몇 개 읽었는데. 공통적으로 이 작품 언급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한 번 봤습니다.



 - 기본적인 줄거리 설명을 하고 시작하자니 사실 좀 한숨이 나옵니다. 왜인지는 아래 설명을 보면서 짐작해 보세요.

 지구 문화권으로 치면 세계 1차 대전에서 2차대전 사이의 유럽 쯤 되어 보이는 가상의 배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들을 보면 영어와 독일어(왜 아니겠습니까!!)를 대충 마구 섞어 쓰는 듯한 어떤 나라가 옆 나라와 큰 전쟁을 겪었고 그게 아직 완전히 마무리된 게 아니라서 시절도 하수상하고 사람들의 삶도 피폐하고 그렇겠죠. 그 와중에 우리의 주인공 '바이올렛 에버가든'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모를 본 기억도 없는 고아인데 아주 어려서부터 군에 끌려가 살인 병기로 훈련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인간의 상식이나 감정을 모르는 처자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이 마지막 임무에서 그동안 그나마 자기를 인간으로 대해줬던 '소령님'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헤매다가... 그 소령님의 친구에게 끌려가 편지 대필 업무를(당연히 '자동 수기 인형'같은 괴상한 명칭을 갖고 있습니다) 하게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슬픈 사연을 보고, 듣고 가끔은 함께 체험하면서 멀쩡한 인간으로 성장해나간다는 이야깁니다.



 -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21세기 일본 애니메이션 트렌드의 좀 껄쩍지근한 특성들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특징들이 다수 들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의 유럽(특히 독일)에 대한 동경이라든가. 하늘하늘해서 아령 하나도 못 들 것 같은 몸으로 붕붕 날아다니며 다 죽여버리는 살인병기 여주인공이라든가. 쓸 데 없이 폼 잡는 작품 내 용어들이라든가. 전쟁은 싫어!!! 라는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하면서도 정작 주인공의 전투씬들은 아주 화려하기 그지 없구요. 위에는 안 적었지만 당연히 안경 쓴 내성적 소녀도 나오고 가슴 크고 호탕한 성격의 붉은 머리 여성도 나오고요. 만사 귀찮은 표정을 하고 늘 머리를 벅벅 긁지만 알고 보면 속 깊고 자상한 남자 캐릭터도 나오죠. 40대 중반의 평범한 아저씨 멘탈로는 좀 감당하기 어려운 정서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쿡쿡 찌르고... 

 한 마디로 40대 평범 아재 입장에서 어디 가서 재밌게 봤다고 남에게 추천하기 어려운 이야깁니다. ㅋㅋㅋ 완성도와는 별개로 작품 특성이 말이죠. 다 보고 나서 찾아보니 원작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느낌? ㅋㅋ



 - 아 근데 제가 이걸 나름 재밌게 봤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분명히 적어두는데. 위에서 길게 주절거렸듯이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들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그라들고 민망한 장면들도 좋은 장면과 맞짱 뜰만큼 많구요. 기본 설정이나 세계관이 페미니즘이나 PC함을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보면서 쌍욕을 내뱉을만한 것들인데다 결과적으로 전달되는 '좋은 메시지'는 상당히 얄팍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특징을 싫어하거나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그냥 관심 끄는 게 나아요. 그런데...


 일단 작화가 쩔고 장면 연출이 좋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하죠. 왜냐면 이건 애니메이션이니까요.

 영화와는 다르게 애니메이션에 더 잘 어울리는 연출.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이 잘 하고 자주 하는 그런 연출들이 있는데 이 시리즈를 만든 사람들은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느낌이고 또 그걸 정말로 잘 해요. 실사였다면 코웃음이 나올 법한 장면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게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있으면 무척 그럴싸하고 심지어 가끔은 감동적이더란 말이죠. 진짜로 과장 없이 그저 그림 때문에 감동적인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ㅋㅋ


 그리고 이야기 형식이 괜찮아요.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의 한 에피소드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주인공이 편지 대필 의뢰를 받아서 의뢰인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사실상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그 의뢰인이 되는 식인데. 이렇게 한 회마다 에피소드 하나가 완결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그 중에 꽤 괜찮은 에피소드들이 좀 있구요. 또 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답게 그 중 대부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상실, 특히 부모와 자식 이야기로 진행이 되다 보니 애 키우는 아저씨 입장에서 주책맞게 막 감정 이입이 되어서... (쿨럭;)



 - 다만 메인 스토리인 주인공의 사연 부분들은 끝까지 그냥 그랬습니다. 살인 병기(...) 주인공의 활약 비중이 크기도 하고. 그 나라 식으로 미화된 '키잡' 설정도 거슬리거니와 그냥 시작부터 끝까지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 스토리라서요. 전반적으로 전체 보다는 부분이 훨씬 좋은 이야기였네요.



 -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본 라이트 노벨, 혹은 애니메이션들의 '덕후스러움'에 대한 저항력이 없는 분들은 역시 그냥 회피하는 게 좋습니다. 전개 빠르고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피하는 게 좋아요.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소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고 전개도 느긋느긋한 편이면서 유머도 거의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딱히 깊이 있게 파는 작품도 아니라서 그런 쪽으로 기대할 수도 없구요.

 하지만 정말로 그림이 예쁘고 아주 가끔은 '아름답습니다'. 능력과 열정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 모여서 최선을 다해 완성했다는 게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비록 나와 사상과 취향은 안 맞지만 그래도 참 괜찮은 친구가 진심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 괜찮은 시간이었습니다.



 - 이번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신 쿄토 애니메이션 관련자 분들의 명복을 빌고, 이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나서 작품 계속 남겨주길 바랍니다. 일제 불매 정국에 좀 어색한 얘깁니다만. 뭐 암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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