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2011.04.16 20:42

렌즈맨 조회 수:1727

정말 오랜만에 예전에 좋아했던 애를 보았다. 아니 본 것 같다. 사실 그 때 안경을 안 쓰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2년 넘게 짝사랑한 입장에서 잘못 봤을 가능성은 적고 무엇보다 그렇게 예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잘 갖춰졌으면서도 조금 촌스러운 옷차림이나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황급히 가버린 것을 보면 역시 그 애가 맞는 것 같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하얀 다리를 다 내놓고 있었는데 그것이 불쾌했다. 그렇게 쉽게 보여줄만한 것이 아니지 않나.. 내가 겨우 그런 사람을 좋아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를 잊기 위해서 그 동안 했던 노력을 떠올려보았다. 주로 추하고 혐오스러운 이미지와 그녀를 연합시키려 노력했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 그 애가 설사똥을 주룩주룩 싸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사실은 자꾸만 새로운 취향에 눈뜨게 될 것만 같아서) 설사똥을 싼 뒤 똥구멍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그대로 컴퓨터 앞에 덜푸덕 앉아 야오이를 보는 그 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외에 그 애가 코딱지를 파서 책상 밑에 슥 닦는 거라든가 바퀴벌레를 잡아서 씹어먹는 것 등의 상상을 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면 거의 반사적으로 '좆까' 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 정도면 실제로 만나도 거의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예쁘다. 조금 예쁜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저려오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예쁘다. 쪽빛의 청명한 하늘과 그 밑에 만개한 벚꽃들도 그녀를 본 뒤로 시시한 풍경으로 변해버렸다. 수개월간의 혐오 이미지 연상 학습은 그녀의 천사 같은 모습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시 곧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여자를 조금 좋아하게 되기도 했지만 절대로 예전만큼 깊은 차원의 사랑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감정의 일부는 내 자신이 스스로를 억지로 세뇌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어떤 사람도 그만큼 좋아하게 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봄이 곳곳에 하얗게 피어 있었지만 나는 그럴수록 대동맥을 송곳으로 후벼파이듯 괴로운 기분이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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