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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그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래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포드 v 페라리]라는 제목을 보면 두 회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어떻게 레이싱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는가에 대한 영화를 상상할 법 한데, 실제 영화는 페라리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페라리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포드 레이싱팀 매니저인 캐롤 셸비와 그의 드라이버 켄 마일스가 르망24시 경주 우승을 하기 위해서 넘어야할 난관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더구나 가장 큰 난관도 아니죠. 영화에서 셸비 팀을 가장 괴롭히는 건 포드 사 부사장인 리오 비비로 그는 머스탱 발표 행사에서 자신에게 비아냥거린 마일스를 탐탁치 않게 여겨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내쫓으려 합니다.

실제 세계라면 액티브하게 반응할 경쟁상대를 단순한 장애물 정도로 역할을 축소해 버리고 한쪽의 관점에서만 그 난관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꾸리는 접근방식은 [머니볼]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포드 v 페라리]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 처럼 [머니볼]이 갔던 길과는 다른 길로 갑니다. 그 길은 주연배우 맷 데이먼의 이전작 [마션]에서 추구했던 방향과 마치 거울이라도 놓고 거꾸로 한 것처럼 보입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관료주의적 상사가 어깃장을 놓는 설정부터가 그렇죠. 영화는 또한 펜대를 굴리고 숫자놀음을 하는 화이트 칼라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마일스가 시험주행차량에 부착한 분석용 컴퓨터를 떼어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상징적이죠. 엔지니어링, 앙상블, 과학적 접근 같은 것은 이 영화에서 거의 완벽히 무시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노면을 달리는 드라이버의 운전실력과 시트와 스티어링 휠에서 느껴지는 떨림으로 차량의 상태를 알아내는 감각인 것입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셸비의 7000rpm 운운하는 중얼거림은 그런 관점에 대한 화룡점정이고요. 하여간 켄 마일스가 엔지니어의 소양마저 일부 갖추고 있는 레이싱 세계의 먼치킨같은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경쟁상대인 페라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라 마일스를 포드 GT 40의 운전석에 앉지 못하게 하려는 온갖 방해와 맞서 싸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중요한 두 부분에서 비중배분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첫째는 실제로 엔지니어들과 연구하고 엔진과 차량을 만들고 조율했을 캐롤 셸비의 역할이 단순히 리오 비비의 획책에 맞서 켄 마일스의 자리를 지키는 정도에만 그치고 마는 것이고 두번째는 악당으로서의 비비를 부각시키다보니 그의 존재감이 주인공들을 넘어서버리는 것입니다. 덕분에 후반부에서 영화는 승리에 대한 카타르시스 대신에 거대한 안티클라이맥스로 빠져들고 말죠. 더구나 당시 현장에서는 1,2,3위를 다 차지한 포드의 대승리라는 분위기였고 마일스는 자신이 속도를 늦추어 들어오는 것에 순순히 동의했다고 하니 역사적 사실과도 약간 괴리감이 있는 부분인데 그렇게 각색해가며 얻는 것이 관료주의의 폐해를 만끽하는 것이라면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영화를 보고나면 지금이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구나란 실감이 듭니다. 실제 포드와 페라리의 경쟁은 몇년에 걸쳐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레이싱용 차량과 엔진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이전보다 한발짝 나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걸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럽에서 열리는 레이싱에서 쟁쟁한 유럽차들을 꺾고 우승을 한 미국인들(그것도 백인!)의 업적과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죠. [마션]에서(물론 주인공은 백인 남자였지만) 다국적 출신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중국이 중요한 협력을 제공하며 추후에 같이 우주개발에 나서는 장면이 그려졌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로 퇴행한 듯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ps. 포드와 페라리의 진짜 경쟁 이야기로는 영화보다 아래 트윗 타래가 훨씬 디테일하고 재미있습니다.
https://twitter.com/Luuuuuuuuuuuu/status/1142446598208667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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