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스포일러 경고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붙입니다. 스포일러 경고!!!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더 이상 진화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아.

과학기술의 편리함은 오히려 인간을 더 멍청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래의 어느 날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이런 생각.

 

 

그런데 혹성탈출을 보면서 아~ 이런 식으로 인간이 진화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단순한 적자생존이 아니라 인공적인 약품을 인간에게 투입하여 인간 자체를 환경에 적합하게 만드는 거죠.(혹은 그 반대로 멸종시킬 수도 있고)

병을 치료한다는 목적의 모든 의약품들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신체에 변화를 가져올테니까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은 분명히 다른 종일 수도 있겠죠.

치매 치료약이 단순하게 치매를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능을 높여준다고 흥분하던 제약회사 사장을 보니까 "음....이런 진화도 있을 수 있겠어" 싶더라고요.

 

혹시 과학기술학(STS) 공부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저도 최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연구 방법론 중 하나인 ANT(actor-network theory)는 인간 만큼이나 사물도 상황을 설명하는 중요한 행위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사물, 인간 행위의 결과물, 혹은 자연은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러한 네트워크의 결과가 현재의 어떤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ANT 학자들은 ANT의 속성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규정합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는 거죠. 행위자들의 네크워크에 의해서......

 

행위자간의 네트워크가 원할하게 이루어지면 조직이나 사회는 안정적으로 "질서"를 이루게 되죠. 하지만 행위자 간의 긴장이 계속된다면 네트워크는 갈등이 일어나고 변화가 발생하며 행위자들은 네트워크 활동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게 됩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중요한 행위자는 과학연구자, 제약회사, Alz 112~113(맞나?), 유인원, 동물학대자입니다. 행위자들 모두 영화의 네러티브를 전개하고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아주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인간이 기계(과학기술의 메카)의 지배를 받는 게 당연한 미래라고 생각했던 건 지나치게 간단한 결론이었구나 깨달았어요. 아마 저도 인간과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일방향적인 관계의 흐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방향적인 관계의 흐름도 존재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사물도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거죠....

 

영화에서 Alz -112~113이 인간과 맺는 관계와 유인원과 맺는 관계는 매우 상이하죠. 이 관계에서 Alz 112~113는 네트워크의 주체이기도 하고 객체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던 네트워크 속에 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트워크에서 권력이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기는 하지만 온니 사물 혼자서 이 권력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사물의 매개로 인해 생명에서 생명으로.....인류라는 종의 변화이던 유인원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던......이게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까 이번 영화의 한국판 예고편 로고가 "진화는 인류를 위협하는 혁명이다"던데 분명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가 인간 중심으로 유지되던 네트워크를 위협하기는 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새로운 종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들을 너무 손쉽게 무력화시키는 거죠. 한 차원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매개체가 다른 차원에서는 전혀 힘을 못쓰는 겁니다. 즉, 네트워크에 적합하지 않은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사라지죠. 인간이 유인원에게 제압당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진화의 시작에서 보여 준 현실은 아직 안정적으로 질서를 확립한 네트워크가 아닙니다. 오히려 두 개의 서로 다른 네트워크가 공존하고 있는 갈등상태라고 할 수 있죠. 시저는 인성에 영향을 받은 특별한 유인원입니다. 그는 무차별한 살생을 제한하고 있으며 싸움과 혼란이 아니라 그와 그의 동료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갈구하고 있죠. 그는 인류의 문명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양육되었으며 이 점은 다른 유인원들과 구별되는 대착점입니다. 즉, 그와 인류 사이에는 다른 유의원들과는 다른 특별한 네트워크가 존재하죠. 시저가 우두머리로 남아 있는 한 오리지널 혹성탈출에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유인원들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전 여기서 다른 사물의 매개체 ALZ-113이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ALZ-113과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유인원들은 시저와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겠죠.

 

제작진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만약 다음 편을 만든다면 가능하면 시저는 건드리지 말아줬으면 해요. 시저가 사악한 악당으로 변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ㅡㅜ 왜냐하면 시저는 그 어느 인간보다 더욱 인간같은, 인간이 이상향으로 그리는 바로 그 모습을 담고 있잖아요.

 

예전에 제 은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인류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할 것이고 언젠가는 기계와 인간의 이종결합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텐데, 그런 날 인간을 전통적인 생물학적 개념으로 정의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우리는 인간은 하나의 종이라기 보다는 일련의 가치체계가 될 것이라고 보았어요. 즉, 그 대상이 얼마나 인간다운지는 우리가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가치에 맞는 인성을 가지고 있느냐 않느냐가 주요할 기준이 될 거라는 거였죠. 이런 기준 하에서는 사이보그도 인간일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인 시저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히어로.

 

혹성탈출은 다음 편이 계속 진행될까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단선적으로 풀어가지만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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