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성폭력을 바라보는 필터

2021.01.22 12:36

Sonny 조회 수:672

<라쇼몽>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작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쓴 "덤불숲"이라는 단편입니다. "라쇼몽"은 라쇼몽에서 시체의 머리카락을 뜯는 할머니를 한 남자가 목격하고 그 할머니의 옷도 훔쳐간다는, 류노스케의 또 다른 단편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진 않았는데 어찌됐든 영화가 더 유명하니까 덤불숲을 라쇼몽이라고 칭하겠습니다. 라쇼몽은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한 부부가 가다가 산적을 만나고 아내가 그 산적에게 강간을 당한 뒤 남편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사건의 진상을 관에서 조사하자 모두가 아내, 산적, 남편(의 혼령)이 자기 입장에 유리한 이야기를 하면서 진실은 모호해집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완벽한 객관적 진실은 없고 각자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볼 뿐이라는 체념이 묻어있죠.


라쇼몽은 현대 시대에 맞게 해석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남자들이 성폭력 사건을 두고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저마다의 상상에 맡깉다는, 자신만의 열린 결말로 자꾸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자집단의 이 여론을 한샘 성폭행 사건 때 보았고 미투 고발과 다른 유명인들의 성폭력 사건 때마다 반복되는 걸 계속 목격합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면 박원순 사건이 있겠네요. 성추행 의혹을 받자 한 정치인 남성이 자살했습니다. 그것말고 그 정치인이 죽을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법원이 다른 증인의 증언을 통해 그 정치인이 피해자를 성희롱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정황은 너무나 뚜렷했고 법원도 새로운 증언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지지자들은 (의외로 남초 사이트들은 박원순의 성추행을 바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더민주의 위선자라는 프레임과 '남페미'라는 그들만의 이상한 선긋기를 하면서요) 알 수 없는 진실이라는 자신들만의 망상으로 도피합니다. 피해자의 말을 거짓이라 할 수 없지만 죽어버린 가해자의 말도 들어는 봐야하는데 그걸 할 수 없으니 완전한 진실을 알 수는 없는 상황이고 어쨌든 우리는 박원순이 성추행을 했다는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로 보류해두겠다는 결론으로요. 그들만의 라쇼몽입니다. 모든 진실이 엉키고 충돌해서 어떤 게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그 혼돈 자체가 결론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입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그런 결론은 없습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그 정도로 오리무중에 빠지지 않고 박원순 사건은 처음과 끝이 아주 명확합니다. 그 진실을 파헤치지 못하게 한 건 박원순 유족입니다. 박원순 지지자들은 아무도 포렌식 조사를 감행해서 박원순의 결백을 밝히자는 말은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피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피해자의 변호사는 어떤 사람인지, 피해자가 어떻게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명하는지만 계속 이야기하며 박원순이라는 가장 큰 진실은 보지 않습니다. 성폭력 사건은 기본적으로 이분법의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남자가 성폭력을 저질렀거나, 남자가 성폭력 모함에 휘말렸거나. 그런데 박원순 지지자들은 이 이분법조차도 하질 못합니다. 박원순이 왜 무죄이고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는지도 이야기를 못한 채 결론에 다가가기를 유보하고 있는 거죠. 이건 정확히 말해서 라쇼몽도 아닙니다. 그냥 라쇼몽처럼 진술이 엇갈리고 뭔지 알수 없을 거라고 믿고 싶은 자신들만의 망상입니다. 판단을 보류한다고 해서 그 판단을 언젠가는 결론으로 이을 것도 아니잖아요? '모르겠다'는 중립이 아닙니다. 다른 한 쪽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한 핑계입니다.


성폭력을 두고 라쇼몽의 의미를 찾는다면, 제 아무리 입장이 부딪혀도 전제가 되는 진실은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산적이 여자를 강간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강간했다는 사실은 그냥 일단 전제로 두고, 그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됐냐를 따지고 있으니까요. 여자가 아무리 간악하고 요사스러워도, 산적이 아무리 착해도, 남편이 아무리 박정해도, 남자가 여자를 강간한 사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박원순 사건을 두고 이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박원순이 죽었고 성추행 의혹이 바로 불거졌습니다. 그것 말고 박원순이 자살할 이유는 없습니다. 박원순은 변호사 출신이고 성추행 의혹이 거짓이라면 거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시청에서 박원순을 상사로 두고 일하는, 상대적 권력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진실을 먼저 인정하고 이야기를 해야 그 다음의 사실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무조건 모른다고 도망칠 일이 아니라요.


어쩌면 현실세계는 라쇼몽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릅니다. 진실이 충돌할 일도 없는데 하나의 진실을 잘게 쪼개서 계속 거짓말일수도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만 제기하며 진실을 외면하고 있으니까요. 진실과 진실이 충돌하는 게 아니고, 거짓과 거짓이 충돌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뚜렷한 진실도 강력한 거짓말 앞에서 그 힘을 잃는데 사람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거짓말에 빠져듭니다. 사실 논쟁이 일어나는 거의 모든 성폭력 사건은 다 이런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그 욕망을 지지자들은 깨달을 때가 되고도 남지 않을까요. '나는 모르겠다.' 정치인이 청문회에서 말하면 어처구니없어하면서 비웃는 이 말을 왜 그렇게 굉장한 논리처럼 말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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