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 것인데요. 일단 수정은 해 봤는데... 지금은 그림이 보이려나요.
- 1995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1시간 39분. 스포일러는 이번에도 있습니다.
(더 보기 좋은 버전의 포스터가 많았지만 라떼 영화엔 역시 라떼 포스터가 제 맛. 타락천사 넘버 완투쓰리뽀퐈이브!!!!!)
- 중경삼림의 자매품답게 두 가지 이야기가 각각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전개되는 영화죠.
이야기 1은 직업 킬러 여명과 그 에이전트 이가흔, 지나가던 낯선 여자 막문위의 신나게 빗나가는 사랑 이야기구요. 이야기2는 중경삼림의 캐릭터와 이름도 생김새도 똑같은 '하지무'라는 젊은이가 양채니에게 실연당하고 아버지를 떠나 보내며 사랑과 기억에 대해 배우는 이야기... 라고 하면 되려나요.
다만 중경삼림과는 달리 이번엔 앞, 뒤로 뚝 잘려 나열되는 게 아니라 두 이야기가 병행하며 함께 진행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크게 달라지는 건 없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얘들이 주인공인데... 뭐 하는 짤인지 모르겠네요. 영화 속 장면은 아닌데. ㅋㅋㅋㅋ)
- '중경삼림'의 개봉이 95년 9월이었습니다. '동사서독'이 같은 해 11월 개봉이었구요. 요 '타락천사'는 95년 12월에 개봉했네요. 먼저 개봉한 두 영화는 사실 1994년작이니 1년 텀을 두고 수입된 것인데, '중경삼림'의 대박 덕에 '타락천사'는 거의 시간 차 없이 개봉을 한 거죠. 덕택에 한국 관객들은 3개월에 걸쳐 왕가위 영화 세 편을 봤으니 1995년 하반기 한국 극장가는 왕가위 갬성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ㅋㅋㅋ 이런 경우가 또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재개봉이나 무슨 행사 같은 것도 아닌데 한 감독의 영화 셋이 3개월동안 연달아 개봉이라니. 허허.
(그래서 3개월만에 다시 등판하신 금성무씨. 이땐 정말 되게 큰 스타가 되실 줄 알았죠.)
- 근데 전 이 '타락천사'는 비디오로 봤어요. 그 시절 유행 신문물이었던 비디오방에서 친구 한 명과 함께 봤는데, 지금은 그게 누구인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성별이 여자였던 건 분명히 기억합니다. 왜냐면 별 생각 없이 보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가흔의 자위 장면 때문에 상당히 난감했던 건 생생하게 기억하거든요. 그 좁은 방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 엣헴엣헴. 허허. 쿨럭. 침묵(...)
(그 와중에도 시계에 집착하신 왕가위씨.)
- 좋은 점부터 말해보자면. 왕가위가 확실히 난 사람이긴 합니다. 분명히 세기말 정서가 낭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비주얼이 촌스럽지가 않아요. '열혈남아'를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이 '타락천사'가 제일 대단하다 싶은 건, 컨셉으로 따지면 오히려 가장 낡은 축에 속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중경삼림'의 자매품이라고 하지만 컨셉이 확실히 다르거든요. 제목처럼 좀 다크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컨셉이고, 그걸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게 등장 인물들(특히 여성 캐릭터들)의 옷차림과 메이크업이에요. 근데 이게 딱 세기말 스타일로 과합니다. 빤들빤들한 재질의 검은 옷을 위아래로 두르고 얼굴엔 너구리(혹은 판다?) 메이크업을 하고선 영문을 알 수 없게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죠. 그러니 상상만 해도 촌스러워야 정상인데, 안 촌스러워요. 이 영화 이후에 당연한 수순으로 이걸 흉내낸 스타일링을 한 캐릭터들이 튀어나왔던 한국산 컨텐츠들을 지금 보면 대부분 참 구수한 감정(...)이 드는 것인데요. ㅋㅋㅋ
(어쨌든 폼은 납니다. 공감이 되든 말든 폼은 나요. ㅋㅋ)
- 그리고 역시 이후에 한동안 큰 영향을 미쳤던 촬영 기법들이 눈에 띄죠. 광각을 활용해서 일부러 왜곡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것. 당연히 왕가위가 원조는 아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써먹는 한국에서의 세기말 유행은 왕가위가 만들어낸 게 맞구요. 터널 속을 달리는 장면들의 이미지 같은 것도 이후에 수없이 재활용되었고. 그리고 또... 이 영화가 없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었던 한 영화가 자꾸만 생각나더라구요.
(이야기에는 허영만의 원작이 있지만 비주얼적인 측면에선 그냥 '타락천사'에서 복붙한 수준. ㅋㅋ)
- 칭찬은 이만 하고, 문제는 뭐냐면요. 이야기가 참 재미가 없고 캐릭터들도 매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길게 말할 것 없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다 상황부터 성격까지 너무 극단적이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게다가 또 그 캐릭터들이 똥폼을 아주 오지게(...) 잡습니다. 공감은 커녕 '아니 지금 뭐 하는 건데? 왜 저러는데?'라는 생각만 드는 인물들이 내내 흐느적거리며 폼만 잡고 있으니 나중엔 그냥 웃음만 나오더라구요.
이 글 적기 전에 듀나님께서 이 영화에 대해 짧게 적으신 걸 읽었는데, 아주 격하게 공감이 갔습니다. '사는 게 지루해서 맛이 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ㅋㅋㅋㅋㅋㅋ 맞아요. '아비정전'이든 '중경삼림'이든 최소한 보면서 '얘들 진짜 외롭구나'라는 생각은 들었거든요. 근데 이 영화의 사람들에겐 그런 느낌도 잘 안 들었습니다. 진짜로 인생이 지루해서 아무 일 저지르며 몸부림치는 놈들처럼만 보였네요.
(돼지한테 왜 그러는데.)
그냥 이야기 측면에서 봐도 그래요. 하나하나 인상적인 장면들은 제 기억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게 실려 있는 이야기가 영 구립니다. 왕가위 버전 홍콩 느와르를 의도한 듯한 여명-이가흔 스토리는 생각보다 그럴싸했던 왕가위씩 쌍권총 액션 말곤 기억에 남는 게 정말 하나도 없었구요. 첫사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갑자기 아버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금성무의 이야기는 그래도 각 부분들은 괜찮은 것 같은데 갸들이 하나로 잘 붙질 않는 느낌.
(주크박스한테 왜 그러는데.)
- 암튼 그렇다보니 위에서 칭찬한 독보적인 비주얼이나 여전히 근사하게 뽑아내는 분위기, '중경삼림'과 비슷한 톤의 명대사 워너비 드립들이 싹 다 완벽하게 공허한 폼잡기로만 느껴지구요. 집중도 잘 안 되고 지루해서 보다가 일시 정지의 유혹에 계속 흔들렸습니다. 기왕 시작한 건 얼른 끝을 봐야 한다는 평소 원칙대로 우다다 달려서 끝내긴 했지만 처음으로, '아비정전' 때도 못 느꼈던 중도 이탈의 유혹을 느꼈습니다. 잘 봤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세기말 갬성 가득!!!)
+ 지금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금성무 파트가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얘기지만 은근히 닮은 구석들이 적지 않습니다. 첫사랑, 아버지와의 작별, 찍고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기억'이란 것에 대해 고찰하는 주제 의식 등등.
++ 그나마 괜찮았던 캐릭터를 하나만 찾아 본다면 양채니가 연기한 금성무의 첫사랑 캐릭터는 나름 괜찮았습니다. 막문위의 열정(?) 캐릭터도 사람 냄새 나서 나쁘진 않았구요. 하지만 나머지 캐릭터들은 그냥 다 유령 같았어요. 그것도 지독하게 폼 잡는 유령들.
(문자 그대로 폼 하나에 죽고 사는 분들, 그런 영화였습니다.)
2022.04.15 13:43
2022.04.15 15:35
네? 비디오방에 다른 취지가 무슨... ㅋㅋㅋ
근데 아주 초기라서요. 그 당시엔 다들 건전하게 이용하지 않았을까요. 제발 남들도 그랬다고 말씀해주십...
2022.04.15 14:10
하하하 맞아요. 정말 사는게 너무 지루해서 미쳐버린 캐릭터들이라는 듀나님 표현이 딱이네요. 금성무, 양채니 캐릭터가 그나마 좀 안쓰럽고 공감이 가다가도 하는 짓들이 해도 너무해서 아니 상관없는 타인들은 왜그렇게 괴롭히는 ㅋㅋㅋ 막문위는 아비정전에서 유가령 캐릭터를 엽기적으로 틀어버린 느낌이기도 했구요. 하여간 살면서 간접적으로라도 전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죠.
그런데 아직 철없고 세상경험 부족했던 시절의 저에게는 이 주인공들이 그냥 멋있게 느껴졌나봐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노답인생인 여명, 이가흔 캐릭터들도 특히 이가흔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너무 아름답지만 여기서 보여준 퇴폐미는 그 어떤 작품의 팜므파탈 캐릭터들 하고 비교해도 으뜸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우리가 영화속에서 우리랑 비슷하거나 공감가는 사람들만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관찰자 입장에서 흥미롭게 지켜보는 재미도 있으니까요.
원래 한 작품으로 구상했었기도 해서 중경삼림과 연작처럼 이어봐야 허전하지 않아서 계속 세트로 묶게되는 작품들입니다. 지금 다시보면 지적하신 그런 부분들이 걸리긴 해도 라떼시절에는 저런 세기말 폼생폼사 감성에 열광하면서 봤었고 최근에 다시봐도 그럭저럭 괜찮게 느끼고 있습니다. 확실히 90년대 중반에 이런 작품들이 연달아 개봉하면서 왕가위 월드에 우리나라 씨네필들이 많이 빠져든 것 같아요. 유선방송에서도 자주 해줬었고
2022.04.15 16:22
맞아요 둘 다 이유 없이 남들 괴롭히는 게 심해서. ㅋㅋ 특히 금성무는 진짜 '저게 무슨 긍정적인 게 있는 거겠지?' 했는데 그딴 거 전혀 없고 오히려 당한 사람들이 더 착해 보여서 당황했네요.
그 시절엔 확실히 폼 나 보이긴 했죠. 90년대 정서상 '평범하지 않은 삶'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워낙 커서 그게 민폐든 뭐든 그런 건 다들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뭐 불법 다운로드도 거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며 다들 자랑스럽게 하던 시기이고 하니까(...)
90년대에 불타올랐던 아트 무비 열풍의 종착역이 왕가위 아니었나 싶어요. 누벨 바그, 타르콥스키, 키에슬로프스키, 레오 까락스 등을 거쳐 왕가위!!! ㅋㅋㅋ
2022.04.15 16:44
세가지 색 시리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정말 당시 제 안목으로는 이해 하나도 안되는데 영화팬들이 열광한다고 해서 나도 괜히 끄덕거리면서 맞장구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ㅋㅋㅋ
2022.04.16 00:39
전 누벨 바그 영화들이 참 그랬어요. ㅋㅋ
근데 어찌저찌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략 열 번씩 보고 나니 뭔가 이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정말 이해를 했던 건진 잘 모르겠구요. 씨네필 코스프레하기 참 어려웠습... (쿨럭;)
2022.04.15 14:24
2022.04.15 16:24
아아 아닙니다 그냥 여자 사람 친구였습니다. 믿어주세요! 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왕가위 영화는 한 편 보고 갬성에 안 맞는다 싶으면 다른 거 굳이 안 챙겨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컨셉 확실한 사람이니까.
계속 보는 이유는... 첫째는 왕가위란 이름 자체가 라떼 추억의 아이템이기도 하구요, 최근에 넷플릭스에 이 양반 영화들이 와다다 한 번에 좍 올라왔거든요. 그래서 얼떨결에 하나 보고, 본 김에 나머지도 보고 있습니다. ㅋㅋ 글에도 적었지만 일단은 쉬어가려는 중이구요.
2022.04.15 17:15
당시엔 정말 영화 보러 가던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ㅋㅋㅋㅋㅋ 시민 케인이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같은 영화는 비디오방에나 가야 있었어요. 물론 제가 좀 건전한 사람이긴 했죠.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욕만 하고 있는 영화라서 댓글 안 달려다가 비디오방을 덥썩 물어버렸군요;;
중경삼림도 -양조위 금성무의 예쁜 눈과 왕정문의 민소매 옷태 말고는-딱히 어마어마하게 감명을 받진 않았는데 타락천사가 왜 그렇게 실망스러웠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한 번 볼까봐요.
2022.04.16 00:41
동네에 '영화마을' 비디오샵 체인점이 있었는데 그 곳엔 말씀하신 그런 영화들이 있긴 했어요. ㅋㅋ 근데 진짜로 초기엔 비디오방에서 뭐 다른 일(?) 하려는 사람 없었죠. 막 8명씩 들어가는 거대 룸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비디오방들이 밖에서 방 안이 훤히 보이는 식이었으니까요.
실망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수십년 후에 다시 보는 건 좀 특이한 경우겠지만, 보고서 실망한 것도 추억이니 다시 보셔도 영화와 관계 없이 기분은 좀 좋아지실지도!! ㅋㅋㅋ
중경삼림을 인상 깊게 보고서 이걸 봤었는데 뭔가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재밌는데 의무감으로 봤던 거 같아요. 종종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거 볼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내용이 기억나시는 걸 보니 비디오방을 본연의 취지에 맞도록 성실하게 이용하셨었나봐요. 박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