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작한 "마리오 바바 특별전" 가서 〈죽여, 아이야... 죽여!〉("공포의 작용" 정도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은 "Operazione paura"라는 원제가 있긴 합니다만 바바 영화는 대체로 영어 제목이 죽이지 않습니까?) 보고 왔습니다. 최근에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고 특히 요즘은 기침이 심하고 냉방에 약해서 저는 물론이고 다른 관객분들께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퇴근 즈음 컨디션이 생각보다는 괜찮았고, 감기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복해야 하니까 좋아하는 영화를 봐야한다는 생각에 과감히 가기로 결심한 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영화에 완전 몰입해서, 감기 걸린 이후로 그 80분 동안 만큼 상태가 좋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기침도 두 번 밖에 안 했고요. 역시 훌륭한 영화는 육체와 정신 양쪽을 고양시킵니다.

 예상치 못하게 좋았던 점. 서울아트시네마 측에서 필름 수급을 할 당시에는 이탈리아어 더빙으로 안내를 받아서 이탈리아 더빙에 맞춰 자막 작업을 했는데 실제로 도착한 필름은 영어 더빙판이어서 영상 및 대사와 자막이 다소 어긋날 수 있다는 사전공지가 있었습니다. 이 불상사(서울아트시네마 자막 담당팀은 오늘 황급히 영어 더빙판으로 온 영화들의 자막을 수정 중이시랍니다... 힘내세요!)가 제게는 왜 좋았냐면─ 영화를 보는데 영어 대사가 귀에 조금씩 들리니까, 한국어 자막과의 불일치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자막 번역 자체는 맥락상 사소한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게 좀 보다보니 감기로 집중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며 피곤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에잇, 오늘은 자막 안 봐! 하면서 아예 스크린 오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게 영화에 대한 집중도를 확 높여줬지요.

 그 덕분일까요, 영화는 몇 년 전에 앵커베이에서 마리오 바바 박스세트 냈을 때 한 번 봤는데 그때도 좋은 영화라는 인상은 있었습니다만 어제는 완전 충격이었습니다. 이건 뭐 화면 연출만 보면 극초반부터 계속 클라이맥스 @o@;; 영화를 줄거리만 따라가고 '이 장면에서 저 인물이 뭘 하는구나' 정도만 체크하고 즐기시는 관객분들께는 지루한 영화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시하다는 건 전혀 아닙니다. 먼 옛날 듀나 님께서 리뷰에도 쓰셨듯 고전적인 고딕 공포영화의 구도를 뒤트는 즐거움도 있고, 일단 각본 구조가 군살을 빼고 타이트하게 확확 나가기 때문에...) 화면 구도, 미친 색감의 조명, 세트의 질감 같은 게 완전 전면에 나서서 그 자체로 영화의 중핵이 되니까 저로서는 황홀경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새삼, '아, 이런 게 영화지' 싶었고요.

 바바 감독님의 기가 막힌 점이라면 제작비의 빈곤함을 아예 지워버리는 강력한 내공을 선보이신다는 거. 가령 저는 존 카펜터 감독 영화를 보면 화면 내의 피사체, 특히 세트의 질감이 굉장히 후줄근하고 때로는 텅 비어 보여서 '제작비가 정말 없었구나'하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엄정한 화면 구도랑 편집의 박력으로 영화를 밀어붙이니까 '아, 이것이 정진정명 B 정신!'하고 끌려가는 식입니다. 그런데 바바 감독님의 영화는 똑같이 열악한 제작비를 가지고 만들었음이 분명한데도 애초에 화면의 색감, 질감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강렬해서 '돈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고 그저 쉴새 없이 쏟아지는 아이디어에 감탄만 하다 나옵니다. 예를 들어 빠른 줌이랑 카메라 움직임을 가지고 그네 탄 소녀의 시점샷을 만드는 대목을 보더라도 '아, 참 조악한 줌이구나' 하기는 커녕 그저 '어쩜 저런 식으로 연출할 생각을 했을까!'하며 탄복만 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열악한 제작 환경을 아이디어로 돌파해낸 영화인들을 보고 B 영화의 거장이라고 찬사를 던지고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작 기반하고 결과물의 간극이 이렇게 큰 분이 또 계실는지.

 여튼 우리나라에 다리오 아르젠토는 많이 알려졌어도 바바 영화는 해외 DVD 사서 챙겨보신 분들 아니시면 생소하실 텐데, 이번 기회에 많이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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