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과 쉬볼레스

2010.10.22 00:27

마르세리안 조회 수:2399

0. 사실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 - 더 정확히 말하면 무신론자에 가깝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성경을 읽곤 합니다. 물론 어느 때는 한 두 쪽 길어야 수십쪽의 짧은 분량이긴 합니다. 제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살아남은 책에는 뭔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죠. 사실 고전이라는게 별 거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 중에서도 싸이코패스도 있었을 테고. 별 뻘소리 다하는 사람도 있었겠죠. 그들이 쓴 온갖 궤변들도 있었을테고요. 고전이란 그런 궤변들 사이에서 '그나마 이건 좀 읽을 만 하고 배울 만하다.' 라고 생각된 구절들이 내려와 정착된 케이스라고 봅니다. '걸러진' 거죠.  물론 그 고전은 당대의 상황에 맞게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가 이를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번역' 이 필요합니다. 동양 고전으로 이름 높은 논어도 마찬가지고 성경 역시 이와 다르지 않지요. 제가 기본적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는 '믿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 입니다.

 

1. 하나의 광풍이 지나갔습니다. 북한의 3대 세습이 공식화 되던 날. 많은 사람들은 비야냥과 비판을 쏟아냈지요. 그 중 민주노동당은 대변인의 성명으로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로 보는 것이 남북관계에 바람직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라고 맹공을 퍼부었죠. 여기저기서 갑론 을박이 벌어집니다. 민노당의 태도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정희 대표가 말했고. 경향신문의 이대근 논설위원이 재반박했습니다. 민노당에게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논리와 이를 강요이자 보안법의 망령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치열해졌죠. 그 중에는 뜬금없이 3대 세습을 옹호하는 발언을 쏟아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치열하게 붙은 이후 다시 기억에서 잊어 버렸습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답죠. 하지만 잔상은 남습니다. 민노당은 종북주의 정당이라는 편견. 또는 진보세력의 매카시즘이라는 선글라스. 편견과 오해가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완전히 상황이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뜬금없이 이 문제를 제가 다시 들고 나와 보는 이유입니다. 물론 저 역시 하나의 편견과 아집일 뿐 완벽한 의견을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엔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많은 생각꺼리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2.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성경을 읽어보신 분. 그 중에서도 구약 성서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쉽게 기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설명할 '쉬볼레스(shibboleth)' 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을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비종교인이지만 제가 무식을 무릅쓰고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으로 유대인을 이끌고 들어간 후 -정확히는 여호수아겠지만요- 유대인들은 12지파로 나뉘어집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 그들은 서로 반목하고 살해하고 복수하지요. 점차 '종족화'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나뉘어진 종족 중에 길르앗 족과 에브라임 족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전쟁을 벌였지요. 승리는 길르앗 족에게 돌아갔습니다. 에브라임 족은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길르앗 족은 후환을 두려워 해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겉으로는 구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으니까요. 방법은 단 하나 에브라임 족은 '쉬볼레스'의 '쉬'를 발음하지 못했습니다. 길르앗 족은 에브라임 족 패잔병들이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초소를 세우고 모든 이들에게 '쉬볼레스'를 발음해 보도록 시켰습니다/ '쉬' 발음을 못 한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렸죠.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렇게 죽어간 이가 4만 2천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3. 민노당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며 저는 문득 이 '쉬볼레스'라는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민노당을 향해 쏟아지는 '입장표명'의 요구는 이 시대의 '쉬볼레스'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민노당의 처음 입장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의견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땅위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되었다 말하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민노당은 ' '말하지 않을 자유'를 사용한 셈입니다.  과연 이것이 민노당이 종북주의로 비판받을 이유일까요. 진보신당의 성명/논평을 보면  민노당의 성명과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신당 역시 북한의 이번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민노당의 의식 수준과 별다른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둘 사이의 간격은 민노당은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이고 진보신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 한다.' 정도의 방점입니다. 민노당은 우직한 셈이고 진보신당은 세련된 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노당에게 화살을 던집니다. 너도 종북주의이지? 라면서 말이죠. 그들에게 왜 '쉬볼레스'를 말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과 진배없죠. 너는 북한 3대 세습 비판이라는 문장이 '쉬볼레스'로 치환되었습니다. 민노당은 '쉬볼레스'를 말하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로 의심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4. 저는 이 이후 민주노동당의 구성원이 내놓은 3대 세습에 대한 평가를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노당의  처음 성명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단순히 '나는 말하기 어렵다.'의 수준입니다. 형법에 비유하자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왜 말하기 어려워? 니가 그쪽 편이라서 그런거 아냐? 아니 어떻게 그쪽 편이라고 말할 수 있어? 당장 사과하고 반대라고 말해!' 라는 논리로 확장한 사람들은 경향신문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사람들입니다. 물론 보수진영도 가세했지요.  아니 이 게임은 먼저 보수진영이 시작한 거라 해도 무방합니다. 거대 언론의 사설에 뒤이어 경향신문의 사설이 나왔으니까요. 민노당이 보안법의 망령이라고 반발하고 경향신문에 대한 절독 운동까지 벌이는 것을 이해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거대한 게임 앞에서는 어떻게 대답해도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유리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해도 문제는 생깁니다. 민노당의 입장에서는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 가장 유리한 선택입니다. 실제로 민노당은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5. 그런데 우리는 그런 민노당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온라인 상에서 오프라인상에서 민노당에 대한 비판이 압도적이었던 것이 증명합니다. 민노당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짜부라졌고, 니도 종북주의냐? 라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왜일까요. 전형적인 '내 편 아니면 다 적'  논리에서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요.  '묵비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구린게 있으니 입닫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일반 시민의 형사법 인식 수준이 국제관계에서도 확장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민노당은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요.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시민의식이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6. '쉬볼레스'는 나와 다른 이를 죽이는 용도로도 사용되지만 나와 같은 이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저는 쉬볼레스라는 단어에서 또다른 기능을 발견합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쓰여지지 않았던 기능이지요. 바로 '의사표현'입니다. 쉬볼레스를 발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지 않는다면, 즉 쉬볼레스와 '시볼레스'를 동시에 인정할 수 있는 사회라면 쉬볼레스라는 뜻은 한 집단. 한 사회. 더 나아가 정치적 의사표현을 비유하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각자 가지는 정치적 지향을 최대한 모은 '정당'이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즉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들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민주주의 사회가 굴러가는 최소한이 완성됩니다. 즉 모든 정당은 각자의 '쉬볼레스'를 명확히 발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기 위해서는 나의 쉬볼레스와 다른 이의 쉬볼레스가 다르다 하여 죽고 죽이는 체제가 완성되지는 않아야 겠지요. 그래야 개개인의 목소리가 뚜렷해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최선의 방안'을 찾아 낼 수 있지요.

 

7. 그렇다면 민노당의 '쉬볼레스'는 무엇인가요. 적어도 3대 세습에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소리'는 무엇인가요.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말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문제가 격화되자 민노당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3대 세습에 대해 어느정도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당내 연구소의 부소장이 작성한 문건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입장이 있음에도 이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합니다. 정당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야 하는 문제를 회피하고 모른척 하려 합니다. '쉬볼레스'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쉬볼레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8. 민노당의 문제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로 남북관계의 경색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누가 봐도 옹색합니다. 정당의 정치적 의사표현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이고 의무입니다. 또한 민노당이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하여 북한이 크게 반응하리라 보기도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민노당은 스스로를 진보정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왕조체계로 나아가는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 행위는 진보정당의 '쉬볼레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순히 전략적 행위로 적당히 퉁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민노당의 '침묵'을 '동의'로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9. 그 원인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은 북한에 대한 인식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갈렸습니다. 진보신당은 적대적이었고, 민노당은 그보다는 우호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분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번 사건에서의 '침묵'은 '동의'로 간주되었고 그로 인해 형성된 '비판'은 민노당 내부에서 나온 발언들로 정당해 졌습니다. 민노당의 말하지 않는 자유가 억울함을 가리기 위한 묵비권이 아니라 자신의 본심을 가리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10. 저는 민노당의 본심에 대해 개인적인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옳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진보정당이 세습정치를 인정하다니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모순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를 숨기려 하는 민노당의 모습입니다. 본인들도 알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꺼내어 놓는다면 무수한 비판에 시달리고 지지율이 하락한다는 것을요. 그런데 상기해야 할 것은 민노당은 '정당'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즉 '쉬볼레스'를 가져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민노당은 그 의무를 포기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너 빨갱이지? 라는 두려움에서 아직 해방되지 못한 것 때문인건가. 아니면 지금 공개하면 문제가 확산될꺼라는 전략적 의사 결정에 의한 결과 인건지. 분명한 건 민노당은 정치적 의사표현이 분명해야 하는 즉 '쉬볼레스'를 해야하는 표현을 망설였습니다. 이건 아직도 우리가 '쉬볼레스'를 못하면 죽이는 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인걸까요. 아니면 민노당 내부에서 이것이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할 의견임을 알기에 알아서 피했기 때문일까요. 정답은 없을껍니다. 저 역시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민노당의 생각은 다수의 지지를 받기 어렵고, 이는 공론의 장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민노당은 이를 은폐했고 우리는 그것을 굳이 들춰내 민노당을 공격했습니다. 잘못은 누구한테 있는 걸까요.

 

11. 길게 돌아왔습니다. 어찌보면 제 의견은 단순합니다. 민노당은 3자 세습체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자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들은 쉬볼레스를 말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 안에서 민노당은 정당의 정치적 의무를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문제입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은 그들의 그렇게 하는 행동을 유추해 공격했습니다. 그 유추는 민노당의 자멸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런 세상에서 사는 셈입니다.

 

 

 

ps) 길게 중언부언하며 글 썼는데 참 제가 봐도 이해 안되게 썼네요.. 기회가 되면 압축시켜서 다시 한 번 써보겠습니다. 왜 이리 저는 간결한 논리와 압축적 문장이 안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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