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고 그런 시간을 지나며

2021.01.22 17:41

어디로갈까 조회 수:852

1. 며칠 도로에 쌓여있던 눈이 이제 다 녹았네요. '눈은 녹는 것이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을 처음 접했을때 별 말 아닌데 이상하게 심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튼 형체의 부분 부분이 증발돼 어떤 소음도 부산물도 없이 하늘로 사라져버린 존재론적인 실종의 광경이 곱디 곱습니다. 싸늘, 단단했던 얼음에서 부드러운 물로. 드디어는 증기로 힘이 빠져버리는 변화의 과정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구나 낯설게 감탄 중이에요.
얼음이 고요하게 물로 바뀌어 사라져버린다는 것. 우리가 계속 주시하지 못하는 그 과정 속에 얼음이 내지르는 비명이 감춰져 있을 텐데, 뒤늦게 상상으로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2. 오늘  동료 dpf가 단어 하나의 뜻을 물었어요. '도모지'가 뭐냐고. 구글링의 대가인 그가 그걸 검색 안 해봤을 리가 없죠.  
" 도모지 塗貌紙는 조선 시대에 행했던 사형 방식이고, 집안의 윤리를 어긴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행했으며, 처형하려는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묶고 얼굴에 물을 묻힌 종이를 겹겹이 바르는 형식이다. 몇 겹씩 얼굴에 단단히 쌓아올린 종이가 코와 입에 달라붙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면서 질식사하는 것이며 천주교 박해에 쓰였다"고 시들, 건성 답하니 씨익~ 웃더군요.  
이 친구 요즘 보면 뒤늦게 사춘기 과정 중인가 싶어요. 한달 전쯤부터 제게 " 더 나이 들면 우리 지리산에 가서 흑염소나 키우고 살자~"라는 꼬시레기 말을 해대는데 이게 분명 어디서 배운 표현일 거거든요. 저는 TV가 없어서 모르는데 어느 방송이나 언론에서 회자되는 말인지 아는 분들 계시면... 

3. 내일부터 겨울 휴가입니다. 작년에는 랭보의 고향에 가서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을 즐겼는데 올해는 갈 곳도 할 일도 없네요.  세상 신경 안 쓰고 제 마음이나 다듬으면 되겠지만 심심하기는 할 테죠.  매일 4km 정도 걸어볼 거고요, 중단했던 라틴어 공부를 계속할 작정입니다.
왜 이런 예감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까마득한 시간을 살았구나 싶은게 어쩐지 제 삶의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날씨 탓일까요.  - -:
빈 들/. 청야淸野/ empty field 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맴맴돕니다.  '절대적인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과 불완전성이 비어 있는 것이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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