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특히 동양야구는 대단히 정교하게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지시가 나갑니다. 말 그대로 ‘1구, 1구’ 지시가 나갈 수도 있습니다. “치고 달리기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럴 시간이 있습니다. 야구와 축구는 다르니까요.

 

야구는 몇 초간 인플레이되면 다시 20~30여 초 인터벌이 이어지다가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남으로서 다시 몇 초의 인플레이 상황이 이루어지는 단속적인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됩니다. 20여 초의 인터벌에는 양팀 감독-코치-선수 간에 끊임없이 자잘한 의사소통과 지시가 오갑니다. TV중계를 잘 보시면 타자가 잠시 방망이를 고쳐잡는 몇 초 사이에도 얼른 벤치(혹은 1·3루 코치) 쪽을 쳐다보는 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거의 순간이죠. 하지만, 그 순간에 다음 공에 대해 번트를 할지 강공을 할지 버스터를 할지 힛앤런인지 런앤힛인지 등등이 전달됩니다. 타자에게 전달된 내용은 주자에게도 전달됩니다. (어쩌면 상대편 작전을 - 실시간으로 - 파악한 내용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공격 측이 그러는 동안 수비 쪽은 더 바쁩니다. 주자가 나갔다든가 경기말 긴박한 상황에서는 벤치에서 1구, 1구 볼배합이 나갑니다. 역시 중계를 유심히 보면 인터벌 중간에 포수가 벤치 쪽을 쳐다보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기본적인 볼 배합 사인 나갑니다. 감독 혹은 투수코치가 내죠. (필요하면 3루 코치 등을 통해 연계 전달됩니다.) 그럼 포수가 (투수 외에는 볼 수 없도록) 가랑이 사이로 손가락 펴서 변화구 or 직구, 높게 or 낮게, 안쪽 or 바깥쪽 등으로 볼배합 교환합니다. 그럼 투수가 주자에게 사각이 되도록 포수 쪽 어깨에 손가락을 놓고 답신 보내죠. 고갯짓도 같이 OK or NO!

 

3루 코치가 가슴, 머리, 어깨를 복잡하게 만지는 사이에 진짜 사인 하나를 섞어 보내고, 투포수 간에 의견을 나눌 때도 2루 주자(포수 가랑이를 볼 수 있는)나 타자(투수의 메시지를 볼 수 있는) 한쪽의 시각에선 메시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도록 구성합니다. 포수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고 변화구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 투수가 뭐라고 답신했는지도 알아야 온전한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인으로 전달이 곤란한 지시들은 직접 코치-감독이 마운드를 방문하든가 포수나 타자가 벤치로 가서 받아옵니다. 이것도 자주 하면 심판이 제지하므로 파울볼 받으러 갈 때, 방망이나 장비교체 할 때 등등의 핑계가 생길 때마다 얼른 벤치를 들러서 오게 되죠.

 

사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느냐는 팀마다 극비입니다. play by play로 수백 가지 조합의 사인이 나가므로 이것을 공유하는 게 경기 전에 이뤄지는 팀미팅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경기에 집중 안하고 멍때리는 선수는 사인을 놓치거나 사인을 온전히 해독하지 못해서 개그플레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 실수를 한 선수는 다음 플레이 때 교체됩니다.

 

볼배합 사인을 내는 것 외에 각 야수의 수비위치도 타석마다 혹은 주자상태에 따라서 혹은 볼카운트에 따라서 조정합니다. 타자가 강타자면 외야수는 뒤로 가야 하고, 당겨치는 좌타자라면 모든 야수가 우익 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야구 한 경기에서 양 팀 투수들은 합쳐 250~300구 정도를 던집니다. 즉 같은 횟수의 인플레이(및 인터벌) 상황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죠. 그때마다 양팀 벤치는 바쁘게 작전을 주고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수를 믿고 맡기거나 따로 작전을 낼 필요가 없는 유유자적한 (혹은 죽은) 이닝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각 팀 감독들은 한 경기 치를 때마다 최소 100번 이상 크고 작은 결정들을 하고 작전을 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별 관계없나?) 야구 감독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볼만한 직업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몇 시간 동안 고도의 집중력으로(그가 무의식적으로 모자챙 한 번 건드리는 게 야구 경기 흐름에는 하나하나 작전이 되죠) 끊임없이 수 십명의 인원을 실시간으로 조율하고 수 백의 의사결정을 내리며 경기를 운영해나가는 그 '묘'가 인간 지성의 이상적 발현처럼 보인달까.

 

 

p.s. 현재 벤치에 디지털 기기 반입을 금지하고,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전달할 수 없도록 한 건 사인 훔치기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20여초 혹은 투포수 의견 교환한 후의 몇 초 사이에, 공격팀 주자, 각 루의 코치들, 외야석의 (비밀) 분석원, (고성능 카메라와 분석장비로 무장한) 본부석 분석원, 벤치, 타석의 타자 사이에 순식간에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설마 그게 가능하겠냐 싶지만 … 평생 밥 먹고 그거만 한 사람들이라 가능합니다. 디지털 기기 반입 금지는 그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1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11172
32041 [바낭] 줄임말에 대한 개인 경험 [11] Ripa 2011.08.19 2057
32040 미숫가루, 물에 타서 드시나요, 우유에 타서 드시나요? [31] 잠시만유 2011.08.19 11834
32039 [바낭성 질문]10만원 안쪽으로 블루투스 헤드셋 또는 이어폰을 사려고 하는데요 [3] 라인하르트백작 2011.08.19 1293
32038 정체불명의 괴사진 [16] 곽재식 2011.08.19 3367
32037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요 [1] 감동 2011.08.19 884
» 사실은 1구, 1구 지시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5] haia 2011.08.19 1535
32035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남녀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스포일러) [5] 김리벌 2011.08.19 1954
32034 눈 주위 알레르기 치료된 경험 있으신 분..? 밀가루 음식을 끊어야 하나요.. [9] 이소란 2011.08.19 6692
32033 [바낭성 질문]아이폰 이용할 때 아이튠즈 계정을... [1] 라인하르트백작 2011.08.19 800
32032 무상급식투표 준비하던 공무원이 과로사했다네요 [7] 꽃개구리 2011.08.19 2913
32031 일본에 또 강진이 일어났나봐요 [1] monsterRachel 2011.08.19 1725
32030 탈놈탈!!!! 탈놈탈!!!! [4] 꼼데 2011.08.19 1470
32029 요즘 플래시게임 하나요? [2] 아.도.나이 2011.08.19 926
32028 프로야구 잔여경기 일정 [8] 제주감귤 2011.08.19 1562
32027 멋진 안경테 파는곳 아시는분? [3] 트리우즈 2011.08.19 1839
32026 신발사이즈 잡담 - 전 종이에 그린 자기 발 크기가 신발 사이즈 인줄 알았어요...;; [13] 라곱순 2011.08.19 3170
32025 레인보우 - A(일본어 버전) MV [5] 탐스파인 2011.08.19 1585
32024 우리는 왜 영화에 매료되는걸까요? [7] 사람 2011.08.19 1250
32023 [듀나인] 소포클레스 국역본 [10] 김리벌 2011.08.19 1088
32022 착하지만 싫은 친구 [6] dl 2011.08.19 338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