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의 팬픽 같은 작품에 진지한 고찰을 하는 게 사치일지도 모릅니다만, 어쩔 수 없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신세계>는 골드문의 회장님, 이경영이 트럭이 치어 죽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회장님이 그냥 늙어죽었거나 자연적인 이유로 죽었다면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것이 아주 미심쩍은 내부자의 암살이라고 분명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트럭 운전사가 그렇게 운전을 막하겠습니까. 오히려 이게 그냥 자연사였고 골드문과 무관한 트럭 운전사의 실수였다면 코폴라가 박훈정 뺨을 때려도 될 겁니다. 면회 씬에서도 이중구와 정청은 서로 의심합니다. 너가 그런 거 아니냐? 난 너가 그런 줄 알았는데? 골드문의 가장 핵심 중역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 이경영은 분명히 타살당했습니다. 이 떡밥을 시퀄에서 풀 것 같았지만 후속편 제작은 엎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볼 확률이 아주아주 희박해졌죠.

저는 이게 영화내에서만 풀기에는 좀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1.경찰 2. 이중구 3. 정청 입니다. 이 때 첫번째 용의자 경찰은 가장 말이 안되는 용의자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해서 골드문의 후계자를 새로 뽑고 경찰이 원하는 대로 조직할 수 있는 이득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하면 영화 전체의 설정이 말이 안됩니다. 암살자를 고용해서 조직 보스를 죽여버릴 수 있는 집단이 뭐하러 언더커버 조직원을 심어놓고 그렇게 고생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경찰의 윤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문제입니다. 조직 보스를 차로 치어죽여버릴 수 있으면 그냥 차례차례 죽여버리면 됩니다. 이자성을 심어놓고 증거를 빼오는 그 귀찮고 난이도 높은 짓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애초에 어린 경찰을 조직에 심어놓고 아주 긴 시간동안 그를 이용해 조직을 관찰하는 게 너무 이상한 짓이지만...)

두번째 용의자는 이중구입니다. 이것도 명쾌하게 추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에게는 골드문의 차기회장이라는 동기가 있습니다만 그는 오리지널 골드문이라는 계승자로서의 정통성과 회장을 향한 최소한의 충성심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투표 전에 간부들을 모아서 "살려는 드릴게"라는 무지막지한 폭정형 지배자이지만 그걸 아랫사람이 아닌 윗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지는 조금 미지수죠. 무엇보다도 쿠데타를 하기에 이중구의 입지는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정청과 다퉈야하는데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만 벌이는 건 좀 합리적이지 않죠. 그가 최민식과 식당에서 대면하는 장면을 보면 변호사부터 해서 주도면밀하게 사법적 공격에 대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죽고 나죽자는 정청 습격은 마지막 발악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용의자 정청입니다. 정청 역시 이중구가 가진 리스크를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인물은 자꾸 조직 내에서 배신자가 나오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구요. 그는 아주 신중한 인물이라서 그렇게 회장을 막가파 식으로 죽여버릴 것 같진 않습니다. 그는 아주 잔인하고 가까운 인물도 자기 보신을 위해서는 주변인도 기꺼이 죽여버리는 인물이지만 회장에게 과연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을까요?

가장 걸리는 것은 정청과 이중구의 면회 장면입니다. 이중구는 정청을 의심하고 정청은 이중구를 의심합니다. 이 때 정청이 그랬다면, 정청은 자기가 저지른 짓을 이중구에게 뒤집어씌우는 연극적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니 아니였냐?" 라는 이 의혹은 당사자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뻔뻔하고 불필요합니다. 이 때 이중구는 이미 후계자 자리가 날아간 상태이고 정청이 굳이 자신의 암살을 "뒤집어씌우면서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대화는 이 둘이 정말 영문을 모르고 서로 의심하고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워지는 대화입니다. 만약 이 자기기만적인 대화 (너가 한 거 다 알고 있어 - 내가 한 건 알고 있겠지만 잡아떼겠어) 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추가적인 설정이 붙어야만 합니다. "골드문의 회장 이경영은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고 이중구와 정청은 회장을 암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저는 왜 경찰이 회장을 보호하면서 암살범을 살인교사 및 다른 혐의로 체포해서 조직을 통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뭘 막 새로 껀수를 찾는 것보다 그 편이 가장 확실하고 규모를 절반쯤으로 줄여버릴 기회 아닐까요. 만약 영화 내용처럼 경찰이 조직을 통제하려면 이런 갑작스런 암살이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경찰은 골드문 후계자 경쟁을 두고 갑자기 회의에 돌입합니다. 경찰도 이런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굴지의 조폭 회장을 누가 암살할 수 있을까요? 이것부터 좀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조직을 누가 어쩌질 못하지까 경찰도 언더커버를 침투시켜가면서 고생을 하는 걸텐데요. 개연성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너무 이 영화의 브로맨스를 이해하는 데 거슬립니다. 이렇게나 리얼리티의 폭력과 로맨스를 그리는 영화라면 이런 의문은 안들게 했으면 좋을 텐데요... 애초에 그냥 이경영이 얌전하게 죽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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