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1 23:30
일대종사
듀게에서 왕가위를 좋아한다면 꼭 극장에서 보기를 바란다. 는 글을 보고 네, 극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계속 젖어있는 기분이었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몇번을 탄식하며 봤습니다.
아마도 영화는 분명 많은 부분을 편집한 것 처럼 보입니다. (동사서독처럼) 하지만 정말 화면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그 정서는
너무 아름답더라구요. 특히 마지막 장쯔이의 모습들. 엽문에게 뒤늦은 고백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 표정만으로 납득가는 장면이었어요. 왜 왕가위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해했습니다.
끝
마치 영화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요즘 문득 깨닫는 사실입니다. 스무살 무렵에는 모두 시작이었는데, 요즘에는 시작보다 끝이 많아요.
그것이 관계이든, 영화이든, 하는 일이든지 간에, 이미 예전에 끝났거나, 바로 지금 끝나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의 끝은 후련하고, 어떤 일들의 끝은 섭섭하며, 또 어떤 일들의 끝은 허전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이가 들었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끝이 납득이 가요. 허무하기도 하고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는 증거니까.
예전에는 가까웠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더이상 인사 조차 나누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도저히 왜 그런 아이와 가까워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데, 철없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옆에 두다가 결국에는 관계가 파한 경우가 생기더군요. 오늘 우연히 횡단보도에 서있다가
오른쪽을 보니,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저는 그냥 곧바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고,
끝이 좋지 않았죠. 하지만 아이러니 한 것은 그때 제가 입고 있었던 옷은, 몇 년 전 그 친구가 생일선물로 주었던 자켓이었죠.
제법 오랫동안 미움과 증오. 분노, 상처 에 시달렸고, 몇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나에게 주었던 실망과 작은 말들은 모두 화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것만 봐도 상처자국이 욱신욱신 하니까. 그 친구의 얼굴을 마주칠때마다 무심히 지나치면서 욱신거리며 욕을 뱉고 싶었는데,
오늘 일대종사를 보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라고 생각하며 극장을 나섰습니다. 이미 영화는 끝났고 관계도 끝났고, 또
저도 모르게 다가오는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상처의 욱신거리는 기억도 끝이 있겠죠.
끝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아마 이것이 제가 20대에 배운 유일한 교훈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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