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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뷰라기 보단,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느낀 점을 적은 감상글에 가깝습니다.

초반 배에서 그의 캔버스가 바다에 빠지자 수영을 하는 메리앤(노에미 메를랑 분). 폼이 범상치 않다. 수영을 정식으로 배워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구조영법 중 하나인 헤드업 자유형이다. 18세기말의 수영 교육 커리큘럼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장면에서 그가 자신의 아끼는 캔버스를 ‘구조’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영화가 메리앤이 누군가를 ‘구조’하(려)는 몸짓을 담지는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뒤집혔다. 
 
백작 가(家)에 도착해 몸종 소피를 만나고 메리앤이 최초로 짚어든 음식이 빵과 포도주라는 것이 인상깊다. 그렇다. 이 영화는 기독교적 메타포를 담고 있다. 주의를 기울일 것. 

초상화를 그려야하는 대상은 백작집안에서 억지로 결혼의 강요당하고 있는 엘로이즈(아델 에넬 분)이다. 앞서서 결혼이 싫어서 결혼을 거부하며 운명에 저항하던 엘로이즈의 언니는 ‘다수와는 다른 선택’을 통해 이제 세상에 없다. 

백작부인은 딸인 엘로이즈에게 산책파트너라며 거짓으로 메리앤을 소개한다. 산책을 통해 몰래 관찰한 결과물들을 하나로 조합하여 몰래 초상화를 그리는 주인공. 일정은 메리앤이 6일 머무르는 것으로 밝혀지는데, 나는 거기서 기독교의 인격신이 천지를 창조하는데 6일이 걸렸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수녀원의 음악만을 아는 엘로이즈와 달리  메리앤은 오케스트라도 들어봤고, 이태리어도 할줄 알고 심지어 합시코드도 다룰 줄 안다. 그리고 또한 정식으로 수영도 배웠다. 두 사람의 산책 중 수영을 단 한번도 해 본적도 교육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엘로이즈는 자신이 수영을 할수 있을지 없을 지 물에 들어가보기 전엔 모르지 않냐고 메리앤에게 말한다. 엘로이즈는 매번 이런 식이다. 그런 태도에 메리앤은 당황하면서도 비슷한 충동과 끌림을 느끼는 듯 하다. 

6일 안에 하나의 우주와도 같은 한 인격을 화폭에 담는, 그야말로 천지창조를 해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대범한 성격의 엘로이즈의 영향 때문인지, 덩달아 대범해진 메리앤은 급기야 그와 산책 중 순간 순간 몰래 몽탄으로 그의 특징적 손모양을 크로키한다. 

엘로이즈의 언니가 죽기 전 끊임없이 쓰던 사과편지에 대한 이야기가 드러나고, 그것이 아마도 백작가문으로서 정략적으로 예정되어있던 결혼이라는 운명을 동생에게 떠넘긴 데에 대한 언니의 죄책감의 발로였을 것으로 둘은 추측한다. 

영화 중반부터 이 둘은 연인사이로 묘사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인데, 기독교 세계관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영화 내에서 귀신, 즉 유령의 형태로 두 사람에게 두 번 나타난다. 언니는 죽어서 자신들이 누리는 생의 축복과 영원할 것 같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없다. 그런데 엘로이즈와 메리앤은 서로를 통해서 지복bliss(bless의 명사형)을 누리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언니의 혼이 항변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운명적인 끌림과 아름다움을 생으로부터 선물받지 못해 비극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언니에 대해 두 사람이 느끼는 죄책감이 만들어낸 ‘뚜렷한 허상’이었을까? 

오케스트라를 들어본 적이 없이 수녀원의 음악 밖에 모르느 엘로이즈에게 음악도시 밀라노에 가서 들어보라며 청하는 메리앤ㅡ우리 모두는 맘에 있는 상대에게 맘에 없는 말을 했을 때의 얼빠진 초조감을 안다. 그것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노에미 메를랑. 그 말을 듣고 완전히 삐져버리는 엘로이즈. 

1일간 외출이 주어져 외출 후 돌아온 엘로이즈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고독 속의 자유를 느꼈어요. 당신이 없다는 것도요. 

일종의 사랑고백이라고 해야할까? 아니 그 보다는 그(엘로이즈)의 말대로 깊은 감정이다. 아무튼 그저 고용되었을 뿐으로 시작했지만 엘로이즈를 진심으로 ‘알게’ 된 메리앤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백작부인에게 완성된 작품을 드리는 한 가지 조건으로 딸에게 직접 보여주고 진실을 말할 것을 제안한다. 백작부인은 엘로이즈가 메리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있다. 엘로이즈가 메리앤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엘로이즈의 면면을 모아 그려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세워두고 열띤 미학적 토론이 벌어진다.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이 그 그림 속에 부재하다고 얘기한다. 메리앤은 존재감은 거짓된 것들로 이뤄진것이라고 한다. 엘로이즈는 어떤 감정들은 진실되고 깊다고 항변한다.  

정곡을 찔린 것일까? 그림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메리앤. 그리고 자발적으로 포즈를 취하겠다는 엘로이즈. 

그리고 엄마(백작부인)가 없는 아이들만의 5일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아마도 백작부인은 두 아이들(엘로이즈와 메리앤)의 이끌림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하며, 서로에게 좋은 ‘추억’ 혹은 ‘기억’이나마 쥐어주려 잠깐의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는 것 같다. 그들이라는 소 우주가 완전히 병합되어 천지를 창조하기엔 하루가 부족한 5일 동안만... 하여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연인관계가 영원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게 된다. 

이제 영화는 어른이 없는 동심과 생기와 상상력의 세계로 우릴 초대한다. 

마님이 떠나시면 뱃 속 아이를 해결하려한다는 말을 했던 몸종 소피(지혜). 젊은 여성 셋의 계급을 뛰어넘는 자발적인 연대가 눈에 띈다. 물론 이 연대는 (영화 시점에서 100년 뒤인)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 평등, ‘연대’를 뜻하게 된 이름을 가진 메리앤(Marienne)의 적극적인 의견개진에 의해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기독교 세계관 속 성모 마리아가 한 일(하나님 '아버지'의 남아를 낳아 기름)과는 다르게 프랑스 혁명 이후의 마리아(메리앤)가 해야할 고귀한 책무가 무엇인지를 이름을 통한 기이한 병치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소피의 임신중단을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더욱 가까워지는 메리앤과 엘로이즈... 

임신중단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묻는 엘로이즈, 네

사랑에 빠진적이 있냐고 묻는 엘로이즈, 네. 

느낌이 어때요. 말로하기 힘들어지죠. 

엘로이즈의 자는 얼굴이 예뻐 메리앤이 데셍을 하는 데 그 슥삭 하는 소리에 깨어난 엘로이즈. 세상 따뜻한 눈빛으로 메리앤을 바라본다. 좋아해요라는 말을 한번에 천번쯤 전하는 시선같았다. 

다음날, 포즈를 취하고 그림을 그리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인상 깊다. 당신이 날 볼때 나는 누구를 보죠? 내 남편의 시선이네요? 누드 모델도 그려요? 여자만요. 모델 기분 달랠따 뭐라해요? 당신이 궁금해요. 품위있어보여요. 아름다워요. (한참 뜸을 들인 뒤) 이런 식으로 말하죠. 

그 날밤 이미 연대와 우애로 자유와 평등을 이룩한 세 사람은 엄마라는 어른이 사라진(이 영화에선 애초에 아버지들이 그 모습조차 비치지 않는다!) 집에서 소녀들만의 문학의 밤을 보낸다. 소재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그들은 열띤 토론을 한다. 

어쩌면 소피의 말이 맞을 수 있다면서,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하는 메리앤. 그가 연인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화가로서의 자신을 선택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어쩌면 여자가 ‘뒤돌아봐’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보는 엘로이즈. 어쩌면 엘로이즈 역시 강력하게 저항하지만 너무나 거센 시대와 환경의 억압 속에서 다른 귀족가문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을 선택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뒤이은 장면에서 우리는 환상적이고 기이한 프랑스 민요를 듣게 된다. 이 곡은 실제로 존재하던 곡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작곡된 곡이라고 한다. 

“La Jeunne Fille en Feu.” 

라틴어로 “우리는 탈출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이 구절을 두고 이은선기자는, 여성들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억압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그리고 또한 서로간에 싹트는 사랑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음을 중의적으로 표상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 자락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를 본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 쯤은 물에 살짝 들어가서 죽지 않고 살아나왔고 (물의 심판), 불에 살짝 그을렸다 죽지 않고 살아나오는 (불의 심판) 엘로이즈를 보면서,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내는 삶을 끊임없이 선택해도 된다는 격려와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처음으로 죽은 언니의 유령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세상에 불어닥친 유령의 존재는 왜인지 더욱 더 무섭다. 메리앤이 엘로이즈를 달랜다. 겁먹은 줄 알았어. 맞아. 

아마도 4일째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엘로이즈. 뒤이어 두 서람은 정사를 나누고 섹스의 절정감을 더 길게 느끼게 해주는 약초를 서로의 겨드랑이에 바른다.

그리고 완성된 엘로이즈의 초상화

“이번 건 맘에들어”

“널 잘 알게됐으니까”

“내가 변해서 그런가봐. 지난번 그림을 망친건 스스로를 위해서야.” 

“이번것도 없애고 싶어”

“왜?”

“이거 때문에 네가 남에게 갈거니까!”

“끔찍해. 내가 결혼한다고 비난하겠지?! 대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날 너무 쉽게봤어. 최악인건 내가 저들처럼 결혼을 반긴다고 생각해. 내가 불행할지 행복할지 멋대로 상상해도 되지만... 내가 결혼을 반대하기 원하지?”

“응”

아직 젠더관련 정책에 있어 후진한 한국에서도 여성끼리 서로 사랑하면 하와이로 날아가 결혼할 수 있는 그런 풍경에서 우리는 17세기말의 시대적 억압과 옥죔을 그저 상상해볼 뿐이다. 그 것을 가늠이나마 해보기 위한 자료조사를 풀자면, 영화속 시대완 거리가 좀 있지만 중세엔 프랑스 대수녀원장이 여성과 성관계를 한 ‘혐의’로 종신형을 산 사례가 있고, 영국 에섹스에서는, 레즈비어니즘이 마녀의 증표로 취급되어 목매달려 죽은 이의 기록이 있다(Bastow, 1994). 

"후회하지마. 기억해. 

"기억해. 처음으로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을.”

"사랑에 빠진적있냐고 물었을 때 바로 지금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어... 기억할게."

그리고 6일째 밀라노의 그 남자가 도착했다. 보자마자 엘로이즈에게 달려가 보고 하는 메리앤... 코르셋을 조여준다. 

그리고 흰 소복만을 입은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메리앤의 모습을 담으려 하는 엘로이즈. 그 모습은 마치 그 자신이 언니의 유령이 되어버린 모습과 닮았다. 

다시 영화가 시작하던 현재로 돌아온다. 살롱 전 같은 호화로운 분위기의  전시회에 <변신이야기>를 주제로한 그림을 아버지이름으로 몰래 출품한 메리앤. 그는 남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자신의 그림 앞에 서있다가 무엇인가에 끌린 듯이 다른화가가 그린 한 초상화를 보게 된다. 그림 속 엘로이즈는, 한 손에는 자신의 아이를 다른 한 손에는 메리앤의 자화상이 그려진 책의 28페이지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이제 합시코드로 메리앤이 엘로이즈에게 들려줬던 비발디의 여름 3악장이 울려퍼지는 명장면이다. 개인적으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캐롤>의 마지막 "I love you" 와는 달리 이 영화는 그 모든 대사들을 그저 그들의 시선, 눈빛만으로 전달하려 한다. 엘로이즈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메리앤의 시선은 '우리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할게.'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들의 사랑은 발붙인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어, 화폭에 새겨지고, 서로의 기억에 새겨지고, 그리고 이렇게 은막 위에 새겨져 영원을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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