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7.02.19 06:31

Q 조회 수:2842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이 건물에는 제가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당신이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없다니 그게 뭔 소리요?" "…유색 인종 전용 화장실이 없단 말에요!! 이 건물뿐 아니라 여기서 800미터나 떨어진 웨스트 캠퍼스 빌딩 말고는 유색 인종 전용 화장실이 있는 곳이 없다구욧!"


미국, 2017.      


A Levantine Films/Chernin Entertainment/Fox 2000 Films Production. 화면비 2.35:1, 2시간 7분. 


Director: Theodore Melfi 

Screenplay: Allison Schroeder, Theodore Melfi 

Based on a nonfiction book by Margot Lee Shetterly 

Executive Producers: Kevin Halloran, Ivana Lombardi, Margot Lee Shetterly, Mimi Valdes, Renee Witt 

Cinematography: Mandy Walker 

Production Design: Wynn Thomas 

Art Direction: Jeremy Woolsey 

Editor: Peter Teschner 

Costume Design: Renee Ehrlich Kalfus 

Music: Hans Zimmer, Pharrell Williams, Benjamin Walfisch 


CAST: Taraji P. Henson (캐서린 고블/존슨), Janelle Monae (메리 잭슨), Octavia Spencer (도로시 본), Kevin Costner (해리슨), Kirsten Dunst (비비언 미첼), 

Jim Parsons (폴 스태포드), Mahershala Ali (존슨 대령), Glen Powell (존 글렌), Olek Krupa (질렌스키 박사), Aldis Hodge (리바이 잭슨), Dane Davenport (앨런 셰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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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니콜스의 수작 [러빙]과 오바마 대통령의 전기영화 [배리]에 이어 흑인 인종문제를 색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또 다른 한편을 감상했다. [히든 피겨스]가 그 중에서는 가장 통속적이고 고전적인 이른바 "필 굿 무비" 에 해당된 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반드시 박한 평가로 귀결되어야만 할 이유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마고 리 셰털리가 집필한 논픽션 저서가 원작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20세기폭스사에서 이러이러한 내용의 책을 쓰는 중입니다, 라는 말만 듣고 영화화 판권계약을 서둘러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내용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웬만큼 민권 운동이나 우주 개발 계획의 역사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도 깜짝 놀랄 만한 "숨겨진 비화"를 다루고 있으면서, 또 이 비화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아폴로 계획이 세워지기 전, 아직 케이프 케네디로 불리기 이전 케이프 캐너버럴에서 우주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던 당시의 미 항공우주국 (NASA) 에서 일하던 "컴퓨터" 들이 주인공들인데, 이 "컴퓨터"는 신진 회사 IBM 이 당시 개발했던, 웬만한 방 하나에 꽉 들어차는 거대한 덩치의, 펀치카드를 먹여야 작동하는 "전자계산기" 가 아니다. 그 계산기가 등장하기 전에, 로켓의 추진과 궤도 수정 등에 필요한 정밀한 수학적 계산을 계산자와 연필, 종이를 써서 해냈던, 말하자면 "계산원 (計算員)" 들인 것이다 (기계 컴퓨터보다 앞서서 존재했으므로 이들을 "인간 컴퓨터" 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큰 이유는, 그들이 다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흑인이었다는 사실에도 있다. 


"우리"가 몰랐던 것은 미국 얘기기 때문이라고? 웃기지 마시라. 2017년의 한국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 백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우리" 한국인들은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작동해온 인종차별주의가 깊숙하게 내재화된 인간들이다. 닐 데그러세 타이슨과 같은 유명인사들의 엄연한 존재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들" 중에 누가 "수학" "천재" "과학" 이라는 개념들과 흑인들, 그 중에서도 흑인 여성들을 곧바로 연결 시킬 수 있겠는가? 최소한도 오바마 대통령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 어린 (젊은) 세대의 "우리들" 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너무나도 뿌리깊은 인종 차별적 편견의 심도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라는 추측 내지는 기대를 해 볼 따름이다. 


영화는 원작에서 다루는 네 명의 선구자들 중에서, 특히 세 명을 골라내어, 그들이 1962년에 존 글렌이 프렌드쉽 7호를 성공적으로 운행함으로써 일단락 짓기까지 50년대 말부터 NASA가 추진한 유인 우주비행사 발사 프로젝트에 어떻게 막대한 이바지를 했는가를,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엮어서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의 천재였고, 요즘 세상 같았으면 MIT나 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과학자가 되었겠지만, 당시에는 NASA의 "계산원" 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최고 레벨의 성취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캐서린 고블 (타라지 헨슨), 계산원들의 리더이지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결코 책임자 자리를 얻을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인종 차별과 고달픈 투쟁을 벌여야 하는 도로시 본 (옥타비아 스펜서), 그리고 미인이고 입이 바르지만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NASA소속 엔지니어 타이틀을 손에 넣고자 욕망하는 메리 잭슨 (그래미상 후보에 여섯 번 오른 R &B 가수 자넬 모네이) 이 주인공들인데, 그 중에서도 서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수학자 캐서린이다. 이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커피도 "유색 인종 전용" 이라는 렛떼루가 달린 팟에서 따로 마셔야 하며, 같은 오피스에서 백인들과 책상을 맞대고 일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인종차별이 일상화된 남부 버지니아 주 랭글리의 우주국 기지에서 일하면서, 양적으로 백인들의 몇 배가 되는 업무를 오차 없이 수행해야만 했다.


앨리슨 슈뢰더 (실제로 NASA 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스몰빌] 의 프로덕션에 관련되었다는 정도가 경력의 전부인 비교적 신인) 과 시오도어 멜피 (이 분도 빌 머레이 주연의 [St. Vincent]로 데뷔한지 얼마 안됨) 가 집필한 각본은 고전적인 앙상블 드라마와 실제 인물 전기영화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멜피의 감독으로서의 터치에도 실험적인 측면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잠시 보여주는 캐서린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플래쉬백이나 (역시 자넬 모네이와 캐서린의 새 남편 존슨 대령 역의 마허샬라 알리가 출연하는) [문라이트] 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복합적인 서사와 같은 기법은 일체 배제되어 있다. 대신, 고전 헐리웃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위트 넘치는 대사의 주고 받음이나, 당시의 팝 뮤직의 취향을 교묘하게 재현하는 노래를 배경으로 깔고 벌어지는 코믹스러운 몽타주 등,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드라마적인 액센트를 은연중에 느낄 수 있는 "구식" 스타일을 고수한다.


등장인물들이 병 맥주를 퍼마시고, LP 를 틀어놓고 춤추고 하면서 왁자지껄 파티를 즐기는 장면들이 [러빙], [배리] 그리고 [히든 피겨스] 에 똑같이 등장하는데, 그 분위기와 색조는 영화마다 사뭇 다르다. [러빙] 은 실제 사람들이 드라마적 과장이 없이 느슨하게 즐기는 분위기고, [배리] 에서는 담배와 대마초 연기가 자욱한 배후에 사상적 긴장감이 감돌지만, [히든 피겨스] 에 오면, 음 이게 우리가 미국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그런 "파티" 장면이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이 한편에서는 이러한 장면들이 플롯의 전개를 위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캐서린과 존슨 대령이 천생연분의 커플로 맺어지는 것-- 봉사하도록 미리 구도가 짜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보자면 "뻔한" 수준의 감동을 관객에서 불러 일으키도록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굴러가는 영화인 깐에는, [칼러 퍼플] 같은 아름다운 영화의 효율성을 심각하게 깎아먹은 과다한 감정의 분출은 의외로 적은데, 주연과 조연 연기자들이 모두 일상 생활적인 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절제가 되어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러한, 어떤 경우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품은 "절제" 된 ("억제" 된 것과는 좀 다른) 연기는 베테랑 옥타비아 버틀러가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한 절제 때문에도, 비를 흠뻑 맞으면서 유색 인종 전용 화장실을 가까스로 다녀온 타라지 헨슨이 깐깐한 상관 해리슨의 비판에 직면하여 이 글의 맨 위에서 소개한 대사를 쏟아내는 시퀜스의 감정적인 폭발이 지극히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바로 그에 이어서 나오는 (여러 백인 상관들을 조합한 캐릭터인) 해리슨이 망치로 화장실에 달린 "유색 인종 전용" 팻말을 뚜드려 부수면서, "인종이 다르다고 오줌 색깔도 다르냐!" 라고 선언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극장의 다른 관객들과 더불어 박수를 치며 환호하면서도, 그 관객들의 감정에 대놓고 영합하는 연출방식에 대해 약간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히든 피겨스] 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휴먼드라마적인 기품을 유지하는 한편이며, 우주 로켓 프로그램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여러 사실도 알려주는 덕후적인 재미도 상당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흑인 여주인공 세 명만 잘하는 게 아니고 케빈 코스트너 (해리슨 역, 코스트너는 현대보다 조금 과거에 살았던 미국 남성 역을 맡으면 왜 그런지 실감이 막 나는데, 그게 이 분의 커리어에 좋았던 것인지 별로 도움이 안 되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와 키어스텐 던스트 (역시 왜 그런지, 이 영화에서는 안쓰럽게 나이가 들어 보인다. 역할이 그래서 그런지) 등도 단순히 "좋은 백인" "나쁜 백인" 으로 나뉘지 않는 복합적인 캐릭터 설정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60년대 초반 당시의 약간 어설퍼 보이는 "첨단 과학 시설"을 멋지게 재현해낸 프로덕션 디자이너 윈 토머스 (이분도 검색해보니 흑인인데 팀 버튼의 [화성 침공]으로 아트 디렉터 길드상을 받으심) 를 비롯한 제작-디자인 팀의 실력은 새삼스럽게 칭찬하기가 멋적다. 


[히든 피겨스] 는 아마도 미래 영겁 명성을 떨칠 불후의 명작은 아니겠고, 영화적으로도 [러빙] 이나 [배리] 에 비하면 혁신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이겠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하면서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들을 널리 설파하는 데에는 헐리웃 영화만한 도구가 없다는 것을 내가 부정하겠는가? 그것도 페미니즘이 "Family에서 나온 Faminism" 이라고 주장하는 분들께서 혓바닥을 꼴랑 삼키기는 커녕 오히려 트위터 상에서 강의를 떠벌리는 나라의 주민들에게? "내재적 인종차별-여혐사상" 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 여러분께 이 한편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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