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델마 Thelma (2017) <부천영화제>

2018.02.03 10:03

Q 조회 수:1646

델마 Thelma  


노르웨이-프랑스-덴마크-스웨덴, 2017.      ★ 


A Motlys/Eurimages/Film i Väst/Le Pacte/Nordic Film och TV Fund/Norwegian Film Institute/Snowglobes Films Co-Production, 1시간 55분, 화면비 2.35:1 


Director: Joachim Trier 

Screenplay: Eskil Vogt, Joachim Trier 

Cinematography: Jakob Ihre 

Production Design: Roger Rosenberg 

Costume Design: Ellen Dæhli Ystehede 

Music: Ola Fløttum 

Makeup Artists: Louis Kjaer, Dennis Knudsen, Nina Elise Johansen, Malin Andersson 


CAST: Eili Harboe (텔마), Kaya Wilkins (아냐), Henrik Rafaelsen (트론드, 텔마의 아버지), Ellen Dorrit Petersen (운니, 텔마의 어머니), Anders Mossling (파울손 박사), Vanessa Borgli (아냐의 어머니), Steiner Klouman Hallert (크리스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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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광활하게 트여있으면서 동시에 억압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의사 트론드는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딸 텔마 (왜 한국어제목이 영어식 발음인 델마인지 모르겠지만 본문에서는 이런 한국개봉 제목들은 신경 쓰지 않겠다) 를 데리고 집 옆 숲 속으로 사냥을 나간다. 도중에서 표면이 빙판이 되도록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서 (이 호수는 나중에 벌어지는 쇼킹한 전개의 복선이기도 하다) 눈이 쌓인  숲에 들어서자, 트론드와 텔마는 그 자신 별로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 사슴 한 마리와 딱 마주친다. 남자는 사슴을 쏠 것처럼 엽총을 겨냥하지만, 곧 그의  총구는 완벽하게 사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어린 딸의 머리로 향한다. 


이 프롤로그는 이후에 벌어질 영화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데, 그 억압적인 아우라와 더불어, [환상특급 (Twilight Zone)] 의 유명한 에피소드 "it's a Good Life" (1961)까지 그 계보가 가 닿는, "악마적인 능력을 가진 순수한 존재" 라는 도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를 구심점으로 한 SF 호러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가늠케 해 준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 설정의 유사성--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적인 가족에서 자라난 소녀가 성적 각성을 통해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티븐 킹 원작의 [캐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지만, [텔마]는 어른으로 성장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젊은 사람 (특히 어린 여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연루되었던 "흉측한 사건"에서 배태된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 이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이라는 주제에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캐리] 와는 많이 다르다 (감각적이고 불량스러운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판과 주인공을 페미니즘적인 캐릭터로 재구축하려다가 실패로 귀결된 킴벌리 피어스 영화판과의 현격한 차이점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주인공인 텔마의 심리에 깊이 잠입해서 표현주의적인 비주얼로 그녀의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심리상태를 그려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북유럽산 호러영화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될 수도 있을 [렛 미 인] 과도 큰 차이를 보여준다. 


[텔마] 의 기조를 이루는 비주얼 전략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꼬물거리는 벌러지처럼 보일 정도로 극단적인 원경으로 잡아내는 것인데, 이러한 장면에서 관객들은 장중하면서도 침착한 올라 플뢰툼의 음악에 이끌리면서, 느린 줌으로 포착되는 주인공의 "넓은 세계에 의지할 곳 없이 던져진" 실존의 상태를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로저 로젠버그가 담당한 프로덕션 디자인 또한 수풀이나 생명체의 존재가 부족한 가운데, 넓게 펼쳐지기만 하고 유기적인 관계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들-- 항상 눈이 수북히 쌓여 있는 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주인공 가족의 쓸데없이 큰 집, 수평선이 멀리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 마치 한국의 학원처럼 학생들이 경직된 자세로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 그리고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을 듯이 보이는 학교내의 실내 풀장-- 을 통해서 텔마의 소외감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촬영감독 야코브 이레가 와이드스크린의 좌우 확장성을 풀로 이용해서 찍어낸 감탄스럽게 아름다운 화면도 매혹적이기 보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디자인 해놓으면 거의 2시간이라는 런닝 타임이 소진되기 훨씬 전에, 그 답답함에 질려버릴 것 같은데, 실제로 보고 있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요아힘 트리에 감독이 의외로 장르적인 노하우를 꿰뚫고 있어서, 적절하게 관객들의 장르적 기대를 충족시켜 주면서 자신의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밸런스 감각을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텔마의 심리에 완전히 중심을 맞춘 표현주의적인 "호러 묘사" 의 공력이 상당히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라, 최소한 "호러영화가 왜 이리 밋밋하냐" 라는 식의 불평을 할 여지는 별로 없다. 피가 튀기는 고어가 안 나오기 때문에 그런 불평을 늘어놓는 관객이 반드시 있기는 하겠지만, [텔마] 가 그 일련의 호러 설정과 묘사를 다루는 실력은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셸리] 같은 북구계 마이너 작품들은 물론이고, [렛 미 인] 보다도 한 단계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텔마가 "발작"을 겪을 때 새들이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고 죽는 모습 이라던지, 풀장의 바닥과 표면이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변이 등의 묘사가 일면 지극히 스티븐 킹스러웠고, 70년대 미국 SF-호러의 감성을 의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측면에서라면 [캐리] 와의 대비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위에서 언급한 텔마의 "죄책감" 의 근원이 되는 "사고"를 플래쉬백으로 풀어내는 방식도, 대놓고 착취적이지는 않지만, 주류 헐리웃 영화라면 망서리지 않을 수 없을 쇼킹한 내용을 아주 드라이하게 비수로 찌르듯이 보여주는 것이, 최근 제작되는 미드의 계산된, 잘 벼려진 앙칼짐 같은 태도와 공통항이 있는 듯 하다 (이 "사고" 의 진상도 굳이 따지자면 로버트 멀리간 감독의 고전 미국 호러 [The Other] 에서 비슷한 전개를 볼 수 있다. 이 한편도 악의가 없이 주위 사람들의 파멸을 불러오는 초능력을 지닌 어린 소년의 이야기임). 


두 번째 이유는 여주인공 텔마를 맡은 아일리 하르뵈와 그녀가 주체할 수 없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대상인 아냐 역의 카야 윌킨스의 연기와 그 연기를 통해 구축된 캐릭터의 탄탄함이다. 나는 사실 21세기의 노르웨이 같은 사회 조건하에서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집안의 18세의 소녀가 억눌려 사는 모습을 것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 궁금했는데, 좀 탄복했다. 가장 훌륭한 선택은 트론드와 텔마의 어머니인 운니를 겉으로 보면 "정중하고도 배려심 넘치는" 중년 커플로 보이게끔 연출한 것이다. 그들이 텔마의 자아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 지는 감정이 개입이 되지 않는 조용한 안부 전화, 트론드가 텔마에게 말하는 "오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설교 등의 "일상적인" 행태를 통해 조금씩 누설되고, 결국 텔마의 어린 시절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 다다르면서 이 커플이 광신적인 "신앙" 을 통해 가까스로 인격의 전면 해체를 견디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한 상황에 도달해서도 텔마의 부모는 캐리의 어머니와는 달리 사악한 적대자로 단순히 자리매김하지는 않는다. 자기 딸을 죽이려고 했던 트론드조차도, 인지를 초월한 그 무엇을 어거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왜곡된 합리성" 의 비극적인 신봉자라는 측면으로 다가오고, 최소한 나는 그에게 섣불리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아무튼 최대의 매력은 아일리 하르뵈 연기자의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연기인데, 그것이 훌륭한 캐스팅에 힘입은 카야 윌킨스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시너지효과가 보통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두 소녀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고, 둘 사이의 어긋남이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전해진다. 트리에 감독은 쓸데없이 "소녀들의 레스비언 섹스야! 꼴리지?" 라는 식의 과시적인 연출 대신 (텔마와 아냐가 벌이는 환영이 가미된 섹스 신이 나오기는 하는데, 역시 표현주의적인 호러 장면이고 텔마의 근본주의적인 죄책감에 기초를 둔 디자인이기 때문에 또라이 남성 관객들이라고 해도 "야동" 처럼 소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시퀜스 자체는 등골이 써늘해질 만큼 변태적이다) 둘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와 별 맥락 없이 주고 받는 시선 등을 통해 역시 침착하고 건조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텔마가 왜 아냐에 그렇게 푹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구구한 심리상태의 설명을 늘어놓는 다던지, 아냐를 윙크를 던지고 "섹시한 미소"를 던지는 아니메 캐릭터 같은 존재로 만드는 따위의 (남성 감독들이 저지를 법 한) 패착을 잘 피해나갔다는 것이 관건이다. 윌킨스는 실제로는 노르웨이계 미국인 가수라고 하는데, 참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매력을 발산한다. 공효진이 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한테는 윌킨스도 그냥 "배싹 마르고 이상하게 생긴 여자애"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겠지만 (비웃음).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들이 시사하듯이, [텔마] 는 사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한편이지만, (특히 나처럼 고전 호러를 강박적으로 추종하는 관객에게는 더욱)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깊이 천착하면서도, 감독 혼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자폐적인 "예술영화"로 내달리지도 않고, 착취적인 고어 페스티발로 곤두박질치지도 않은 채, 장르적인 도구들을 적절히 안배-원용해서 "자아의 성장" 에 따라 "바뀌는 세계관의 공포" 랄까, 그러한 주제를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최근 본 스칸디나비아계 SF-호러 중에서는 최고작으로 언급해도 좋을 것 같다. 


호러와 SF 팬들, 북구영화적인 죄책감을 기조로 한 억압적인 분위기와 깨끗하고 건조한 질감을 선호하시는 (그런 분들 계신가?!) 영화팬들께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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