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최고의 블루레이 리스트를 올립니다. 2021년에는 일신상에 심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그 변화의 내용이 예년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신체적인 것이었습니다. 페북에도 쓴 것 같은데, 한마디로 [기생수] 의 신이치가 된 것 같은 체험을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동안 실제로 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저기 실례지만 누구세요?” 라고 묻고 싶어지고, 또 그 거울에 비친, 분명히 유전적으로는 나인데, 무슨 평행세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이 세계에 잘못 삼입된 버전인 나, 또는 [육체강탈자의 침략] 에 등장하는 식물외계인이 내 복제를 만들다가 잘못해서 2021년 초엽이 아닌 십몇년 전의 나의 모습으로 클론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대머리의 진전은 여전희 눈에 띄지만서도) 존재가 나를 다시 바라보면서 쓴웃음인지 비꼬는 미소인지를 짓는,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내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한지도 이제 25년이 넘었는데, 그 초기 무렵부터 나를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아닌, 대부분의 학생들, 동료들 그리고 지인들은 길거리에서 나를 마주치고 지나면 같은 사람인지 모르고 지나쳐버릴 정도의 과격한 변화였습니다. “변신” 이라는 표현이 별로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알 카포네역을 맡아서 체형을 완전히 바꾼 로버트 드 니로나, [머시니스트] 에서 뼈하고 가죽만 남은 모습으로 탈바꿈한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를 위해 쏟아부은 노력의 일단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면 웃으시려나요. 실제로 한 2년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랑하는 제자를 LA에서 만났는데, 걸어오면서 “어 저사람 교수님 아닌것 같은데… 맞나?!” 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먼발치에서 보이더군요. 신기하고도 재미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약간 무섭기도 한 체험이었습니다.


아무튼 2021년 후반부에는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통제하고 코로나 상황하에서 학문적-교수활동을 계속하는데 완전히 에너지와 신경을 거의 다 소비하고 지냈기때문에, (트위터와 한국 영화 관계 일도 거의 하지 못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듀게에다 옛날 리뷰가 되었건 새 리뷰가 되었건 글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요번에야말로 베스트 블루레이 리스트를 빵꾸내고야 말겠고나 하고 체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2022년으로 굴러 떨어지고 나자 (거지같기 한량없는 2021년으로부터 “굴러떨어졌다” 는 묘사가 적합하게 느껴지는데요), 이대로 끝내고 말것이냐, 누구 좋으라고, 라는 “반골” 이 또 고개를 드네요. 60-70년대의, 사람들이 열등감에서 발현되는 쫀심에 푹 고아져서 살던 나라 대~한민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끝없이 내 인생을 고통과 피로에 물들게 했던 이 못된 내 성격… 그냥 안하고 넘어가도 아무도 신경도 안쓰고, 망가식으로 말하자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일을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이 성벽이 어딜 가겠습니까. 아마도 사회에 무언가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기회라던지, 마감에 맞추어서 제출하면 큰 돈이 들어온다던지, 그런 합목적적인 이유가 달린 일이라면 옛날옛적에 포기했겠죠. 순전히 나의 영화덕질이 가져다주는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그 영화덕질의 가시밭길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만의 이정표를 꽂고 나아가고 싶은 그 아집, 그것이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2021년 베스트 블루 레이 리스트를 작성하게끔 밀어붙입니다. 야 Q, 넌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너 나이가 몇살이냐, 연구논문은 언제 쓸거냐, 라는 장탄식이 흘러나오다가도, Zokka, 나는 80넘어도 이지랄 할거거든? 너나 잘해라, 니가 사는 세상은 이미 미국의 소위말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원 학생들이 [오징어게임] 가지고 석사논문 쓰는 세상이거든? 너야말로 주제파악해라 色技야, 대~한민국 인터넷에서 무슨 까방권이 어떻고 뭔덕일 이런 유사역사학신봉자 쓰레기들 하는 소리 줏어듣고 해외 케이팝팬들하고 식민지제국주의자 못돼봐서 억울하다고 전쟁하고, 그런 썩은 과일 줏어먹고 사는 프레이리 포썸같은 인생 살지 말기 바란다, 라는 덕후버전 Q 의 잘 벼려진 칼날같은 반박에 상쇄되어 버리고 맙니다. 


2021년에도 상당수의 광학매체로 출시된 블루레이들을 여러 경로로 구입했고, 그 숫자는 2020년에 비해서 약간 줄어들긴 했는데 (특히 여름 동안에 건강/”변신”문제를 다루느라고 진짜 영화를 볼 시간도 별로 없었죠) 여전히 평균치보다 의미있는 변동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역시 2020년에 대활약한 레벨들이 2021년에도 코로나고 나발이고 개의치않고 말도 안되는 수준의 박스세트들과 복원판들을 쏟아내었고, 나는 이들을 절판되기 전에 사모으고 또 그 내용을 확인하고 하는데 여전히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었네요. 2021년말에 정산을 시작할 때에는, 세버린에서 출시한 Folk Horror 15장 블루레이 컬렉션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는데, 이 무지막지한 타이틀은 2022년의 후보로 넘기기로 하고, 2021년도 출시작 심사 마감은 애로우 비데오의 Shawscope Collection 이 택배로 도착한 시점에서 끝내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안 그랬다가는 2월초까지 넘어가도 해결이 안 날것이 뻔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포크 호러 컬렉션에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제한된 시간내에 제대로 평가할 수도 없었습니다. 


작년의 트렌드에 대해서 이러구러 잡담을 늘어놓을 수도 있는데, 뭐 잔가지는 그렇고, 기본적으로는 블루레이와 4K UHD 블루레이의 출시는 양적인 미세한 변동을 차치하면 여전히 구매자나 덕후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유의미한 결론이 되겠지요. 크라이테리언에서도 마침내 4K UHD 로 갈아탄 만큼, 이 포맷도 옛적의 붉은색으로 표상되던 HD 디스크처럼 사그라져서 없어지려면 당분간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내가 요번 겨울학기에 “역사와 한국 영화” 라는 세미나를 시도해보고 있는데, 정 브라더스의 [기담] 같은 한때 넷플릭스에도 걸렸던 나름 유명한 작품들이 불과 15년 사이에 인터넷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미국에서 교재로 쓸 수 있는 영어자막이 달린 버전에 한정해서 하는 말임). 인터넷에서도 저작권이나 상업적 고려와 관계없이 30년, 50년을 잡고 계속 볼 수 있도록 아카이빙을 할 목적으로 영화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생기지 않는 이상, 물리 매체의 귀중함은 빛이 바래지 않을 거에요. 내가 언제 얘기했듯이, 나는 22세기에 광속우주선 타고 이동하는 우주선의 승무원들도 비데오 파일이 아닌 물리 매체로 고전영화를 감상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둥그런 광학디스크에다가 영화를 담아서 보지는 않겠지만. 


이 부분은 매년 재사용하는 글입니다만, 이 리스트에서 "최고" 라는 표현은 영어에서 말하는 My Favorite 의 번역으로 받아들여주시길 바라고, 영화사적, 미적, 예술적 가치, 유명세, 심지어는 나의 개인적인 영화적 가치의 평가의 높고 낮음과도 관계없이, 나에게 "놀람" 과 "발견 (또는 재발견)" 의 경험, 다시 말하면 충격과 경외감을 안겨준 타이틀들이 우선적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리스트를 처음 읽으시는 분들께는 이 목록은 "죽기 전에 봐야 하는 영화 백편" 같은 류의,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벼룩의 성기 정도로 아는 치졸한 "리스트" 와는 대척점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여기에 선정된 영화의 일부는 "영화사에 남는 명작" 은커녕 일반 평론가나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 취급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 이유로 2021년에 출시된 타이틀 중, 눈물이 주르르 흐르게 위대한 작품이거나 (많은 크라이테리언 출시작들), 또는 황당함이나 어처구니없음을 포함한 뛰어난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들 (한 예를 들자면, 다리오 아르젠토의 [트라우마] 등) 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발견”의 매운맛을 보게 해주는데는 조금 미흡했던 타이틀들은 순위권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면 리스트로 진입해 볼까여. 언제나처럼, 영화의 타이틀은 될 수 있는 한 네이버에서 확인한 한국 공개 제목을 가져다 썼지만, 제목이 적당히 영어를 발음표기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엉망인 경우에는 dog 무시하고 내가 번역해서 붙였으니까, 영화가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한국어 제목이 아닌 영어나 제작된 나라의 언어 타이틀로 검색하시기 바랍니다.



20. 처녀와 괴물 Panna a netvor (1978, Region Free- Second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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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체코슬로바키아의 SF-판타지 작품들을 논할 때 가끔 언급이 되곤 하지만 그 실체는 오래도록 확인할 수 없었던 한편이죠. [화장사 Cremator] 라는 사회풍자적 필름느와르의 걸작 (캐릭터들이 너무나 비틀려 있어서 일종의 이상심리 호러영화로 다가오는 그런 한편입니다) 을 만든 유리 (“유라이” 라고 읽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헤르츠 감독은, 오랜 검열당국과의 투쟁을 거친 끝에,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 아동용 영화를 기획하는 프로젝트에 어떻게 말려들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미녀와 야수]— 예, 바로 그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 스토리 말입니다— 의 영화화였던 것이죠. 그 결과물은 당연하게도 어린 아이들이 평생동안 악몽에 시달릴 만한 이미지들— 부패와 퇴락, 그리고 폭력의 연쇄를 화면 가득히 그려내는— 로 가득찬 문학적 호러영화로 귀결되었습니다. 체크 국립영화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네거티브에서 트랜스퍼를 땄지만, 아쉽게도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다른 70년대 이후 타이틀들의 비까번쩍한 화질에 비하면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이크 화이트, 샘 데이건 그리고 캣 엘린저가 참여하는 생동감 넘치는 코멘터리를 위시하여 역사적인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조나선 오웬의 인서트 에세이, 그리고 [미녀와 야수] 설화를 근대문학으로 재구성했던 체코의 시인 프란티섹 흐루빈에 관한 단편 등, 충실한 서플이 이러한 아쉬움을 덮어주고도 남음이 있네요. 


19. 경이로운 축소인간 The Incredible Shrinking Man (1957, Region A- Criterion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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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에 제작된, “반전” 을 집어넣은 장르적인 아이디어로 대표되는, 헐리웃의 영화나 TV 매체를 통해 아마도 가장 영향이 컸던 SF-판타지 작가 세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중에 포함되지 않을 수 없을 리처드 매시슨의 대표작 중 하나를, 1950년대풍 괴수영화 찍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는 방식으로 그 방면의 전문가 잭 아놀드가 감독하여 만들어진 한편이지만, 크라이테리언에서 4K 로 복원된 비주얼로 다시금 감상하니, 그 철학적인 깊이와 놀랍도록 모더니즘적인 외양에 커다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구많은 북미 SF 영화중에서도 특필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답고 뭉클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그 다시 받는 감동의 백미에 해당될 것이겠죠. 모처럼 [얼굴없는 마귀] 나 [에퀴녹스] 등 크라이테리언 초기의 펄프-장르적 취향에 회귀한 서플멘트의 면면 (코멘터리를 맡은 톰 위버, 조 단테 감독의 회상 인터뷰등) 도 반갑습니다. 


18. 고양이의 눈 Eye of the Cat (1969, Region B- Powerhouse Indic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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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학적으로 가치가 더 있을 파워하우스 인디케이터의 많은 타이틀들을 물리치고 이 솔직히 말하자면 일회성 기믹으로 죽고 사는 (피가 뚝뚝 흐르는 날고기를 먹여서 키운 고양이떼와 유산 다툼을 벌이는 못된 훈남훈녀들!) 60년대성 펄프 스릴러를 리스트에 넣었냐고요? 이 한편이 그렇게 이상하게 끌리는 데가 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근방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케이션 촬영) 에서 제작되어서 눈에 익은 풍경이 마구 나타나는 것도 있고, 분할화면을 다용한, 지금 이런 식으로 만들면 일부러 비꼬아서 패러디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스타일의 과잉이면서도 매력적인 비주얼도 있고, 심지어는 랄로 쉬프린의 [제5전선] 을 방불케하는 서스펜스 만점의 음악까지도, “어, 내가 명화극장인지 그런 TV 프로그램에서 옛날옛적에 감상했을 때 이랬던가?” 라는 놀라움과 일종의 포근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기시감을 동시에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있는 감상 경험이었네요. 


인디케이터는 미국의 메이저 회사들 입장에서는 그냥 끼워팔기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을 라이브러리 타이틀에도 빼곡하게 서플을 끼워넣는데, 요번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양이떼하고 양아치-노는여자 커플이 노인네 유산을 놓고 투쟁을 벌이는” 내용의 60년대 미국 영화에다가 36페이지가 넘는 비평글 소책자를 끼워넣는 레벨은 솔직히 전세계에 인디케이터밖에 없겠져. 영상자료원에서도 언젠가 [원한의 두꼽추] 같은 타이틀들을 4K 스캔 블루레이로 내주시고 이정도 소책자 첨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17. 죽음의 차가운 호수 The Cool Lakes of Death- Van de koele meren des doods (1982, Blu Ray- Region Free, Cult E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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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 역시 주연 배우 르네 수텐디크의 경력을 논할때에 그를 최소한 네덜란드 국내에서 일급스타로 발돋움하게끔 만들어준 작품으로써 언급된 것을 지나치듯 몇번 읽은 경험이 있습니다만, 북미에서는 VHS로라도 출시된 것을 본 기억은 없습니다. 요번에 4K 트랜스퍼된 고화질의 영상을 새로 마련한 블루 레이로 감상하게 되었는데, 잉마르 베르이만 등의 스웨덴 영화나 60-70년대의 뉴 저먼 시네마, 그리고 “품격 있는” 영국산 마스터피스 씨어터풍 고전문학의 각색판 TV시리즈 등의 다국적 스타일이 녹아들어있음에도, 그 감각적인 비주얼과 직설적인 묘사 스타일에서 네덜란드영화적인 특질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하는 감회를 가져다주게 해줍니다. 네덜란드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70년대 이후 유럽영화를 논할 때에 자주 언급되지 못하는 인상이지만, 유럽 페미니스트 영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여겨지는 누쉬카 반 브라켈 감독의 작품을 처음 감상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잊을 만 하면 다른데에서는 내놓지 않는 이색작을 툭하고 투여하면서, 어쨌건 베스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곤 하는 컬트 에픽스 레벨의 회심의 출시작입니다. 


16. 카밀 키튼의 이탈리아 영화 컬렉션 Camille Keaton in Italy (1972-1974, Region Free- Vinegar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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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덤에 침을 뱉노라] 라는 전대미문의 착취성호러영화에 주연하면서 악명을 드높였던 카밀 키튼은 일부에서 버스터 키튼의 손녀딸인것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내가 이제까지 확인한 바로는 버스터의 가계와 친족관계가 있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은 듯 합니다. 키튼은 7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솔랑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라는 꽤 저명한 지알로에 조역이지만 중요한 역할로 출연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몇 편의 호러영화들에 주연을 맡았습니다. 지알로나 70년대 유럽 호러의 광팬인 분들을 제외한 관객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타이틀들 중 세편— [비극의 의식], [마들렌], [마녀의 섹스]— 을, 씨네필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말도 못하게 추잡하고 널널하고 정치-사회비판의식 따위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만, 또한 의외의 도전적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하는 착취성 필름들의 멀끔한 복원과 출시에는 일가견이 있는 비네가 신드롬에서 오리지널 네거티브로부터 새로 4K 트랜스퍼한 컬렉션으로 내놓았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영화들 자체는 허접하고, 비논리적이며, 만듦새에 있어서도 심각한 한계를 노정하기도 하지만, 카밀 키튼이 솔선수범하여 참여한 코멘터리를 비롯한 고퀄의 서플을 비롯하여, 그 패키징은 착취성유럽영화의 배배꼬인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이 이슬처럼 맺혀서 뚝뚝 떨어집니다. 


한때는 [솔랑주] 나 [당신의 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같은 나름 유명 타이틀들도 제대로된 화질의 디븨디로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한 “그레이 마켓 비데오” 시절에 대한 노스탈지어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타이틀로서 (70년대의 한국 극장에 걸렸음직한 간판풍의 요란하고 투박한 그림체를 재생한 패키지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요번 리스트에도 한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15. 지옥에 떨어진 용자들 La caduta degli dei (1969, Region A- Criterion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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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해주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는데, 제가 비평적으로 가장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럽영화 서브장르중 하나인 퇴락한 에로틱 파시즘 (릴리아나 카바니니의 [나이트 포터] 등으로 대표되는 “나찌 에로 예술영화” 도 포함해서) 이라는 접근 방식을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가 건드린 문제작입니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무삭제판으로 출시한 디븨디를 감상한 이후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내용과 전개 및 철학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틀어보게 되는 그런 자력 (“마력” 이라는 표현은 별로 쓰고 싶지 않네요) 을 지닌 영화이기도 합니다. 크라이테리언의 사양은 비스콘티 후기 작품의 작가주의적 분석이라는 정통적인 비평적 관점에 충실하고, 뭔가 파격적인 재해석이라던지 그런 내용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인 영화학자 스테파노 알베르티니의 비스콘티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고뇌와 [지옥에 떨어진 용자들] 의 성정치의 표상을 결부시킨 분석이 흥미로왔습니다. 카메라에 잡히는 연기자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현대적” 으로 편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의상디자이너 피에로 토시가 그들의 속옷까지도 다 30년대 스타일로 만들어서 입히고 촬영했다는 그런 에피소드는 여기서 처음 들었군요. 


14. 외팔이 드라곤 One-Armed Boxer 獨臂拳王 (1971, Region B- Eure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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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극장에서 관람하면서 영화의 비평적 명성과는 관계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들을 다시 블루레이로 재감상하는 경험은, 처음에 극장에서 관람했던 당시 느꼈던 임팩트만큼이나 다양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성룡이라는 전무후무한 스타가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하기 이전의, 국민학교 (초등학교가 아니라) 와 중학교 시절에 혜화동 로타리의 M 극장이나 삼선교의 D 극장같은 허름하지만 로망이 담긴 재상영관에서 그야말로 수도 없이 보았던 “무술영화” 들을 통해 그 존재를 각인시켰던 홍콩영화스타중 하나가 왕우입니다. 그 왕우의 작품군중에서도 특히 거의 아방가르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격하고 집요하게 신체훼손과 타격의 파괴성을 강조하며, 마치 무협영화올림픽같은 스타일로 남-동남-동아시아 각국의 고수-괴인들이 (카라테의 대가인 일본인 악당은 아예 드라큘라처럼 송곳니가 뻐드러진 귀면 [鬼面] 의 용자로 등장합니다) 벌이는 한껏 과장되고 전혀 리얼하지 않은 “무술” 액션의 현란함 덕택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한편이죠. 솔직히 그리 잘 만들어진 한편이라고 할 수는 없을 지 모르지만 (왕우 자신이 감독도 맡았습니다), 고가를 지불하고 어렵사리 구매한 적이 있는 일본판 블루레이를 능가하는 복원판 화질에다가 영어판 오디오, 뉴욕 영화제의 쿵후영화 전문가 프랭크 정의 코멘터리와 기타 엑스퍼트들이 집필한 소책자등, 유레카 레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차원높은 서플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재구매하기가 아깝지 않은 타이틀입니다. 


13. 문신 Irezumi 刺青 (1966, Region A-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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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우 비데오의 명장 마스무라 야스조오 작품들의 출시는 2021년에도 쾌진격을 계속했고, 그의 명작들 [거인과 완구] 또는 [맹수 (盲獸)] 의 블루레이 판본도 이 리스트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실제 초이스는 영국에서 디븨디로 나온 이후로는 소식이 묘연했던, 타니자키 준이치로오 단편을 또하나의 거장인 카네토 신도오가 각색하고 마스무라가 연출을 맡은 [문신] 으로 낙착되었습니다. 나는 내 전공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이 한편을 보고 싶었지만 놓쳐왔기 때문에, 카도카와에서 4K 로 새로이 복원한 판본을 다시 런던에서 애로우가 손을 보고, [에로스 플러스 학살] 의 저자 데이빗 데서 교수님과 평론가 토니 레인즈를 위시하여 학자-평론가들의 분석과 품평이 첨부된 이 블루레이를 그냥 두고 넘어갈 수가 없었네요. 카네토의 각본은 타니자키 소설의 영상화라는 측면에서는 찬부양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타니자키의 영화화작중에서 그러한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은 한편은 아마 없겠죠), 요염한 그림자와 진하게 가라앉았으면서도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색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일급 촬영감독 미야가와 카즈오의 빨레트를 배경으로, 2.35:1 와이드스크린을 완전히 장악하는 위대한 여배우 와카오 아야코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탐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평적인 왈가왈부를 무색하게 만드는 한편입니다. 


12. 출입금지된 문 The Forbidden Door- Pintu Terlalang (2009, Region Free- Severin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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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은 제대로된 블루레이를 구하려면, 인도네시아 호러영화가 지금보다 더 융성해져서 북미시장을 돌파한다든지 그런 새로운 트렌드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어딘가 홍콩이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마이너 레벨에서 출시된 디븨디라도 구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고 체념을 하고 있던 타이틀입니다. 그런데 웬걸, 다른 레벨도 아닌 세버린에서 각본-감독 조코 안와르의 영어 인터뷰와 코멘터리를 집어넣은 엄청 충실한 고퀄 블루레이로 덜커덕 출시해 줬네요. 이 아니 기쁠소냐! 영화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늘어놓기로 하고, 일단 호러영화의 광팬이라면 도무지 버텨낼 재간이 없는 취향과 설정과 전개의 퍼레이드고, 그 때로는 과잉으로 넘쳐나는 장르적 결기와 야심에 있어서 [장화 홍련] 이나 [지구를 지켜라!] 를 연상시키는 한편이라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11. 투명인간 나타나다/투명인간 대 파리사나이 透明人間現る・透明人間と蠅男 (1949-1957, Region A-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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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장르영화 발굴하기에 관한 한, 바야흐로 다른 모든 회사들을 제치고 북미뿐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당연한 얘기지만, 일본 국내안에서의 출시 빈도와 퀄리티를 비교해서도 마찬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헤게모니를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애로우에서 [가메라] 그리고 밑의 [대마신] 같은 비교적 유명작이 아닌, 사실상 일본 바깥에서는 들어본 사람들도 별로 없을 토오에이의 전후 초기 특촬영화 ([투명인간 나타나다] 는 1949년 제작입니다. [고지라] 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서있군요) 들까지도 감상할 수 있게 해주고 있군요. 그 역사자료적인 가치로 보나, 장르적인 감칠맛으로 보나 전혀 예상도 예측도 할 수 없었고, 출시해주기를 바란다는 염원까지도 가질 수 없었을 정도로 희귀한 타이틀이고, 애로우가 아니라면 과연 이런 영화들을 안방에서 HD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기나 할런지요 (일본에서 설사 블루레이가 출시된 다 하더라도, 품질의 보증도 힘들 뿐더러 미국 판본들의 너다섯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할 것이겠죠). 단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10. 대마신 삼부작 大魔神・大魔神怒る・大魔神逆襲 (1966, Region A-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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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우에서 새롭게 내놓은 쇼오와기 [가메라] 시리즈 컬렉션은 아깝게도 구입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지만, [대마신] 시리즈는 나오는대로 그자리에서 찜해놓았다가 빨리 사들였습니다. 이미 염가 레벨 (이지만 나름 쇼오와기 [울트라맨] 시리즈를 전부 블루레이로 내놓는 등 특촬덕후들에게는 점수를 많이 따지 않을 수 없는) 밀 크리크에서 HD 화질로 출시된 기존의 타이틀이긴 합니다만, 애로우의 마치 고전 문학의 애장본을 방불케하는 외장과 일곱명의 평론가-영화학자-특촬영화광팬들이 집필한 에세이들을 19세기 우키요에를 연상케하는 일러스트레이션과 더불어 95페이지나 되는 갱지 “소” 책자에 수록하는 등의 덕후도가 거의 광적인 레벨에 도달하고 있는 서플 등을 고려하면, 두번째 (디븨디까지 포함하면 세번째) 같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르는 것이 전혀 고되지 않습니다. 요번 리스트에서는 지난해와 더불어 컬렉터들의 심장박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올리는 박스세트들이 적지 않은데, 그 단초를 끊는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9.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다/살인범 수배 Cast a Dark Shadow/Wanted for Murder (1946-1955, Region A- Cohen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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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디스크는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아마존에서 문자 그대로 제목과 “영국제 필름느와르” 라는 카버에 적힌 문구만 읽어보고 덜커덕 구입했습니다만, 덕택에 요번 리스트의 “눈가리고 그냥 사봤는데 너무 좋더라” 또는 “왜 이영화를 나만 모른거야?” 섹션의 필두를 차지하는 타이틀이 되었군요. 두 작품 다 고전 영국 추리소설을 연상시키는 교묘하면서도 일면 고풍의 화술이 2차대전이후에 불거지기 시작한 현대적인 필름느와르 감성과 결합되면서 생기는 시너지효과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활동사진들인데, 특히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다] 의 채플린의 [살인광시대] 의 주인공을 보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영국적이면서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 것 같은 캐릭터를 그려내는 더크 보가드의 명연이 감탄을 자아냅니다. 역시 잊을 만 하면, 정산 리스트에 타이틀 하나 정도는 반드시 끼워넣고야 마는 코엔 미디어의 출시작입니다. 


8. 앤디 밀리건의 지하감방 컬렉션 The Dungeon of Andy Milligan Collection (1968-1998, Region Free- Severin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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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컬렉션은 북미에서 활동하는 컬트 영화에 대한 수집가나 연구자라면 다른 모든 타이틀들을 완전히 제쳐놓고 무조건 1위로 뽑아야 하는 물건입니다. 앤디 밀리건은 움베르토 렌찌나 루게르토 데오다도 같은 식인종 호러따위를 대량생산한 이탈리아의 착취성감독들을 세련된 영상예술가로 보이게 할 정도로, 점잖은 관객들에게는 결코 보여질 수 없는 언더그라운드의 추잡한 음지의 영상세계와, 쪽팔림이라고는 1 옹스트롬도 찾아볼 수 없는 착취성 저예산, “저질” 상업영화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드나들던 “영화작가” 이죠. VHS 로도 제대로 대접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는 이 뉴욕에서도 스테튼 아일랜드 출신의 문제적 감독의 제작들— 프린트도 제대로 남아나지 못하고, 농담이 아니라 요즘 웬만한 한국 연극영화과의 학생들이 엄마한테 용돈 타가지고 친구들과 아이폰으로 제작한 과제물 단편보다도 기술적수준이 떨어지는 제작여건 등의 불리한 여건들에 의해 몽땅 매립지의 쓰레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져야 마땅했을— 을 크라이테리언이 루키노 비스콘티나 페데리코 펠리니의 예술작품에 쏟아붓는 열정과 세심함을 기울여 제작해낸 세버린의 노력에 한치의 과장도 없이 고개가 숙여집니다. 


7-6. 야수의 날/페르디타 듀랑고 El dia de la bestia/Perdita Durango (1995-1997, 4K UHD- Severin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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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버린이 또오;;; 어쩌려고 이러시는지들. 스페인의 이재 (異材)— 라고 쓰면 근사하게 들리는데 사실 “삭막하게 병맛이 든 괴장 (怪匠)” 같은 묘사가 더 어울린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당— 알렉시스 데 이글레시아의 출세작 [야수의 날] 과 아마도 “민주화” 된 80년대 이후의 세상에서 내가 아는 한도에서 유럽과 미국에서 동시에 가장 많은 검열을 당한 결과 원래 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유명영화의 탑 리스트에 항상 들어가는 [페르디타 듀랑고] (이 타이틀은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를 그냥 특별판도 아니고 4K UHD 로 동시에 내놓았습니다. 이건 뭐 컬트 영화 컬렉터들에게는 숨이 꼴깍 넘어갈 만한 행위인데, [페르디타] 의 그 PC 성에 소변을 쏴깔기는 거의 광적인 과잉성을 이렇게 깨끗하고 솔직히 말해서 “아름다운” 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에 더해서, 데 이글레시아가 직접 나서서 깊숙히 관여한 서플들로 꽉 들어찬 [야수의 날] 디스크의, 이걸 한번 보고나면 느네들 현대 호러-판타지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걸? 이라는 세버린 제작팀의 패기가 후끈한 열기처럼 디스크에서 방사되는군여. 앤디 밀리건 컬렉션은 사실 나같은 특이한 영화감상의 백그라운드가 없으신 분들 (특히 80년대 이후에 출생하신) 께는 추천드리기가 조금 망설여지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이 [짐승의 날] [페르디타 듀랑고] 부터 6위 이상으로 올라가는 타이틀들은 영어를 얼마나 잘 알아들으시는가 그런 여부에 상관없이, SF-호러-판타지-필름 느와르에 일가견이라도 지니고 싶으신 분들께는 진짜 아무런 조건 안 달고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5. 악몽의 뒤안길 Nightmare Alley (1947, Region A- Criterion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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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은 이미 M의 데스크에다 구 듀나게시판의 리뷰를 약간 수정한 업데이트 버젼을 올렸기 때문에, 구구하게 칭송을 늘어놓지는 않겠고,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블루레이 판본에 대한 기술의 일부를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블루 레이는 UCLA에 보존되어 있는 질산염 합성 프린트 (사운드와 영상이 따로 수록되어 있는) 를 4K해상도로 스캔한 디지털 트랜스퍼를 새로이 [떠낸 판본입니다. 디븨디에 수록되어 있던 필름느와르 전문가] 어시니와 실버의 코멘터리 트랙도 가져왔고, 새로 갖추어진 서플도 충실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코멘터리보다도 이모젠 사라 스미스연구자가 영화에 관련된 이모저모를 해설하는 비데오 인터뷰가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더 흥미롭고 정보가 풍부했는데요. 원작자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불운한 인생에 대한 얘기도 나옵니다만, 그의 자살과 (영화나 소설의 상업적 실패와는 별 관계가 없고 말기암 환자 진단을 받은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만) 다른 스탭들에게 닥쳐온 불행때문에 한때 “저주받은 작품” 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 외에 미국의 카니발 전통에 대해 역사책을 집필한 토드 로빈스 인터뷰, 2007년에 녹음된 콜린 그레이 (이제는 고인이 되셨음) 인터뷰, 1971년에 녹음된 헐리웃의 노장 헨리 킹이 타이론 파워에 대하여 회고하는 오디오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채를 띄는 것은 배우이자 영화평론가, 각본가인 킴 모건이 기본적으로 왜 이 작품이 그렇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악몽” 이라고 부를만한 위력을 지녔는가를 칭송하는 인서트 에세이인데, 왜 이 분이 흥미롭냐하면 2021년에 [개봉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이 바로 이 [악몽의 뒤안길]의 리메이크고, 그 각본을 집필했기 때문입니다. 델 토로가 어째서 이 한편에 매료되었는지는 너무나 잘 이해가 갑니다만, 원본이 너무나 그 자체로서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뭔가 모자라는 부분을 과연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을 떨칠 수 없네요. 마지막으로 영화 안에서 지나가 읽는 타로 카드가 중요한 플롯상의 역할을 합니다만, 리카르도 디세뇨라는 분이 작업한 거꾸로 매달린 사나이 (더 행드 맨/스탠, 블루 레이의 카버에 쓰인 그림), 마법사 (더 매지션/지나), 황제 (더 엠페러/릴리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분은 여성이지만 “황후” 의 이미지가 전혀 아닙니다), 죽음 (데스/피터), 별 (더 스타/몰리), 운수의 바퀴 (휠 오브 포츈/카니발 자체), 이렇게 다섯 캐릭터와 배경를 표상한 타로의 메이져 아카나 카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멋집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결코 수수하거나 미니멀하지 않게, 크라이테리언답게 충실한 내용과 유려한 디자인의 블루 레이입니다. 


4. 석상 여인들의 풍차 Il Mulino delle donne di pierta (1960, Region A-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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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이전에도 여러번 한 것 같은데, 2000년대의 디븨디 혁명을 주도했던 영화작가를 두 사람 꼽으라고 누가 주문한다면 나는 오슨 웰즈, 쿠로사와 아키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런 분들 다 제쳐놓고 다리오 아르젠토와 마리오 바바를 고르겠습니다. 후기작을 실시간으로 극장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아르젠토와 달리, 바바의 경우는AFKN 에 방영된 흑백화면으로 어린애들이 잠에 들기에 적합한 시간을 한참 지난 늦은 밤에 퀭한 눈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이불 사이로 빼꼼하게 눈만 내밀고 감상했던 [사탄의 가면], [피와 검은 레이스] 등의 호러-스릴러의 걸작들을 통해, 당시에는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 이라는 게 뭐하는 직업인지도 모른채, 처음 인상에 각인되었었죠. 그 당시에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호러영화가 바로 이 [석상 여인들의 풍차] 입니다. 


몬도 마카브로에서 이미 2004년에 디븨디로 출시했던 전력이 있고, 그 당시에 이미 몇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 처음으로 북미의 티븨에 공개되었던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흑백 버전도 당연히 이 판본이었겠습니다) 축약본이 아닌 이탈리아 국내 공개판본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일별만 해도 애로우에서 남다른 애정을 쏟아부었다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 스페셜 에디션에는 그냥 “복원판” 정도가 아니라 이탈리아어의 공개판, 당시에 수출용으로 준비한 영어 더빙판, 프랑스어로 새로 녹음하고 누드신등을 비롯한 다른 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신들이 삼입된 유럽수출판, 그리고 다른 종류의 영어 대사를 입히고 신규의 편집을 통해서 내용이 미묘하게 달라진 미국 TV 판 등 네 종류의 판본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기본이고, 팀 루카스, 캣 엘린저를 포함한 장르영화 광학매체계의 탑클래스 비평가들이 참여한 서플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해서 이건 뭐 웬만한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막대한 돈을 때려박아서 작성하는 선전용 자료를 완전히 무색케 만드는 자켓 디자인과 “소” 책자 (이것도 어디가 “소” 책자냐?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 ^) 의 멋짐이란! 이건 진짜 뭐 말이 안돼요 한마디로. 


3. 쇼우스코우프 컬렉션 제 1집 Shawscope Collection vol. 1 (1972-1979, Region A-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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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랭킹까지 올라오면 왜 이게 1위가 아니냐라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고요. 그냥 내 취향이 정하는 겁니다. 기획 자체의 역사적, 덕후적 시의성과 의의는 금메달 정도가 아니라 백금메달을 두서너개 받아도 모자라는 정도라는 데에는 토를 달 여지가 없고요. 이 컬렉션에 대해서도 썰을 풀자면 한도 끝도 없을 터이니, 다음 기회로 역시 공수표 써서 넘기고, 한마디만 하자면 홍콩의 Celestial Pictures 나 그런 데에서 지금까지 내놓은 중에서 간혹가다 보이는, 지나치게 뺀딱뺀딱하고 인공적으로 다가오는 HD 트랜스퍼의 화질이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일 정도로 개선되어 있는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열두편이나 되는 컬렉션의 수록작들을 다 자세히 비교할 수는 당연히 없었지만, 과거에 다른 회사들에서 출시된 판본들을 소유하고 있는 [천하제일권], [오독], [잔결 Crippled Avengers] 은 이 애로우 판본에서 그 차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무협-홍콩영화의 팬이시라면서 이 한편을 구입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더이상의 잔소리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겨우 70년대의 유명작을 훑은 정도의 1집이라는 사실… 그 사실만 던져놓죠. 


2. 디프 카버 Deep Cover (1992, Region A- Criterion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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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학수고대했다가 마침내 블루레이로 출시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걸작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저의 2021년의 일순위는 바로 이 [디프 카버] 입니다. 제프 골드블럼과 로렌스 피쉬번의 생애 최고의 연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만도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어번 필름느와르-범죄영화의 걸작이지만, 공개 당시에는 제가 볼때는 여러모로 뒤떨어지는 작품들인 휴즈 형제들의 [Menace II Society]나 스파이크 리의 [정글 피버] 등에 가려져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었죠.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보자면 고전적인 필름느와르 및 시드니 루멧풍의 경찰 범죄 드라마의 컨벤션을 원용하면서도, 대도시게토속의 불이익과 퇴락, 레이건시대의 인종차별주의와 양극화, 심지어는 [시카리오] 등의 최근작들에 몇십년 앞서서 마약과 전쟁한다고 떠들어대면서 사실은 그 상업적인 네트워크에 얼키고 설키면서 연루된 미국 정부, 정치 세력들과 기업들의 위선을 이렇게 적절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이클 톨킨이 집필한 각본의 그 뛰어나면서도 스타일리쉬한 대사와 캐릭터들의 구축은 박찬욱감독의 [올드보이] 나 봉준호감독의 [마더] 등을 연상시키면서도, 미국 장르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직설적인 파워를 보여줍니다. 수십번봐도 질리지 않는 걸작입니다. 부가영상도, 신세기 들어서는 감독보다는 배우로 더 많은 일을 한 빌 듀크 감독과 이제 원로가 된 로렌스 피쉬번의 대담을 비롯하여, 진지하고 학구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 크라이테리언 서플의 백미를 보여줍니다. 


1. 크리스토퍼 리의 유러크립트 컬렉션 The Eurocrypt of Christopher Lee Collection (1962-1972, Region Free/Region A- Severin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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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금년의 제 1위를 차지한 타이틀은 바로 이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리 정도 되면 정말로 단역의 수준으로 얼굴을 내민 평범한 전쟁물이나 형사물로부터 시작해서, 선생님께서 등장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초저예산의 망작들까지 (캐나다산 [Starship Invasion], 예를 들자면) 그야말로 무수한 장르영화들에 연루되었던 거인이고, 해머 호러를 위시해서 그 대표작들은 대부분 디븨디 뿐만 아니라 블루레이로도 이미 선을 보인바 있습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크리스토퍼 리 주연작을 끌어모아서, 북미 팬들에게 반드시 손에 넣아야 하는 필수소장용 컬렉션으로 여겨질 수 있는 수준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사업이었죠. 그러나 세버린에서는 이걸 해냈습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황당한 수준의 고화질 복원 트랜스퍼는 말할것도 없고 (특히 도널드 서덜랜드의 데뷔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송장들의 성]! 흑백영화들의 복원이 칼러영화들보다 훨씬 더 기가 차는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죠), 역시 97페이지에 달하는 조나산 릭비가 집필한 “소” 책자부터 트로이 하워스, [몬도 디지탈] 의 나타니엘 톰슨, 캣 엘린저, 킴 뉴먼등의 화려하기 이를데없는 코멘터리 진영까지, 그야말로 이런것이 애장판 블루레이 컬렉션이다, 라고 모범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쇼우스코우프] 제 1집도 앤디 밀리건 컬렉션도 다 물리치고 이 박스세트가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의 장르영화덕후로서의 정체성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겠죠. 나에게는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이야말로, 다른 어떤 나라의 어떤 연기자들보다도 다시 한번 그 모습을 스크린에서 뵙고 싶은 스타중의 스타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 요번에도 어떻게 어떻게 리스트 작성을 완성했네요. 올해 (작년) 의 최우수 레벨은 당연하게도 세버린 필름스고요. 사실상 애로우가 다시금 왕좌를 차지해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2021년에만큼은 세버린에게 월계관을 바치고 싶습니다. 언제나처럼 이 리스트를 여기까지 스크롤해서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이 연례 리스트가 여러분의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는 행위에 쌀한톨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진정으로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신다면, 여러분께서 태어난 연도보다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반드시 찾아보시기를 권장드립니다. 그러면 2023년초에 2022년에 출시될 눈이 삐고 턱이 땅에 떨어질것 같은 경악과 충격의 블루레이 리스트를 가지고 또 다시 뵙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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