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Thoroughbreds  


미국, 2017.     


A B Story/Big Indie Pictures/June Picture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Focus Pictures. 1 시간 32분, 화면비 2.39:1 


Director and Screenwriter: Cory Finely 

Cinematography: Lyle Vincent 

Production Design: Jeremy Woodward 

Costume Design: Alex Bovaird 

Music: Erik Friedlander 


CAST: Olivia Cooke (아만다), Anya Taylor-Joy (릴리), Anton Yelchin (팀), Paul Sparks (마크), Francine Swift (신시아- 릴리의 엄마), Max Ripley, Alex Wol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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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굉장히 잘 나가는 두 젊은 여배우가 팜 파탈적인 틴에이저들을 맡아서 연기할 뿐 아니라, 또 결과적으로는 안톤 옐친의 유작이 되어버렸다는 좀 불행한 프리미엄을 업고, 선댄스 등에서 상당한 인기를 불러모았던 한편이다. 제목의 [서러브레드] 는 "순수품종" 이라는 의미로 원래 경주마 (競走馬)에 관한 용어이지만, 문학이나 다른 예술작품에서 은유로 쓰일 때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양반 (진짜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 순전히 핏줄로 타고난 상류계급이라는 의미에서) 집안 자제들"을 일컫게 되었고 이 한편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도입부에서 아만다가 칼을 꺼내 들고 오밤중에 마구간에서 말 한 마리에 접근하는 불길한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각본가-감독인 코리 핀리는-- 핀리는 원래 이 작품을 무대극의 극본으로 상정하고 집필했다고 한다-- 그의 속내를 대부분 드러내놓는다. "말" 에 관한 연극이라고 하면 피터 셰이퍼 (한국에서 검색하려면 "쉐퍼"로 찾으셔야 될 듯) 의 [에쿠우스]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고전 (1973년 상연) 작품이 실제로 벌어졌던 한 소년이 저지른 말의 눈알을 빼버린다는 가혹행위에 대한 동기를 상상해서 심리학적으로 "해결" 한다는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이 한편에서의 아만다의 끔직한 행위는 그녀의 팜 파탈 또는 사이코패스적인 전형성을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상류계급 등장인물들의 위선과 억압된 폭력성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기능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핀리 작가의, 캐릭터들에게 내재적인 자율성을 주는 대신에 일종의 민속지적 (ethnographical) 전형으로 그들을 자리매김하는 접근 방식은, 최소한 나에게는, 뭔가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나 연극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 또는 새롭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보편적인 진실을 강렬하게 설파함으로써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데 실패한 듯 하다. 정서적으로 메말랐고, 겉 다르고 속 다르고, 일류 대학을 못 가면 인간의 대열에서 탈락되는 것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숨이 탁 막히는 폐쇄적인 사회, 거기다 더해서 언제든지 파괴적이고 살인적이기까지 한 폭력행위의 모습으로 분출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추잡하고 즉물적인 인간관계. 이런 요소들을 다루면서, 뜨악하게 코믹한 상황들로 간을 맞추고, 적당한 수준의 폭력과 적당한 수준의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양념하여 버무려낸 대본을, 재능 넘치는 연기자들로 하여금 읊게 만들어서 보여주면 상당수 평론가들은 그냥 꺼뻑 죽는 시늉을 하면서 칭찬을 늘어놓는 걸 볼 수 있는데, 요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터 셰이퍼의 [아마데우스] 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작품들의 핵심에는 근본적인 찌질스러움-- 모짜르트의 재능을 시기하는 살리에리의 시점이 마치 "천재성" 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인 것처럼 굴면서 관객들이 살리에리에게 공감하기를 종용하는 그런 종류의-- 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은 혹시 안 드시나? 


서사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릴리와 아만다 캐릭터에 관해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로부터 할 수 있는 예상을 뒤집는 일종의 "반전" 이 벌어지기는 하는데, 최소한 나한테는 이 부위의 극적 전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거기다 더해서 릴리와 아만다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관객들의 공감이나 감정 이입을 불러 일으키려는 기운, 나아가서는 그녀들에게 해방적인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까지도 느낄 수 없었다. 좀 고약하게 표현하자면, 릴리나 아만다 자신들, 또는 그들 같은 소녀들의 인생이나 꿈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외연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걔네들이 몸 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쪼다같고 한심한 가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아 뭐라구요? 이건 다 블랙 코메디니까 그냥 낄낄거리고 캐릭터들을 비웃으면서 보면 되는 거지, 뭘 공감이니 감정 이입을 걱정하느냐는 말씀이신가? 에유. 사회적, 도의적 양식 (良識) 에 비추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나오는데 헐헐하고 웃기더라, 그걸 빌미로 블랙 코메디라고 제발 좀 부르지 마시라, 라는 이미 수도 없이 한 얘기를 또 다시 하게 만드시넵. [닥터 스트렌지러브 또는 나는 왜 걱정하기를 그만두고 핵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 나 [사랑했던 사람들 The Loved Ones] 정도는 되어야-- 한참 웃고 난 이후, 누구한테 뺨따구를 후드려 맞은 것 같은, 불쾌감을 동반하는 얼떨떨함이 몰려오는, 그런 모순된 반응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어야-- 블랙 코메디라고 부를 수 있습네요. 부조리한 상황적 개그나, 상식적인 도덕적인 가치를 짓밟는 소위 말하는 "입바른 소리"가 담긴 대사들이 얼마 나온다고 해서, 아무거나 블랙 코메디라고 부르지는 말아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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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소녀] 가 지루하다거나, 가치가 아예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올리비아 쿠크와 아냐 테일러-조이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본전은 뽑을 수 있는 한편이니까. 왜 그런지 나는 쿠크가 테일러-조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쿠크가 26세, 테일러-조이가 22세로 동세대고, 영화를 본 다음에 생각해보니, 실제 배역과는 반대로 테일러-조이가 정서불안과 사이코패스적인 외연을 지닌 아만다역, 그리고 쿠크가 극도로 억압된 채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릴리역을 맡았어도 둘 다 멋지게 잘 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스페인계 같은 인상이 드는데 순 영국사람인 올리비아 쿠크는 [베이츠 모텔] 에 나올 때부터 연기력으로는 정평이 있었고, 상당히 어려운 역할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자신이 지닌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라임하우스 골렘]의 주인공역을 잘 소화해낸 것이 인상 깊었는데, 아만다 역할을 맡아서는, 속을 알 수 없는 섬뜩함과 불쌍해 보이는 페이소스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정확히 전달해주는 실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자면, 쿠크보다도 오히려 아냐 테일러-조이의 연기자로서의 전 역량이 발휘된 작품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건] 이나 [더 위치]등에서도 비범한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다면적이고, 상호 모순적인 지향성을 지닌 채 내적인 갈등에 시달리는 릴리 역처럼 풍요한 역할을 맡은 적은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게도 테일러-조이는 이름과 얼굴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스코틀랜드 혈통이라서 스페인계 피가 실제로 섞여있는데, 아냐의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눈망울을 포함해서 아니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용모가 2.39:1 화면비의 스크린에 가득히 비춰지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특수 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고인이 된 안톤 옐친이 맡은 마크 역은 보는 도중에는 허탈개그적인 코믹 연기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공을 세우고 있으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있어도 좋고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캐릭터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마치 이 캐릭터가 무언가 숨은 실력을 보여주거나 해서 재미있는 방향으로 서사를 끌고 갈 것처럼 보이는데, 결과는 약간 실망스럽다. 물론 옐친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별로 없지만. 


배경 음악에 일본식 타이코 북을 두드리는 아방가르드적인 타악기 중심의 스코어를 원용하는 등, 여러 전략들이 확실히 세련되어 있기는 한데, 그렇게 감탄을 하면서 무릎을 칠 만한 공력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역시 "두 소녀" 주인공들의 연기력에 거의 모든 것을 기대고 있는 한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내 입장에서는 조금 실소가 흘러나올 정도로 자기반영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연극적인" 시퀜스-- 아만다가 릴리에게 자신의 실제 감정 상태와 무관하게 눈물을 흘리는 "연기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라던가-- 들도 두 젊은 (젊기는 하지만, 둘 다, 특히 쿠크는, "어리지는" 않다. 완전 대 베테랑의 관록의 오라를 느낄 수 있다) 연기자들의 진지한 몰입과 섬세한 테크닉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다가올 정도니까. 


마지막으로 스포일러가 될 까봐 조심해서 말하는 건데, 나는 보통 기승전결의 부분에서 "결" 에 해당되는 사건을 보여주고 아무런 해석이나 코다가 없이 끝나는 엔딩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에서는 코다의 설명적이고 "고상하게 심오한"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릭터의 의도와 성격에 대한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전개가 이 부분에서 비로소 나오니까 필요했겠지만,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반전" 이라는 게 굉장히 먹물적이고, 관객들의 공감능력이나 감정이입이라는 요소를 무시하거나 낮추어보는 것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 하다. 그것보다도 "사건" 이 벌어진 직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벌벌 떠는 릴리가 아만다의 팔을 들어 그녀의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끝나버렸더라면 (후일담 같은 것은 아주 간략하게 보여주고. 주차장에서 만나는 제3의 캐릭터는 다시 등장할 필요도 없었고) 최소한 나에게는 더 감동적이고 좋은 의미로 미스터리어스한 엔딩이 되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여러 번 계속 보면서 천착을 할 만한 훌륭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 쿠크와 아냐 테일러-조이의 팬 여러분들께는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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