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과 헌책들.

2011.03.15 21:44

말린해삼 조회 수:1844

사실, 서울에 방을 얻자마자 방정리 보다 먼저한게 헌책방을 먼저 찾는 것이었죠. 그동안 잡지로만 봤더 서울의 많은 헌책방들은 어떨까. 후배한테 물어보니, 이젠 다 술집으로 바꼈다 라는 말에 좀 실망했지만서도 검색을 해보니 가까운 곳이 용산의 뿌리서점이었어요. 그래서 걸어서 고 투더 용산.


용사의 집 골목을 지나니 떡하니 입구에 헌책들을 쌓아놓으셨더라구요. 처음 가는 서점인데 머리 약간 하얗고, 큰 안경 끼신 황색잠바의 사장님이 고개를 까딱이시며 인사를 하셨습니다. 처음 보시는 분인데 사람좋게 인사하니, 저도 최대한 제가 할 수 있는 순진무구하고 환한 미소로 답례했지요. 입구부터 LP판, 만화책, 테잎등 오만가지 헌것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들어가서는 놀랬던게... 책들이 정말 엄청나더군요. 좁은 공간에 뭐랄까.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듯한 -_-;;;

하지만 자세히 보니, 철학은 철학. 시집은 시집. 소설은 소설대로 정리가 되어 있었어요. 원서들도 많았구요. 구석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가 제 가슴만큼까지 쌓여 있었습니다.(제 키가 195니까...한 150까지?읭?)노오란 얇은 애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웃기고 재밌더군요. 얼굴격인 제일 윗 책 표지에는 해달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어요.


무얼 살까..하다가, 아무래도 신간 소설은 없는 듯 해서 고전을 사자. 하는 마음에 고전을 고르고 골랐지요. 쟝 크리스토프를 사고 싶었는데  두 권이 있었습니다. 근데 두권 다 1권 밖에 없더라구요. 아쉽지만 포기. 펄 벅의 대지 3권짜리 있었는데.. 우와!했지만 마음을 접었습니다. 희한하게 장이모의 초기 영화와 위화의 소설을 보면 너무 슬프더라구요. 중국인들의 그 슬픔속에 웃음들과 간혹 보이는 그들의 잔인한 것 같은 심성들이 요상하게 믹스되는 그 분위기.(루쉰의 작품에 그 심성들이 잘 나오지만, 루쉰은 위화보단 슬프지 않아요. 오히려 마음 속의 무언갈 끌어올려주며 강렬하게 해주죠. 저한텐)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는 2권까지 밖에 없고... 제가 좋아하는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은 시리즈 중 한권이 빠져 있어서, 저같은 전작주의자한텐 아쉽지요. 의외로 토머스 하디의 테스가 6권이나 있더라구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뭘 고를까 오만 생각을 하며 고른 것은!

앙드레 지드 소설집.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건 누구나 꼭 읽어보라길래)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전 이분의 소설이 참 좋아요. 하나 밖에 안 읽었는데 참 좋아요. 외모도 너무 좋고.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고...


고골리의 외투/코!!!!입니다.


고골리의 외투/코는 범우 사르비아 문고판인데 왜 이걸 고르고 왜 느낌표까지 붙였냐 하면.

전 책의 삽화를 꽤나 따지거든요. 물론 위의 책들은 삽화가 전혀 없어요. 근데 간혹 옛날 책들은 예전 제가 쓴 글처럼 다른 나라의 삽화나 운이 좋으면 원판의 삽화를 아무 생각없이 따와서 실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골리 단편 소설집이 그랬어요. 고골리의 해학이 좋긴 한데, 책을 꺼내 보니, 삽화가 너무 좋은 거에요. 아무런 계산없이 꺼내 들었습니다.횡재했구나 하고.


헌책들의 매력은 또 있지요.

간혹 헌책 중간에 줄은 그은 흔적(이건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전 읽다보면, 제가 놓치는 부분을 설명해 놓은 줄과 글귀가 있어서 좋습니다. 밑줄 긋는 남자란 소설도 생각나구요.)도 있고, 뿌리 서점에서 본 어떤 책은 가족 사진 세장이 끼워져 있는 책도 있었어요. 그런 사진을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저까지 마음이 따듯해 집니다. 한복입으신 할머니를 가운데로 뽀글파마를 한 아주머니와 커다란 안경을 쓰신 아저씨의 사진. 참 정겹습니다. `창녀론`이란 책에는 어떤 남자분이 여자친구분에게 선무를 했나 보더라구요. 자기는 이책을 읽고 많은 충격과 배움을 얻었다. 벌써부터 선물을 받고 웃고 있는 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근데 제가 봤을땐, 웃진 않았을 거 같은데 -_-

가끔 연인들의 편지와 메시지가 책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헌책들도 많지요. 


그 둘만의 비밀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운 추억은 이제 그들에게선 희미한 흔적이 되지만, 제3자가 그걸 발견하고 또다른 감성을 낳고. 이런게 헌책의 매력인것 같기도 해요. 그렇다고 창녀론을 사진 않았습니다.김완섭이란 사람. 썩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저도 책을 사면 꼭 길게는 아니지만, 책 처음의 텅 빈 색지에 산 날짜와 어디서 샀는지. 왜 샀는지를 짧게나마 적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낙서들을 보면 너무 좋아요. 특히나 그 책장들 사이로 스며나는 매캐하면서 기분 좋은 냄새는 참 좋죠. 서점을 가면 꼭 책을 펼치고 중간에 코를 박는 버릇이 있긴 합니다.;;;(민폐긴 하지만;;;)


중간에 아주머니께서 귤을 먹으라고, 커피와 함께 주셨어요. 그러면서,

-제주도에서는 귤을 구워먹는데. 달다던데 참 신기하지 않아?

이러시길래 제가,

-제가 제주도에서 왔구요. 저희 고모가 과수원 하시는데 정말 구워 먹어요.그냥 귤맛이에요.ㅎㅎ

하니까 웃으시더니 다른 아저씨 두분을 가리키시며 저 두분도 제주도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칭찬을 하시는 거에요.


-제주도 사람들은 좋은게, 변하질 않아.


.....-_-

그동안 전에 사겼던 여성분들에 대한 죄송함과..;;;절교한 친구들에 대한 몸둘바 모르는 부끄러움이;;;


그 두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책을 사고, 값을 치루는데 아주머니가

-웃는게 참 착하네. 제주도에서 왔다는데 만원만 줘!

하십니다. 책 6권을 만원에 샀어요!!!하하하하!!


책을 사고 커피를 한잔 더 마시면서 얘기를 듣는데 라디오에서 일본 지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삶에 눌리고, 삶에 찌들거나 여러 상념보다는 사느라 정신 없으신 분들이 가끔 하시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귀에 와닿아요. 막말로 노가다 하시는 분들은 삶에 깊게 생각할 틈이 없지요. 하루하루가 힘들기에. 그런 분들이 하시는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은 저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뭐 어쨌든, 아주머니께서.


-이게 무슨 일이래. 이게 사는건가. 삶의 도리란게 이런건가 보네. 

'그렇게 힘들게 살아도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게 산다는 건가..참....


이 말이 귀에 잠시 울렸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도 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게 산다는 건가.


제가 너무 감성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기분 좋게 서점을 나와보니, 밖은 깜깜하더군요. 좁은 골목길에는 어르신 세분이 무슨 약속이 있으신듯, 기분좋은 표정으로 이야길 하시면서 가로등 밑을 지나가십니다. 제 가방에는 싸게 샀지만 비싼 무엇이 될 책들이 여섯권이나 들었었구요. 집까지 걸어오면서 긴 시간이었지만 한강대교에서 노래도 크게 불러보면서 기분이 좋은 밤이었습니다.


오늘 게시판 분위기가 너무 과열됐는데, 분위기를 모르는 놈처럼 글을 쓴 것 같기도 해서 죄송하지만 저처럼 조금은 쉬어가길 바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2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8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69
126061 범죄도시4...망쳐버린 김치찌개(스포일러) new 여은성 2024.04.25 98
126060 다코타 패닝 더 위처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악마와의 토크쇼 예고편 new 상수 2024.04.25 65
126059 요즘 듣는 걸그룹 노래 둘 new 상수 2024.04.24 68
126058 범도4 불호 후기 유스포 new 라인하르트012 2024.04.24 99
126057 오펜하이머 (2023) new catgotmy 2024.04.24 56
126056 프레임드 #775 [2] new Lunagazer 2024.04.24 26
126055 커피를 열흘 정도 먹어본 결과 catgotmy 2024.04.24 102
126054 [넷플릭스바낭] 몸이 배배 꼬이는 3시간 30분. '베이비 레인디어' 잡담입니다 [6] update 로이배티 2024.04.24 228
126053 프렝키 더 용 오퍼를 받을 바르셀로나 daviddain 2024.04.24 34
126052 넷플릭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감상 [6] 영화처럼 2024.04.24 168
126051 "韓, 성인 문화에 보수적"…외신도 주목한 성인페스티벌 사태 [2] update ND 2024.04.24 245
126050 오펜하이머를 보다가 catgotmy 2024.04.24 110
126049 프레임드 #774 [4] update Lunagazer 2024.04.23 75
126048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5] 조성용 2024.04.23 404
126047 잡담) 특별한 날이었는데 어느 사이 흐릿해져 버린 날 김전일 2024.04.23 158
126046 구로사와 기요시 신작 클라우드, 김태용 원더랜드 예고편 [2] 상수 2024.04.23 278
126045 혜리 kFC 광고 catgotmy 2024.04.23 234
126044 부끄러운 이야기 [2] DAIN 2024.04.23 369
126043 [티빙바낭] 뻔한데 의외로 알차고 괜찮습니다. '신체모음.zip' 잡담 [2] 로이배티 2024.04.23 291
126042 원래 안 보려다가 급속도로.. 라인하르트012 2024.04.22 23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