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혼분식, 꽁당보리밥의 노래

2012.01.02 19:09

LH 조회 수:3945

대통령 영부인이 책을 낸다며 죄없는 출판사 하나를 쥐잡듯이 잡았나 봅니다. 그 중 하나 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으니, 영부인께서 혼분식을 권장하셨다네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한 40년 쯤 묵은 오래된 바람이 대뇌피질 구석구석을 스치는 듯 했습니다. 우와 올드해. 지금이 2012년입니까, 아니면 1970년입니까?
지금은 아마 혼분식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옛날 옛적, 1970년대 초, 한국은 심각한 쌀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농업국가였습니다만. 낮은 농업생산량으로 많은 쌀을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지요.
그러면 나오는 소리 또 있지요. 외화를 절약하고 쌀의 자급자족도를 올리기 위해 등장한 것이 혼분식 권장(이라고 쓰고 강제라 읽는) 이었습니다.

뭐, 간단합니다. 쌀을 덜 먹고 보리, 잡곡, 그리고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자는 것이겠지요. 우리나라가 쌀을 마니마니 생산해서 외국쌀을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그 날까지요. 그런데 권장만 하면 안 듣겠다 싶었는지 군사정권은 - 아주 범국민적인(이라고 쓰고 강제라 읽는) 캠페인을 합니다.

 

좀 나이드신 분들은 겪어보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도시락 검사 말여요.
학교에서 점심 시간 땡땡땡 되면 학생들이 부리나케 도시락을 꺼내 먹는 게 아니라... 펼쳐놓고 기다립니다. 그럼 선생님이 죽 돌아가며 밥 검사를 했지요. 그거마저 귀찮은 선생님들은 새마을부장(...)에게 시키기도 했습니다. 밥은 30% 이상의 잡곡을 함유한 밥이어야 했습니다. 보리나 조, 감자나 옥수수 등등. 만약 쌀만 가득하면 그 학생은 야단을 맞고 빳다 맞고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심지어 도덕점수에서 까이기도 했습니다. 건전가요 혼분식 송 마저 만들어져서 부르게 되었지요.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뭐 이 정도로요.
각종 백화점에서는 혼분식 모범 도시락을 전시했고. 이를 통해 쌀을 얼마나 절약하고 있는지를 늘상 떠들어댔지요.
같은 일을 공무원도 당했지요. 어디선가, 시골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이 오셨는데 그 날이 토요일이라 쌀밥을 대접 못하고 짜장면을 사드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네요. 이전 쌀밥이란, 그만큼 호사와 편안함의 상징이라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욱 아쉬웠겠지요.

 

수요일, 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 한 마디로 쌀 없는 날이었습니다. 모두 꽁보리밥을 싸오거나 했고, 아니면 짜장면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음식점에서는 쌀밥을 파는 게 금지되었습니다! 팔면요? 걸리죠! 심지어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 뿐만이 아니라, 주방의 밥 마저도 단속하려고 했습니다.

하여, 언젠가의 커피처럼 검문도 일상화되었습니다. 손님에게 쌀밥을 내놨다는 이유로 적발되고 몇 달 씩 영업 정지를 먹은 음식점들이 수두룩했고, 그들의 명단은 신문에 공개되었습니다. 개인이 음식을 파는 것에는 혼분식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금지를 하려고도 했습니다. 아무튼, 너무 단속할 대상이 드넓고 많다보니 특별히 단속인원을 추가하기도 했지요.
재미있는 건 이 당시 혼분식을 앞장서서 실천한다고 칭찬을 받은 가게가 바로 종각에 있는 한일관이라는 것. (이젠 낡아서 다른 데 이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 외에도 쌀이 들어가는 각종 식품들 - 과자, 엿을 만드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 막걸리나 소주를 쌀이 아닌 밀가루로 만들어본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참 맛있을 거 같지요?(...)
여기에 흰 쌀밥만 먹으면 대뇌피질 어쩌고 해서 머리가 나빠진다는 근거가 참 애매한 유언비어가 당당히 학생지도서에 실리기도 했지요. 뭐 각기병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혼분식 정책도 참 오락가락 했다는 것.
먼저 외국인을 동반하고 음식점에 가면 쌀밥을 사먹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청와대의 높으신 분들도 혼분식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말고도 웃을 수 없는 촌극도 있었으니, 1978년 농림수산부는 올해 쌀이 풍년이니 쌀밥을 권장해라, 라고 문교부에 전달했습니다. 문교부는 생깠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 해에는 흉년이 들어서 농림수산부는 올해는 혼분식 권장 ㄱㄱ라고 알립니다. 그러자 문교부는 무슨 정책이 오락가락 하나며 버럭 화를 내며 버팅겼습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 특히 그곳에서 어떤 종류로든 음식파동을 겪어보신 분들은 정말 웃으실 수 없을 겁니다.

 

이렇듯 세상은 혼분식 문제로 아주 오랫동안 다툼을 겪어왔습니다.
선생님 눈을 속이기 위해 익한 보리쌀을 쌀밥 위에 깔고, 선생님은 그걸 또 눈치채서 숟가락으로 파헤쳐서 뒤져보는 - 톰과 제리의 추격전은 교실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쌀의 생산량이 안정된 것은 바로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통일미의 생산이었지요... 이거 역시 할 말이 많긴 한데. 아무튼 이 조치로 인해 그동안 천대받던 라면이 국민 음식으로 크게 발돋움한 계기가 되기는 했죠. '칼로리 높은' '고기가 들어간' 밀가루 음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지금이야 뭐, 잡곡밥이 섬유질도 있고 혈압도 낮춰준다는 각종 기기묘묘한 효능들이 있어 일부러 찾아 먹습니다만... 그런데 그거 있잖아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억지로 하라고 하면 되게 하기 싫어하는 것. 잡곡밥이 아무리 건강에 좋다곤 하지만, 먹을 때 식감이 좀 거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싫은 사람도 있었겠지요.
또 당시에 정말 가난한 사람들, 특히 농촌에서는 많이들 잡곡을 먹었습니다. 원래 혼분식은 돈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건강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결국 무미일은 1976년에 폐지되었지요. 이후로도 혼식권장은 계속 이어지다가... 이젠 쌀이 너무 많아 각종 아이디어가 나오는 지경까지 되었네요.

 

이제 혼분식이란 정책을 들을 때 마다 뜨억스러운 까닭은- 나라가 밥상에서조차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거 옛날 속담에도 있잖아요, 남의 제삿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고. 그렇게 참견하는 건 언제 누구 어느 때라도 얄밉기 마련인데, 밥을 뭘로 먹으라고 나라가 정해서 들이밀어준단 말입니다. 그것도 30%라는 비율도 정해서. 어차피 가난한 사람이라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식비를 줄이기 위해 잡곡밥을 먹었습니다. 당시 설문조사만을 봐도 그랬지요. 그 때는 밥 조차 맘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무슨 자유가 있겠어요? 이렇게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것 부터가 제가 그 시대를 살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겠지만. 당시 혼분식을 겪어본 사람들의 회고담을 보면 그 때가 즐겁고 보람차기 보다는 그렇지 않은 내용들이 더 많아보입니다. 나라가 밥 한 술 뜨는 데도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한 것인데, 그게 얼마나 즐거운 기억이었겠어요.

과연 지금의 영부인이 주장했다는 혼분식이란 몸에 좋은 웰빙일까요, 아니면 1970년대의 30% 잡곡밥일까요? 웬지 후자일 거 같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출판사에 뭐 그렇게 간섭을 해대며 짤짤 흔들어대었겠어요. 이제는 역사책에 "혼분식 장려"라고 간단하게 적힌 그 사건이 진행될 때 그랬던 것 처럼 말입니다.

이런 조낸 올드한 감성을 접할 때 마다, 그리고 부조리함을 느끼고 고개를 저을 때 마다 제가 아직은 그렇게까진 늙지 않은 듯 해서 소심하게 기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 : 댓글이 안 달립니다.. 했더니 이제 달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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