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거치는 깨달음

2019.10.12 08:46

어디로갈까 조회 수:1102

1. 클라이언트 -  우리사회의 영향력 상위 5%에 해당되는 사람들- 을 위한 리셉션이 있어서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례로 치르는 행사라 제법 감각을 익힌 일인데도,  매번 낯설고 힘들어요.  제 감정과 상관없이 기를 다해 계속 미소지으며 친절모드를 유지해야 하거든요. 고백하자면, 이런 행사를 치르는 동안은 제가 점차 폐인이나 정신병자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저는 지금 괴로움이나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삶의 어떤 ‘무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삶의 이런 저런 무늬들을 눈을 가늘게 뜨고서 바라보게 되는 시간/순간에 대해서.

괴로움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조용히 잘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상 그들은  무엇이 괴로운 줄 잘 알면서 말없이 견뎌내는 거라 생각해요. 저를 그 부류에 슥 포함시키는 건, '자아'라든가 '내면의 심층'이라는 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까지의 기억과 내면의 이력만으로도 제가 앞으로의 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2. 피날레 파티까지 끝내고 어젯밤 서울로 돌아왔는데 잠들기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일렁여서 매우 고생했습니다.  귀갓길에 일부러 단골매장에 들려 와인을 몇 병 사왔는데, 두 병을 비우고 나서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어요. 
샤워를 하고 바흐를 들어봐도, 서너 권의 시집을 뒤적이며 정신을 집중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만에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너무 많은 뉴스를 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너무 많이 웃어댔기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3. 결국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어둠 속에 앉아 불꺼진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며 밤을 샜습니다.  무릎을 꿇고 뭔가 반성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속을 헤집어봐도 막상 뉘우칠 건 없었어요. - -
 '유리컵이 자신을 뉘우칠 수 있을까? 그래서 담겨 있던 우유가 바닥의 깨진 조각들을 사방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질문만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습니다. '시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유리컵만큼은 지혜로워지겠지'라는 체념 혹은 긍정을 파트너로 곁들어서.

4. 리셉션에서 누구와 무슨 말을 나눌 때 가장 가슴이 뛰었고 또는 아팠는지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을 상대하며 심장의 반응이 옷 위로 드러나는 것 같아 자주 고개를 숙여 살펴야 했던 순간까지도 기억해요.  
그 증상은 잠시 잠잠해지다가도 미소지어야 하는 순간마다 다시 찾아오곤 했어요. 그래서 가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의 샹드리에 불빛을 세는 척하며 몸을 움직이곤 했습니다.  의연하지 못했고, 제가 할 수 없는 걸 하려고 노력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거짓은 한번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되풀이되더군요. 의식 저편에서 오는 신호를 무시했고, 결국 목덜미에 툭툭 떨어지는 부끄러움의 감촉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저는 아직 이런 방식으로 하나씩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파티가 끝날 무렵,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울림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살면서 될 수 있는 한 그런 말은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어코 또박또박 들으면서 살고 있군요. 흠

5. 뜬금없이 붙여봅니다., 제가 반복해 읽는 책들이 있습니다. 대개 철학/사상/물리학서들이고 소설 분야는  서양 쪽 몇몇 대가의 작품이에요.  근데 한국 소설 중 유일하게 다섯 번 이상 읽은 작품이 있어요.
왜인지 요즘 마음에 이는 여러 갈등/의문들이 이 책을 소환했기에  제주도에 가져가 재독했습니다. (옛책들은 활자가 작아서 읽기 너무 불편해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속에서 씹히는 중이라 옮겨봅니다.

" 나는 아득한 옛날 프랑스 파리 어느 거리에서 만난 절름발이 거지를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 한푼의 돈을 주고 다리를 어디서 다쳤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인부대에 갔었다고 했다. 외인부대엔 뭣 때문에 갔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답했다. ‘운명’이라고. 운명..... 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덧: 위의 문장만으로 이 책 제목을 아시는  분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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