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바낭

2020.08.02 21:54

크림롤 조회 수:611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어딘가를 갔다 왔는데, 너무 지루했어요. 그리고 혼자 차를 타고 빗길을 헤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는 그냥 재밌게 놀자!"


바낭1. 에반게리온

초등학교, 중학교를 부천에서 다녔어요. 초딩 때 친구 집에서 에반게리온 극장판 중 하나인 사도신생(TV판 총집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극장판을 봤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바로 매료되었습니다. 뭔가 빨아들이는 뭔가가 있었던 거에요. 충격 그 자체였고, 카오루의 독특한 캐릭터와 비쥬얼에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 레진이 레진코믹스의 사장이 되기 전의 이글루스 포스팅 중에 인상깊은 번역 포스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일본사람들을 대상으로한 '가장 후회될만한 일'이었죠(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그 중에 1위였던 것 같아요. 


"10대에 에바를 보지 않은 것" 


네, 에반게리온에는 사춘기 정서와 강하게 공명하는 그 무언가가 정말 있는 것 같아요. 친구네 집에서 나온 뒤로 저는 어떤 컴퓨터 가게에서 한 장에 500원씩 판매되는 인화지에 인쇄되어있는 에바사진을 구매하는 버릇이 생겼고, 작은 사진앨범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형도 거들었어요. 왜 거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형은 사도신생도 본적이 없었거든요. 형은 아야나미 레이를 좋아했고, 저는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와 나기사 카오루를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바낭2. 19금 만화들

사실 부천은 덕질하기에 정말 적합한 곳이었어요. '만화정보센터'가 있었거든요. 벽화로 김수정 둘리, 영심이, 강건마, 까치, 현상태(이름센슼ㅋㅋ), 최충치 등등 대한민국의 유명한 거의 모든 대표 캐릭터들이 그려져있었죠. 그리고 (제일 핵심인) 무료로 이용가능한 '만화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공부하러 '만정'(부천 아이들은 다들 이렇게 줄여 불렀어요.) 간다고 해놓고, 책가방은 열람실에 풀어놓고, 만화도서관 가서 만화보면 아주 꿀맛이었죠. 이름을 대보세요. 없는 만화가 없었어요. 거기서 저는 주로 베르세르크를 보았습니다. 대여점에선 18세 미만 이용불가라서 대여하기 힘들었거든요. 사장님이 이화여대를 나와서 그런 이름을 붙이셨다고 추정되는ㅡ그 분은 정말 행복한 도서대여점 주인이셨던 게 한 순간도 일본 순정만화들을 그 손에서 놓치 않았고, 항상 만화를 보며 웃고계셨어요ㅡ '이화글방'의 정책이 어느새 바뀐거였죠. 그러니까 베르세르크든, 베가본드든, 무한의 주인이든 아니면 클램프의 19금 작품(있었던 것 같아요. 은색표지였는데... 뭐죠? 아시는 분?)이든 400원엔가 700원엔가에 다 빌려볼 수가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19세 미만 이용불가라는 빨간 딱지가 붙은 작품들을 대여해줄 수 없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구요. 회원번호도 기억이 나요. 형이랑 저와 누나가 사용하던 번호가 215번인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215번째로 등록한 회원이었죠. 1000권 넘게 빌렸었는데... 아무튼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대여점의 정책이 바뀐 뒤로는 더욱더 '만정'을 이용하게 되었어요. 거기선 다 볼 수 있었으니까. 헤헤. 


바낭3. 이화글방, 만정에서 영화보기, 듀나

고등학교는 기숙사였기 때문에 만정과는 멀어졌어요. 그래도 방학때 집에 오면 언제든 만정에 갈 수 있으니까, 행복했죠. 그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설레이는 순간들을 꼽으라면, 

(1) 이화글방에서 베가본드하나, 베르세르크 하나, 헌터X헌터하나, 클램프의 X나 쵸비츠 하나, 혹은 몰아보는 유유백서(는 이화글방에 없었던 것도 같지만), 바람의 검심, 무한의 주인, 플리즈프리즈미, 상남2인조, 반항하지마, 겟백커스, 아마 거의 10 년전에 듀게 듀나인을 통해서 제목을 찾아내고(듀게의 영험함 ㄷㄷ), 그 분께 중고로 구매까지 하게 된걸로 기억하는 '울트라패닉' (나중에 다시보니 '아 이게바로 소프트 BL'이구나 싶었어욬ㅋㅋ) 그리고 그남자그여자의 사정, 그리고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백귀야행 등등의 만화책을 빌려서 집까지 뛰어오는 순간들이었어요. 정말 그 때 신나서 집까지 달려가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불행할까?' 그런 생각도 했었고요. 그리고 또 설레였던 순간들은

 

(2) 고등학교 방학 때 만화정보센터 멀티미디어 실에서 DVD로 영화를 보는 순간들이요. 정말 천국같았죠. 개개인 별로 편안한 쇼파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그 앞에 놓인 약 40인치 TV로 많은 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었어요. 거기서 봤던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행크스 주연의 <캐치미이프유캔>이에요. 주인공에게 공감을 많이 했어요. 특히 크리스마스에 프랭크 에버그네일 윌리엄 주니어(디카프리오 분)가 외로운 나머지 자신을 쫓던 FBI 수사관 칼 핸래티(톰 행크스 분)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스포 있음) 저는 그 장면에서 프랭크가 칼 핸래티에게 무의식적으로 빌미를 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의식 중에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라고 판단해서 의식 수준에서는 못할 행동을 프랭크가 한 것(호텔전화기였나 아무튼 추적 가능한 전화기로 무심코 전화 한 것)이고, 보통은 의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의 무의식이 그 자신을 짧은 수감생활을 끝낸 뒤의, 본인의 사기 경험을 바탕으로한 기업의 보안 컨설턴트로서의 삶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1958)>과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감명깊게 봤어요. 특히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남자 주인공인 조지 페퍼드의 남색 수트, 심플하게 접힌 하얀 핸커칲, 검은색 슬림 넥타이에 완전히 반해서 대학교 졸업할 때 맞춘 첫 정장을 최대한 그것과 유사하게 했던 기억이 나요.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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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는데요(ㅋㅋ). 제가 서두에 에반게리온을 소환하며 사춘기적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핵심이 뭘까요? 자의식self-consciousness 아닐까요?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자의식이 풍부하고, 꿈 많고, 뭐든 마음만 먹으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느낌이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전 닉네임이 듀게 닉 치고는 약간 키치한 센스의 '그리워영'이었던 것 같고, 아이디 자체도 reminisce 회상하다를 멋대로 변형한 reminis인 것 같고... 아무튼 그 때의 포텐셜은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자의식과 자신감에 대한 그리움이 이런 글을 작성하게 만드는 동력인 것 같네요. 이상. 셀프 자기분석이었습니다ㅋㅋ


 쩌면 최근에 보려다가 중도하차한 애니메이션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거기서 '사춘기증후군'이라는 수상쩍은 단어가 등장하거든요. 어젠, 오랜만에 향수에 젖어서 그래 팝콘 먹으면서 넷플릭스로 재패니메이션이나 봐볼까? 해서 검색을 하던 중 <청춘 돼지는 바니걸 선배의 꿈을 꾸지 않는다>라는 애니가 제목과는 달리 의외로 괜찮고 작품성이 있다고 하길래 (그 동영상에선 이 작품이 3위, 2위 바이올렛 에버가든, 1위 강철의 연금술사 였던 것 같아요.) 봤어요. 근데... 도저히 못 봐주겠는 거에요. 원작 라노벨 작가가 미소지니가 없으면 개그를 못하는 작가인 거에요. 아니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장착한 현대 서울... 아니 현대 한국인의 의식 수준에 한참 못미치는 작가의 의식인 것 같은데... 도저히 못봐주겠어요. 일본의 현실 평균이 반영된 농담들을 그대로 쓰는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깝깝합니다. 이를 테면 주인공이 화를 내는 여성에게 (무려 시크하게) '생리냐' 라고 나직이 읊으면 화를 내던 여성 캐릭터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뭐 그런 패턴. 오빠와 오빠의 동행인 여성이 한 방에 있는 것을 모르고 방문을 연 여동생의 대사가 '직업출장여성을 불렀으면 문을 잠가놓으셔야죠! 오라버니!!' 라던가... 뭔가 어디서부터 손봐야할지(아마 사회구조 레벨이겠죠) 답도 안나오는 대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짐에도 불구하고 비위가 강한 저는 아마도 이야기의 한 단락인 것 같은 3화까지 보았어요. 이성애 로맨스적 측면에서도 너무 올드해요 '사춘기증후군'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엮어 넣은 건 괜찮긴 한데 그걸 극복하는 과정(스포시작) (스포시작) 에서 주인공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고백을 합니다. 그랬더니 모두에게서 잊혀져가던 한 살 연상의 선배에 대한 모두들의 기억이 되돌아오더라... 뭐 그런 게 3화까지의 내용이었어요. 하... 아무튼 이 애니의 문제는 전혀 멋있지도 않고, 전혀 웃기지도 않은 것을 '이건 멋있으라고 넣어봤어, 멋있지않아?', '이건 웃기라고 넣어봤어, 웃기지않아?' 하는 듯한 작가의 후진 감성인 것 같아요. 왜 일본에서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자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대신 일본애니메이션의 이런 후진 부분들 때문에, 지뢰가 너무 많아서 일애니를 포기하신 분들에게 한 작품 추천해드리면, '나만이 없는 거리' 애니메이션 판입니다. 보다 울었어요ㅜㅠ 엉엉엉...


(3)듀나

삼천포로 빠졌지만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면 무려 제가 듀게를 알게 된 계기를 밝히게됩니다. 일산에서 온 동기들이 많았던 저희 학교에서 제가 느낀 것은 신도시 아이들의 문화적 풍요로움이였습니다. 뭐 사소한 거였어요, 본인의 취향대로 애들이 영미권 음반들을 사서 듣는다거나 하는 그런 작은 것들에서 느껴지는 차이였죠. 아마 그런 느낌은 외고를 갔으면 더 크게 느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아무튼 학교에 몇년 전 선배가 자살한 장소라는 소문이 있는 나선형 계단이 있었는데 그 나선형 계단 근처에 어학실이 잇었어요. 네, 어학실습을 위한 용도대로 사용되기 보다는, 애들이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3 에디트 맵인 카오스(이게 롤 같은 거라면서요? 찾아보고 깜놀)를 즐기던 곳이었죠. 아무튼 어느 날은 약간 동경? 같은 걸 하고있던 선배가 쓰고 급하게 나간 자리에서 하얀색의 게시판이 보였어요 '듀나의 영화낙서판'이라고 쓰여있었죠. 그게 듀게와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어른되면(?!) 듀게 꼭 회원가입해야지 라고 맘을 먹고 수년간은 회원가입을 하지 않은 채 메인게시판을 들락거리는 버릇이 생겼죠. 그리고 홈페이지에 숨겨져?있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듀나님의 각별한 애정이 담긴 글이 좋았고, 역시나 숨겨져있는 듯한 (최근에 출판된) 클리셰사전이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안나 파퀸에 대한 영어로 써진 팬페이지... 그리고 어디선가 본 이영수라는 이름... 그리고 듀나님이 궁금해어요. ‘뭐하는 사람일까?’, ‘3인이래... ㄷㄷ’, 클램프 같은 건가?’, ‘멋있다.‘, ‘SF작가야? 영화평론도하면서?’, ‘개멋있어’, '정체불명이래...’ 듀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었어요. So I decided to go to 만정 to read 'their' SF novels. <대리전>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무대는 무려 저희 동네였죠. 뭔가가 정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강한 연결감 같은 게 들었달까요. 그리고 굉장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씨네리에서 다른 사람이 만든 이야기들에 대한 글을 쓰고, 또 자기 자신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그런 것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멋있어. 대리전에서 읽은 단편들 중에서 종교나 진화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들이 사뭇 흥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막히네요. 막힘 없이 쓰고 가던 내용이 약간 막히네요. 헤헤.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저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이 글이 임시저장에 머물 것인가 등록이 눌려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낭4. 바이트낭비 후기

글을 적는 동안은 엄청 즐거웠는데, 하루 종일 정말 아무 일도 안했고, 듀게분들이 추천해주신 노동요들 듣고(밑에 제가 쓴글 참조), 이 신변잡기적인 글(봐주세요. 신변잡기적인 글이 원래 듀게전통이잖아요.) 적으면서 시간을 썼는데. 살짝 현타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많이 부끄럽고 쑥쓰럽고, 민망하고, 뭐 그렇네요. 왜 요약해야하는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요약하면요, 아니요, 요약은 포기하겠습니다. 이런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시다니 분명 복 받으실 겁니다. 



덧) 생각해보면 에반게리온 같은 경우는 TVA를 정주행하기도 전에 소리바다나 프루나를 이용해 그 음악들을 MP3 플레이어에 담아서 그 느낌에 흠뻑 빠져살았던 것 같아요. 이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두 곡은 

Thanatos - If I Can't Be Yours

https://www.youtube.com/watch?v=oKCH5thyVAA


The End Of Evangelion - Komm Süsser Tod(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oIscL-Bjs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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