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보다 더 위험한게 물타기죠

2013.05.24 12:25

큰거북이 조회 수:2400

일베가 어느날 갑자기 생긴게 아닙니다. 정사갤, 합필갤을 위시한 디씨의 전라도혐오+반민주당 책동의 연장선상에 있죠. 자칭 애국보수들이 '빨갱이가 장악한 인터넷에서 총반격하자'고 갑자기 으쌰으쌰 힘모아서 만든 세력이 아니에요. 나름의 유구한(?) 흐름이 있습니다.


디씨 자체가 완전히 시들해지고 컨텐츠 생산력도 상실해서 발길 끊은지 오래라 요즘도 그러고 노는지 모르겠는데.. 일베가 부상하기 전까지 소위 정사충들의 행태나 온갖 합성사진과 플래시 애니메이션들이 만들어졌던 걸 보면 지금 일베에서 하고있는 짓거리가 이미 그때 절정을 쳤습니다. 5.18 간첩폭동 타령이니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능욕 죄다 그 시절부터 폭발적으로 양산됐죠. 


그런데 일베와 디씨 꼴통들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확장성이겠죠. 디씨의 경우 계엄군의 광주학살을 홍어를 말린다는둥 전장군의 땅크가 어쩌고 하는 개소리들이 밖으로 뻗질 못했습니다. 아, 침공해서 정복(?)에 성공한 예가 하나 있긴 하네요. 이글루스요. 그 외엔 그냥 그 안에서 낄낄대고 노는 정도였지, 애초에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너무 질이 나빠서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어요. 다만 디씨 자체는 완벽하게 오염됐죠. 도대체 정치나 역사랑 무관한 스타크래프트 갤러리같은데서도 아무렇지 않게 전라도 탱크드립이 횡행했으니까요. 청정갤 드립으로 쉴드를 치는데, 딱히 청정갤과 오염갤이 나눠진게 아니라 '사람이 많은 갤러리'는 다 그 모양이었습니다(리즈시절 스갤의 화력이야 아는 사람은 다 알죠)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몰랐을 뿐이지, 치가 떨리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양산됐어요.


근데 일베는요? 글을 여러번 썼지만 일베충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정색빨고 토론하는게 아닙니다. 개중에는 사료를 찾아서 논거를 대는 성실한 부류도 있지만(물론 수법이야 뻔하죠. 취사선택+아전인수) 어린애들에게 강렬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건 모든 오물투척을 재미난 유희로 포장했다는데 있죠. 진지한 일베충, 신념(?)으로 무장한 일베충이란건 원래 흐름에서 생겨난 부산물에 불과하고, 선후인과가 전도된 겁니다. 일베에 대해 일부드립이 거짓말이고 '보수 커뮤니티'라는 정체성이 허구라는 증거가 이겁니다. 


사람을 설득한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인격과 사고를 오염시키자면 놀이로 접근하는 것 만큼 효과적인게 없습니다. 사람이 조갑제나 지만원처럼 망가질 수는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란건 저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놀이가 되면 그 모든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죄책감도 없습니다. '씹선비 정색빠네'한마디로 모든 진지한 반발이나 논의가 무마되고, 더 자극적이고 더 악랄할수록 격려받는 놀이문화 속에서 오염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조직적 배후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문에 듀게에서조차 이명박 촛불시위 드립을 치며 격렬하게 반응하던데, 사실 그런 의혹이 왜 나오는지부터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체계적이거든요. 그저 찌질이들의 자연발생적인 장난이라기엔 말이죠. 진지하게 논거를 대며 궤변을 일삼는 성격의 커뮤니티라면 딱 그 안에서 논의가 돌고 확장이 안됩니다(그런 사이트는 비단 극우뿐만 아니라 좌파쪽에도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일베만은 그렇지 않았죠. 역사적 사실을 심지어 언어 그 자체를 오염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 구사되고 그건 엄청나게 먹혀들었어요. 스물몇살 먹은 여자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서 민주화드립을 칠 정도로 진행이 됐으니까요.


일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중 하나인 전라도혐오와 여성혐오라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자야 역사 자체가 유구한 것이고 후자는 욕구불만 찌질이 젊은 남성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거니까(일베타령 이전에 남vs여 구도의 치졸하고 구역질나는 논의들은 그토록 일베를 혐오하는 엠팍에서도 다반사로 등장합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커뮤니티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랄 수 있죠. 큰 커뮤니티에는 별의 별 인간이 다 모이는 법이고, 별의 별 소리가 다 나오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이슈가 된 5.18 문제처럼 역사 그 자체를 공격하고 왜곡하며 그걸 대중의 인식속에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프로세스는 저절로 생겼다기엔 너무 치밀하고 질이 나쁩니다. 


특히 위험한건 그런 전술의 타겟이 '애들'이라는 거죠. 교육현장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고.. 애들의 언어가 오염되고 애들의 인식이 왜곡되고 애들이 책동에 동조하면 정말 미래가 없습니다. 정색빨고 토론하는 문화로는 애들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부담없이 다함께 웃고 떠들며 즐기는 놀이가 애들을 한패로 만듭니다. 생기는 대로 욕망을 배설하고, 나오는대로 말을 지껄이고, 옳고 정의롭다고 교육되는 가치를 근본에서부터 전복시키는 '짜릿한 유희'의 중독성은 대단하거든요. 옛날 엽기문화가 유행할때의 인터넷 반골성향이란건 '지금의' 권위에 도전했지만, 일베충의 놀이문화의 타겟은 '가치' 그 자체입니다. 학교에서도 제대로 안가르치니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민주주의가 중요하고 독재가 나쁘다고 주워들으면서 자랐는데, 어라? 그게 다 거짓말이고 빨갱이 간첩의 책동이라고? 남녀평등 남녀평등 해서 말은 못해도 은근히 불만이 있었는데 뭐? 계집들은 다 보슬아치고 한국여자들은 전세계에서 제일 악질이라고? 똑같은 인종 똑같은 민족 똑같은 말을 쓰는 같은 나라 사람인데, 뭐? 한반도 서남부에 빨갱이들에 동조하는, 남 뒤통수 잘치고 비열한 족속이 살고 있다고? 우와!


한마디로 일베라는 사이트가 벌여온 짓,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대단히 위험하단 얘깁니다. 이 한마디면 될것을 장황하게도 썼네요. 


물론 한쪽으로 우르르 쏠리는 듯한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반감을 느끼고 거기서 왠지 가운데(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서야 내가 잘나고 이성적으로 보일 거 같다, 라는 흔한 심리는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물타기 양비론으로 잘난척하고 회색지대에서 거들먹거려도 될법한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습니다. 일베는 후자에요. 특히 역사 자체에 대한 공격은 적성국 공작원의 테러 이상으로 체제 그 자체에 대한 위협입니다. 북한 간첩얘기에는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애국자가 되서 주먹을 불끈 쥐면서, 정작 외부도 아닌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체제에 대한 공격에는 어찌 그리도 관대해질 수 있는지요. 민주주의 정체 하에서 관용과 대화가 가능한데, 민주주의 정체 자체를 난도질하는 작당에 대해서 어떤 관용이 가능합니까? 쓰레기통에서 꽃피우듯 독재 물리치고 민주화 이뤘다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민주항쟁 자체를 간첩폭동으로 만드는 책동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 뒤로 숨을 수가 있을까요? 한 국가 안에서 통합은 고사하고 마치 나치의 우생학처럼 '특정 지역의 혈통'이 인격과 행위를 결정한다는 믿음이 관용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까? 이런 모든 극악무도한 사고가 유희의 탈을 쓰고 재생산되서 애들부터 오염시켜나가는 전술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어떤 인터넷 사이트가 용납될 수가 있나요? 사람들이 들어가보지도 않고 들어갈 수도 없는 적국의 유치찬란한 체제선전 사이트는 무섭고 혐오스러운데, 정작 내부에서 고름을 흘리며 썩어들어가는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나요?


옆나라에서 침략전쟁 정당화한다고 '와 저 나라 국민들 역사의식은 큰일이네 자라나는 세대가 뭘 배우겠어'라며 혀 차고 경멸할 처집니까 지금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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