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에어리어 88 OVA (1985)

2020.09.23 17:32

eltee 조회 수: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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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항공사의 전도유망한 예비 파일럿인 일본인 카자마 신은 파리에 있는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날 밤, 학교 밖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같은 파일럿 후보생인 친구 칸자키 사토루가 내민 외박신청서에 사인을 한다. 그런데 그건 외박신청서가 아니라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아슬란(가상국가) 공군 입대지원서였다. 단순히 서류에 사인 한 번 잘못한 죄로 아슬란 공군에 강제 입대하게 된 신은 그처럼 끌려오거나 자원입대한 외인으로 구성된 비행단인 에어리어 88에 배속되는데 이 곳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길은 계약기간인 3년 만기를 채우거나, 감시를 피해 국경 밖으로 탈출하거나, 위약금 150만 달러를 지불하는 방법 뿐. 이것이 소위 '사인 하나로 지옥행'으로 요약되는 [에어리어 88]의 도입부 설정이다.


한데 따지고 보면 이 설정은 참 황당하다. 아무리 실력있는 파일럿이 희귀한 존재라 하더라도 외교문제를 감수하고 다른 나라 국민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서 자기네 나라 내전 최전방에 투입할 나라는 없다. 외교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강제 입대한 사람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되려 에어리어 88을 공격한다면 어쩔 것인가? 또는 먼저 이륙한 다음 공중에서 따라 이륙하는 아군기들을 격추하고나서 활주로를 폭격하여 추적을 따돌리고 연료가 허락하는 데까지 국경 밖으로 달아나는 일도 벌일 수 있다. 에어리어88의 비행기들에는 사격 통제라던가 유사시 외부 원격으로 자폭시킬 수 있다던가 하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끌려온 사람이 얌전히 3년 동안(전사하지 않을 경우에) 복무하고 나가주길 빌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병력 충원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에어리어 88에는 신처럼 멋모르고 끌려온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미키와 그레그, 캠벨같은 캐릭터는 모두 자원입대자이다. 시청자들은 이들이 자원입대했는지 끌려온 건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럼 왜 카자마 신에게는 구멍투성이의 문제 많은 도입부 설정이 필요했던 걸까?


그 이유는 아마도 일본인인 작가로서는 '일본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원입대해서 적들을 죽이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에어리어 88]은 2차대전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자신들이 스스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들어간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라는 인식이 있는 게 아닐까? 이 작품 만이 아니라 건담시리즈의 주인공인 아무로 레이와 카미유 비단,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같은 캐릭터들이 전쟁(또는 전투)에 임하게 되는 계기를 봐도 비슷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인 하나로 지옥행' 설정이 단순히 일본인 주인공을 전쟁에 참전하게 만드는 구실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참전이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해서 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신이 처한 상황의 비극성을 강화한다. 사실 비극이라기보단 자기연민이지만.


지옥의 1번지라는 에어리어 88에 떨어진 신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위약금 150만 달러를 벌어서(적에게 피해를 주는 만큼 돈을 버는 설정) 빨리 군 복무를 끝내겠다는 명목으로 누구보다도 효과적, 효율적으로 반정부군 군인들을 학살한다. 그러면서 거듭되는 살인이 지긋지긋하다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는데 그 과정에서 살인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료 파일럿인 제스가 작전 도중 피탄되면서 눈을 다쳐 앞이 보이지 않는 공포감에 아무한테나 기총 사격을 하며 난리치는 걸 보고는 뒤에서 기총 사격으로 공격해 죽여버리는 에피소드에서도 신은 동료를 죽였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을 하기는 커녕, 그 와중에도 전장에 오래 있다보니 살인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그 정도 일에는 무덤덤하게 반응하게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한탄할 뿐이다. 다만 후반부에서는 아슬란 군대에서 탈영하려다 붙잡혀 처형당하는 일본인과 신과의 만남을 통해 그런 이율배반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둘의 대화 이후에도 신이 참회하거나 하진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장면도 '원치않게 화약냄새가 풍기는 전장에서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그곳에 얽매이게 되어버린 불행한 남자'라는 신의 나르시시즘적 자기연민을 강화하는 쪽으로 수렴하고 만다. 


달리 생각하면 그런 반성같은 걸 하는 게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에어리어 88]의 본질은 현실에 존재하는 전쟁무기들을 장난감 삼아 신나게 갖고노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갖고 놀기 편한 가상국가(여담이지만 남코의 에이스컴뱃 시리즈는 이런 류의 설정을 극대화해서 최첨단 전투기를 가진 국가들끼리 허구헌날 전쟁질만 하는 최악의 지옥도 세계관을 만든 게임이다)를 설정하고 주인공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서 전쟁을 소재로 한다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것이다. 그것으로 부담감을 떨쳐낸 작품은 스스로의 탄생의 목적---전투기 공중전을 엄청난 스펙타클로 묘사하는 것---을 향해 질주한다. 전투기들이 미사일과 총탄에 맞아 터지고 박살나는 장면들도 화려하기 짝이 없지만 이 만화의 묘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실제 도그파이트에서라면 눈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상대 전투기 조종석에 총알이 꽂히는 장면을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여기서 적 전투기 조종사는 '인간'이 아니라 주인공 일행이 펼치는 공격에 피를 흩뿌리며 죽어가는 단순한 피사체로 그려진다. 그것들 중에 가장 적나라한 연출은 파일럿이 총격에 맞아 헬멧 안쪽으로 피가 부글부글 차오르다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 장면같은 것인데 그런 자극적인 장면들을 보다보면 이 만화의 제작진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절로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이 장면들은 전투기로 하는 칼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부분 미사일 공방으로 끝날 공중전에 그렇게 많은 기총사격과 선혈이 흘러넘치는 장면들이 나오고 심지어 비상탈출한 조종사를 기총으로 저격해서 죽이는 장면까지도 나오는 것이다. 즉, [에어리어 88]은 손에 칼을 든 대신 전투기를 조종하며 자신을 고용한 다이묘를 위해 싸우는 로닌들을 그린 현대판 사무라이 극화인 것이다.


전투기로 찬바라하는 것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그부분에서 [에어리어 88]은 나름의 미학을 추구했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이 만화의 액션씬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전혀 뒤떨어져 보이지 않으며, 전투 장면에서 터져나오는 배경음악은 적절히 감정을 고조시키고 화면에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 액션의 기반이 되는 주인공 신의 드라마는 허술한 변명과 자기연민으로 이루어져 있어 개연성을 잃고 겉멋과 나르시시즘의 뒷맛만을 남기며 나아가 액션의 당위성 마저도 상당부분 흔들어버린다. 아무리 가상국가란 설정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이렇게 좋아라고 즐겨도 괜찮은걸까? 라는 의문을 일깨우면서. 주인공의 자기연민에 공감하여 '신은 정말 불행한 남자였다...'는 식으로 이 작품을 기억하는 1세대 오타쿠들이나 공중전 장면의 오류 따위나 따지고 들었던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에 대해 얇디 얇은 감성으로 접근한 얄팍한 작품이라는 것이 [에어리어 88]에 대한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ps.

아... 샤키 바슈탈 까는 거 까먹었다.

이 자식은 지가 아슬란 왕국의 왕자이고 에어리어88의 사령관이면서 동료인 척 하고 있음. 탈영병 감시대가 왔을 때 자기는 감시대와 상관없는 척 하는 것도 웃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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