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빙 Loving

2016.11.24 09:44

Q 조회 수:1106

러빙 Loving 


"당신들의 소송에 대해서 대법원 법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있소.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전해 주시구려."   


미국, 2016.      


A Raindog/Big Beach Films Production. Distributed by Focus Features. 화면비 2.35:1, 35 mm Panavision. 2시간 3 분. 


Writer and Director: Jeff Nichols 

Producers: Marc Turtletaub, Colin Firth, Peter Saraf, Sarah Green, Ged Doherty, Nancy Buirsky 

Cinematography: Adam Stone 

Production Design: Chad Keith 

Music: David Wingo 

Visual Effects Artists: Gary Pilkinton, Patrick Clancey, Gus Duron 

Dialect Coach: Samara Bay 


CAST: Joel Edgerton (리처드 러빙), Ruth Negga (밀드레드 러빙), Marton Csokas (브룩스 보안관), Michael Shannon (그레이 빌렛), Nick Kroll (버나드 코엔), Terri Abney (가네트), Will Dalton (버질), Sharon Blackwood (롤라 러빙), Alano Miller (레이몬드), Chris Greene (퍼시), Christopher Mann (테오), John Bass (폴 허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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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킹 쉘터], [머드] 그리고 최근의 SF 역작 [미드나이트 스페셜] 의 감독인 제프 니콜스는 아칸소 주 출신의 진성 남부인이지만, 그의 이때까지의 영화 속에서는, 은유적인 해석이 가능한 몇 가지 상황이나 모티브를 제외하면 인종 문제를 직접 다룬 적은 없었다. 그러한 그가 알라바마, 플로리다, 텍사스 등 미국 남부 13주의 인종차별적인 결혼 금지 법안을 대법원의 위헌판결을 통해 폐기로 이끈 1967년의 "러빙 대 버지니아주" 소송의 당사자인 백인 남성-흑인 여성 커플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고 들었을 때는, 올 것이 오는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크게 기대를 부풀렸었다. 니콜스처럼 독특한 상상력과 차분한 기질, 그리고 남부에서 자란 백인 예술가라는 정체성과 스스로 씨름해온 역정이 필르모그래피에 역력히 반영되어 있는 영화인이 이러한 주제를 다룬다면, 반드시 TV 드라마적으로 뻔한, 최루성 멜로드라마가 아닌 무엇인가 새로운 시도를 해 보여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검은 배경에 아무런 특이함도 없는 타이틀이 깔리면서 영화가 시작되면, 아일랜드계 이티오피아인인, 초인간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여배우, 루스 네가의 거대한 눈망울과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화면 가득하게 클로즈업된다. 그녀의 얼굴 위로는 불안, 기대, 희망등의 감정이 겹쳐 지나간다. 이윽고 네가가 연기하는 밀드레드가 말한다. "나 임신했어." 화면은 이어서 거의 하얗게 보이는 금발머리를 짧게 깎고 가늘게 눈을 떠서 찌푸린 것처럼 보이는 30대의 건장한 백인 남성을 비추고, 그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는다. 화가 난 것인지, 걱정이 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찌푸린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에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몇 박자 박동이 계속될 정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부끄러운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퍼진다. "좋은 소식이네. 좋다구." 


내가 가끔 쓰는 VUDU VOD 서비스에는 공식적 예고편 말고 영화의 처음 2분을 공짜로 틀어볼 수 있는 "2분 프리뷰" 기능이 있는데, 나는 이 기능을 예고편보다 훨씬 선호한다. 어떤 한 편의 영화가 절대적으로 감독의 통제하에 있는지, 그리고 그 감독이 이 한편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며, 어떤 형태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여부는 대부분 처음의 1-2 분으로 판가름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몇 분 동안이 완전히 구리거나 꽝인데 중반부쯤 가서 만회하는 영화들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러빙] 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백인 리처드와 흑인 밀드레드가 깊이 사랑에 빠진 채 밀드레드의 가족, 친지 그리고 친구들로 구성되는 흑인 공동체에서 커플로 관계를 유지하는 중간에 곧장 진입한다. 영화는 그들의 관계의 기원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밀드레드의 가족이나 그들의 친구 중 누구도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상하다거나 문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 둘이 결혼을 생각하게 된 이유도 임신 즉 속도위반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였다. 다시 말해서, 니콜스 감독은 이 두 사람의 인종을 초월한 관계를 드라마의 중심에 놓고 있지 않다. 당사자들에게 이 관계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동네와 집안이라는 공동체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의 삶에 있어서 인종차별에 기초를 둔 결혼 금지법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는 것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에 족쇄를 치우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를 훨씬 넘는 거리를 워싱턴 디시까지 운전해 가서 결혼을 성사시키고 돌아온 러빙 부부가, 오밤중에 군 보안관에게 갑자기 체포되는 시퀜스에서, 보안관 브룩스는 리처드를 경멸과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면서 말한다. "너 같은 무지렁이는 모르겠지, 참새는 참새끼리, 울새는 울새끼리 같이 살아야 되는 거라는 걸 말야." 니콜스의 작품에서 남부의 인종 차별주의는 특정한 "나쁜 놈들" 에 의해서 표상되는-- 그래서 어떤 "투사" "열사" 들의 영웅적 "운동" 에 의해서 파타되어야 하는-- "정치적 이념" 이 아니고,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백인 남자들의 머리들 속에 이미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구조적인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이 단순히 민권운동에 의한 법률상의 몇 번의 승리로 삭아 없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세상일을 모르는 나이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죽일 놈들의 백인 악당" 들이 나오지 않는 이 한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설파한다. 


직접적으로 인종 차별 문제를 후벼파지 않고 이 커플의 우직하리만치 순박한 삶에 오로지 집중하는 니콜스 감독의 비 전략적인 선택은, 그래서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답답하거나 거꾸로 "현실감이 없어" 보이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헐리웃이나 한국 영화의 과격한 감정 표현 레벨에 익숙한 관객들이 리처드와 밀드레드 역을 맡은 두 연기자들의 밀도 높은 연기의 우수함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관객 분들께서는 이 한편을 보실 때에는 호흡 조절을 처음에 하시고, 웬만한 한국에서 만든 "독립영화" 보다도 훨씬 느리고 조용한 리듬으로--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의 "느림" 과는 완연하게 다른 종류의 그것이니까 그 점에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빈다-- 영화를 받아들이실 준비를 하고 나서 보시길 충고드린다. 


니콜스 감독이 우리에게 풀어서 보여주는 "생활사적" 인 리듬과 톤-- 미장이일을 하는 리처드가 평행을 측정하는 방울이 들어있는 잣대를 자신이 쌓아올리는 벽돌에 올려놓고 체크할 때의 집중된 얼굴, 조금씩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의 메아리, 그리고 흐리게 지직거리는 싸구려 텔레비전 화면에 찍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얼굴 등, 일상생활의 파브릭에 잉크가 번지듯이 침투하는 사회 변화의 징조 등-- 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어 관람하면, [미시시피 버닝] 처럼 실재하지도 않았던 영웅적 FBI 요원들을 만들어서 "감동적인 서사" 를 만들어나가는--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역사영화" 가 아무런 의문 없이 취하고 있는-- 접근방식이 얼마나 인공적이고, "진실" 에서 오히려 멀리 떨어져가는 해석의 행위일 수 있는지 새삼스럽게 재고할 수 있으리라. 


니콜스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디 앨런의 코메디를 비롯한 주류 헐리웃 영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한 스테레오 타이프인 "야심 많고 말이 많은 유태인 변호사" 라던가, [타임] 지에서 러빙 부처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파견된 약간 4차원스러운 사진 기자 그레이 빌렛과 같은 "아웃사이더 프로페셔널" 의 묘사도 섬세하게 바꿔놓는다. 두 사람의 버지니아 주 정부에 맞선 소송을 맡게 된 ACLU (미국 민권자유옹호 조합) 의 젊은 변호사 버나드 코엔은 마치 코메디언 존 로비츠처럼 생긴 닉 크롤 연기자가 맡고 있는데, 이 캐릭터의 다소 주책이면서도 열성적인 행동거리가 숨통을 트게 해주는 유머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여느 영화 같았으면 이 역할에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노장 스타배우를 기용한다든지 해서, 법정 드라마로 중심이 확 쏠렸을 터인데, [러빙] 에서는 대법원의 웅장한 모습을 카메라가 한 번 보여주고는 그걸로 끝이다. 심지어는 리처드와 밀드레드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판결에 참관을 하지도 않는다. 두 커플이 판결이 끝난 다음에 친지들과 가족에 둘러싸여 감격의 포옹과 눈물을 쏟아내는 그런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아마 여기까지 읽었으면 예상하셨겠지만, 당연히 없다. 


감독의 모든 영화에 반드시 출연하는 든든한 협력자인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빌렛은 불과 몇 장면 나오지 않지만, 그가 두 커플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온갖 재미있는 (아마도 허풍이 좀 섞인?) 얘기들로 두 사람의 경계심을 허물고, [앤디 그리피스 쇼]를 보면서 아내의 장딴지를 베개삼아 누워서 허물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리처드와 밀드레드의 초상을 사진으로 찍어내는 경과를 보면, 이 캐릭터야말로 감독 자신의 시각과 접근방식-- 즉 그의 "사상"-- 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든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라이프] 잡지에 실려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이 아름답고도 소탈한 흑백 사진의 원본을 니콜스가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보여 줄 때, 나의 가슴 속에 퍼진 감동을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철저하게 "일상을 고단하고 힘들지만 의미있게 살아나가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귀속된 훌륭한 예술, 그리고 그 예술 작품을 존경하며, 그 뜻을 계승하겠다는 니콜스 감독의 담담한 결기가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명 장면들이 뇌리에 각인된 채 계속해서 생각나는 그런 훌륭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장면들이 아니고, 공들여 빚어내는 분위기와 느낌의 총체적인 흐름이, 관람을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어떤 경우는 며칠 동안 지속되면서, 운전하다가도 아니면 집에서 커피 마시다가 와락 혼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작품도 있다. [러빙] 은 후자에 속한다. 겸허하고 젠체하지 않는 지성의 힘이 느껴지지만, 겉보기로는 영리하고 정치적으로 "쎈" 영화는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인종 차별이라는 인간의 모든 문명에 깊이 각인된 무서운 구조적인 "악"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싶다는, "별 것 아닌" 욕망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트럼프와 박근혜와 같은 자들에게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보통사람" 들이 떡하니 쥐어주는 이 어이없는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자면, 이 한편에 내가 가졌던 어쩌면 비현실적인 기대를 제프 니콜스 감독은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면 상상했을 수도 있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니고 특이점에 도달하는 그런 한편은 아니었지만, 유감은 없다. 


크게 추천한다. 보시고 나서 재미가 없었으면 할 수 없지만, "정치적-사상적으로 반자본, 반제국, 반 뭐가뭐가가 아니니 못 만든 영화다" 라는 투의 비판은 거둬두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한 편에서 보여주는 러빙 부처의 "별거 아닌" 삶이 세상의 "진실" 이고 그런 별거 아닌 삶이 바뀌어야 세상이 또한 바뀐다, 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 민중사의 기본 명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극소수의 역사가들만이 실행에 옮기는-- 를 받아들이실 수 있는 너그러움을 지니게 되시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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