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기능

2021.03.05 16:10

Sonny 조회 수:748

누군가에게 글을 쓰거나 댓글을 다는 것은 대화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만인과 만인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화로운 사이가 될 수 없고 이 사회적 한계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대화라는 건 최소한의 신뢰와 호의를 바탕으로 상호작용하는 현상인데 이걸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럴 의무도 없죠. 물론 게시판 내에서 지나친 친목질은 "커뮤니티"라는 기능적인 공간에서의 최대다수의 최대소통을 방해하는 일이 되겠지만 어찌됐든 불통의 한계는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맞고 모든 사람이 소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말섞기 싫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한 반에서도 친한 사람과 안친한 사람이 나뉘고 누군가는 친구를 할 수 없을만큼 안맞기도 하니까요.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만큼이나, 불통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예의입니다. 커뮤니티는 결국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여가의 장에 가깝고 그 모든 대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어도 유희에 지니지 않습니다. 커뮤니티는 누군가의 일기장, 일장연설, 소소한 낙서를 공유하는 것에 그칠 뿐입니다. 글을 써야 할 의무도 대답을 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예의와 호감이 지표가 됩니다. 이 사람에게, 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떠들어야 할 아주 사적인 책임만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해 어떤 사람이 대화의 가치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별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적인 호의장이나 공동의 책임을 공유하진 않으니까요. 


서로 좋아하지도 않고 설득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몰이해가 계속 된다면 소통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둬야할까요. 다시 말하지만, 이곳 커뮤니티는 지극히 사적인 사교의 장입니다. 대화가 안되는 사람은 포기를 하게 됩니다.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멀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인격체로서의 접합점이 희미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맞지 않는 사람과의 소통이 강제되어야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쌍방이 싫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최소한의 호감과 존중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고 그게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면 단절은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결혼을 한 부부가 이혼을 하고, 친했던 친구가 절교를 하는 것처럼 커뮤니티 내의 한 회원과 다른 회원은 차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라도 나는 차단당해서는 안된다는 근거없는 자의식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더 엄밀하게, 듀나게시판의 각 이용자 성향과 차단 기능이 활용되는 사례들을 따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듀나게시판이라는 공간은 차단이 불필요한 공간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단한다는 말을 상대에게 할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일방적인 조롱이나 의견개진으로 소통에 실패하고 있던 경우가 잦았습니다. 혹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를 잊고 누군가 가장 힘든 고백을 하고 있을 때 조차 익명성에 힘입은 비인간적인 조롱을 하고 있던 경우라든가요. 즉 듀나게시판에는 도저히 소통이 되지 않고 소통을 굳이 해야할 필요도 없는 이용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인격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차단기능을 사용합니다. 회원가입에서의 선별이 완벽할 수 없다면, 소통단계에서의 개인적 선별이라도 가능해야합니다. 차단은 소통의 단절을 통해 상대를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기보호입니다. 이 게시판에서는 누군가의 어떤 발언을 두고 적극적으로 인민재판을 하며 사후적 선별을 하진 않으니까요. 


물론 차단이 다른 의견들의 충돌을 통한 정반합의 탐구와 다양성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글쎄요. 이에 대해 저는 더 길게 쓰겠지만 "다른 의견"이라고 해서 모든 의견이 같은 가치와 정합성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밑도 끝도 없는 품평과 기초가 되는 전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더 할 수 있을까요. 여성인권을 다룰 때 일베나 디시인사이드의 의견을 과연 "다른 의견"으로 취급하고 그에 맞서 논쟁해야할까요. 모든 사람에게 소통의 가능성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인정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이 다르되 진지한 충돌이 가능한 "다른 의견"은 오히려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동질성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장한 헛소리의 사전적 거름망입니다. 그것은 꼭 같은 편이라거나 무조건적인 동의가 아니라 충돌의 성숙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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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듀나게시판의 차단기능은 트위터에서 쓰이는 블라인드 기능과 동일합니다. 차단을 하더라도 상대는 어찌됐든 발언을 할 수 있고, 그 발언이 단지 로그인 한 상태의 차단당사자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죠.  이 기능은 어쨌든 상대를 비가시화하는 효과는 있어서 불필요한 논쟁이나 인격모독에서 자신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히려 지금보다 차단기능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듀게의 차단기능이 블라인드가 아니라, 트위터의 블락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를 안볼 수 있는 기능이 아니라 로그인한 상태에서의 상대가 차단한 사람을 볼 수도 없고 말도 걸 수 없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이야말로 차단이 본래 지니는 효과를 더 정확히 구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대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려야하지 본인이 그 사람을 안보려고 선글라스를 쓰는 건 결국 그 사람이 당사자에게 가할 수 있는 무례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니까요. 얼마전 모 회원이 취약한 상태에서 다른 모 회원의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탈퇴글을 썼습니다. 결국 모르는 타인들의 악의를 전부 통제할 수는 없더라도 이 게시판에서 어떤 사람들이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게끔 보호장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연히 미완의 장치이고 그런 장치가 필요하다는 게 이미 어떤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환경이 더 나아지고 사람들이 더 풍요로워진 상태에서 인내심있게 어떤 의견들을 거르며 본인이 원하는 소통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개개인이 최소한의 방어장치를 통해 보다 엄격한 소통의 구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친 사람들이 자기객관화가 안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악플을 받는 걸 냉철하게 방어해낼 수 없습니다. 그럴 힘이 있다하더라도 굳이 그렇게 소모적으로 대응하거나 보이는 글을 꼭 방어해야할 필요는 없겠죠. 트위터의 블락 기능을 도입하는 것은 이곳 듀게를 만장일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회원들이 더욱 더 개인화가 된 채로 보다 성숙한 논쟁과 대화를 개진할 수 있는 장을 준비하는 것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보다 정확한 소통과 이를 위한 최소한의 구별은 꼭 필요합니다. 물론 이렇게 쓰는 제가 댓글을 크게 믿지 않고 어떤 커뮤니티든 대댓글을 통한 싸움의 연속보다는 하나의 글로 정립되어있는 의견들이 다수 난립할 때가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바꾸자는 건 아니고 그냥 하나의 선택지를 고려해보자는 것입니다. 다수의 선의와 배려로도 어떤 실패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요사이 듀게에서 실감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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