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야말로 한국어로 된 2022년 최고의 블루레이 리스트를 올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마지막의 힘을 짜내서 3월이 다 되어서라도 올리기로 합니다. 듀나게시판에서는 사진을 올리는데 너무나 힘이 들어서 대문의 단체사진을 제외하면 사진 생략하고 블로그 M의 데스크 블로그에만 넣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정보수정: 올려놓고 보니 영어버전 단체사진이네요. 너그러이 봐주세요 ㅠㅜ]


'23 MY FAVORITE BLU RAYS 3.3.23


2022년에서는 판데믹이 잦아들면서 극장 상영작의 관람 횟수는 의미 있게 늘어난 반면 블루레이와 4K UHD 의 구입 숫자는 한 10% 정도 줄어들었습니다만, 여전히 스무장으로 추려서 선고하는데 엄청나게 힘들었고, 많은 블루레이들이 선출권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극장 상영작의 관람횟수와 더불어 VOD 로 본 영화의 숫자도 물론 많이 늘어났죠. 그러나 난 여전히 웃돈을 주고 넷플릭스에서 블루 레이와 디븨디 렌탈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산호세 (“새너제이” 가 아니고. “아륀지” 아니고 “오렌지” 라고) 에서 넷플릭스가 블록버스터 비데오에 대항해서 연체료 안내도 되는 메일로 보내주는 디븨디 렌탈 서비스로 창업했을 때부터의 이른바 “파운딩 커스터머” 입니다. 나같은 노털들이 여전히 구매력을 구비한 채 존재하는 이상, 블루레이는 말할 것도 없고 디븨디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지지 못할 거죠. 


언제나처럼, 이 리스트에 올라간 타이틀들은 그해 최고의 복원이라던가, 역사적이나 미적인 가치, 또는 평론가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 이러한 일반적인 “좋은 영화” 기준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드리고요. 아주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금년에 나에게 발견, 재발견 그리고 예상을 뒤엎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 타이틀들을 우선적으로 모았습니다. 이 리스트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영화사적인 가치나 미적인 우수함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평론가적 기준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는 듯 하네요. 역시 언제나와 같이, 이미 1월달에 올라간 영어판 리스트와는 선정된 타이틀이 조금 차이가 있으니, 서로 비교해 보셔도 재미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영순위에 넣을 타이틀부터 기입하겠습니다. Severin Films 에서 출시한 All the Haunts Be Ours: Compendium of Folk Horror 컬렉션이죠. 이 컬렉션은 사실상 통상시같으면 1위에 랭크되어야 마땅한 어마무시한 물건인데, 기술적으로는 2021년에 발매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송되어 도착한 시기는 2022년 2월이었다는 애매한 상황때문에 작년에 넣지도 못하고 또 금년에 넣자니 약간 망서려진다는, 그러한 박스세트의 퀄리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심한 이유로, 결국 영순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포크호러 (최근 상업적이나 비평적으로 성공한 예는 [미드소마] 를 들 수 있겠고, 중소계열 작품들로 따져도 정말 꾸준하게 일년에 여러 편들이 공개되고 있는 잘나가는 서브장르 중 하나죠) 에 해당되는 수많은 작품들— 러시아의 [Viy], 이탈리아산 [Dark Waters] 같은 비교적 유명작부터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세르비아산 (!) 뱀파이어 호러 [Leptrica], 뭔가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원한이 가득찬 아이슬랜드산 (!) TV용 괴작 [Tilbury], 오스트렐리아산으로 백인 정복자들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주를 직설적으로 다루는 [Kadaicha] 까지— 을 망라한 입이 딱 벌어지는 장대한 박스세트입니다. 단지 재미로 구입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영화사적인 결기가 넘치는 중후한 출시작이고, 나의 주관적 기준에 개의치 않고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1위로 자리를 옮기셔도 아무 문제 없을 것입니다. 


20위는 마리오 바바의 유작 (바바 감독의 “유작” 도 하나 이상이 존재합니다. 아주 전문적으로 파고 들면 TV 시리즈의 일환으로 프로스페르 메리메 원작의 [베뉘스 디이 Venus of Illes] 를 1979년에 감독한 것이 진정한 최후의 감독작인데, 물론 이것도 실제 연출은 아들 람베르토 바바가 많이 관여했다고 하긴 하지만) 인 [쇼크 Shock] 입니다. 믿고 보는 Arrow Video 의 Region A 블루 레이이고, 당연한 얘기지만 깨끗하게 복원되어 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바바 전문가 팀 루카스의 오디오 코멘터리를 비롯하여 각양각종의 특전으로 꽉 차있습니다. 영화 자체는 물론 바바의 극도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연출의 솜씨도 건재하지만, 주로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에서 낯익은 다리아 니콜로디의 강렬한 연기가 견인하는 한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19위는 전중-전후기의 헐리웃 필름 느와르의 거장인 로버트 시오드마크가 본인이 활동하던 독일에 귀국하여 1957년에 제작-감독한 전후 독일산 필름 느와르 [악마는 밤에 온다 Nachts, wenn der Teufel kam] (Region A) 입니다. 지금은 별로 언급이 되고 있지 않지만 1958년에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문제작인데, 프리츠 랑의 [M] 을 방불케하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아주 침착하고 진솔한 방식으로 나찌체제를 비롯한, 모든 “불편한 진실” 을 거부하는 사법-행정체제들에 항거하는 한편입니다. Kino Lorber 에서 최근 나찌시대 온갖 장르 영화를 포함한 고전 독일영화들을 연달아 출시하고 있는데 결코 한눈 팔 수 없는 걸작-명작-문제작들이 많습니다. 


18 위는 역시 Kino Lorber 에서 내놓은 [Armageddon] 이네요. 이 회사에서는 이제 또 과거의 알랭 들롱-장 폴 벨몽도 주연작들을 위시한 프랑스어권 상업영화들을 내놓고 있는데, 고전 독일어 작품들만큼의 영화사적인 의미는 적을 지 몰라도, “억 이런 작품들이 이런 좋은 퀄리티로?” 라고 괄목할 만한 타이틀들이 꽤 있어요. [아마게돈] 은 들롱이 왼통 발가벗고 등장한다고 해서 일본 공개당시 난리가 났던 (물론 일본에서는 성기노출 따위는 다 검열당했죠 ^ ^) [쇼크 요법] 의 감독 알랭 제수아의 차기작인데, 영화 자체의 정치적 풍자성이나 장르적 재미보다도 마치 현대 인터넷의 인터넷 안티/찌질이들과 묻지마 테러리스트-총격범들을 20-30년전에 정확하게 예견했던 것 같은 내용이 전율을 가져다 줍니다. 엔드 크레딧이고 뭐고 없이 그냥 “영화 끝났으니까 가 이제!” 로 끝나는 엔딩을 위시해서, “현실 이콜 영상물” 라는 공식의 광기와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영화작가의 의식을 웬만한 젠체하는 “작가영화” 보다도 더 적나라하고 불편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한편입니다. 


17위는 제가 디븨디 리뷰로 소개한 적이 있는 [누가 어린이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제왕불편한 호러를 감독한 나르시소 이바녜스 세라도르가 스페인에서 1966년과 1968년도에 제작한 [환상특급] 을 방불케하는 TV 시리즈 [잠을 못 이루게 만드는 이야기들 Peliculas para no dormir] 입니다. 이제는 나한테는 명실상부 크라이테리언보다 더 중요한 레벨인 Severin Films 에서 전편 복원하고 심지어 1974년에 칼라로 만든 리메이크 스페셜 그리고 1982년의 리부팅 버전까지 전부 수록해서 내놓았습니다 (Region Free). 장르 매체사적인 가치야 뭐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많은 에피소드들이 에드가 앨런 포, 레이 브래드베리, 로버트 블로크 등의 고전적 단편-중편들을 제작환경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옮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피치 못하게 군사독재 시절이던 스페인 당시의 시대상과 보존 상태의 저열함을 반영하여, 영상의 퀄리티가 감상을 저해할 만큼 안좋은 에피소드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 유감일 따름입니다. 여담인데, 한국 TV 의 오래된 시리즈들 ([전설의 고향] 이라던지) 들은 대체 보존 상태가 어떨까요? 그냥 사그라져서 없어졌을까요? 고전 영화에 관한 일부의 논의 마냥,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뭔가 안다고 껍적대는 인간들이 상상속의 “소설” 을 써대면서 역사적 진실을 짓밟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에서도 60년대, 70년대에 다 호러도 SF 도 만들고 했습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현재의 영상물 기준에 비추어서, 옛것들이 화면이 부지직거리고 메이크업이 허술하고, 퀄리티가 열악하다고 무시하는 역사의식이 철저하게 결여된 태도는 지양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여주시길. 


16위는 역시 Kino Lorber 에서 출시한 [에드가 G. 울머 사이파이 컬렉션 Edgar G. Ulmer Sci-Fi Collection] (Region A) 가 되겠습니다. 극저예산 SF-호러의 전문가로, 요즘 같으면 영화학과 졸업과제용 영상도 제대로 찍을 수 없을 정도의 극빈 제작비로 만들어낸 염세형 필름느와르의 걸작 [Detour] 등을 감독한 에드가 G. 울머가, 역시 정말 중딩이 문방구 사기도 힘들 것 같은 극저예산으로 찍어낸 SF 작들을 세 편 모아놓은 출시작입니다. 그나마 [X 행성에서 온 사람] 은 영화사적인 측면에서 비교적 알려진 한편입니다만, 다른 두 작품— [혹성탈출] 처럼 타임리프에 말려든 우주비행사를 다룬 [시간의 장벽] 과 투명인간 스토리, 냉전시대 첩보물과 갱스터 범죄 액션 장르를 섞어놓은 [굉장한 투명인간]— 은 그냥 “졸속” 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제작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편 다 무언가 울머 감독이 지닌 독특한 비주류적인 시각과 미적인 결기 같은 것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좋은 영화” 를 볼 때 느끼는 쾌감이나 감동과는 다른 종류의 흥미를 유발시킵니다. 


15위는 Vinegar Syndrome 에서 내놓은 서극 제작, 임영동 감독의 무협-쿵후영화 [화소홍련사 火燒紅蓮寺 The Burning Paradise] (1994) 가 되겠네요. 성룡 붐도 잦아들고 홍콩영화 자체가 중국에의 반환을 앞두고 혼돈의 증후를 보이던 무렵에 내놓은 한편입니다만, 별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습니다. 몇년 안되어 관객들의 인식속에서 사라진 방세옥 역의 계천상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샹하이에서 금융관계 일을 하고 계시다는데) 등 연기진이 약체라는 것도 아마도 영향이 있었겠죠. 그러나[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다분히 의식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과격하게 퇴폐적이고 엽기적인 폭력-잔혹묘사 등 보통은 서로 어우러지기 힘든 극채색의 요소들이 혼재하는 이색작이라는 측면에서, 볼거리는 확실히 있는 한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출시 레벨에서 첨부한 “우리가 따로 복원을 해보기는 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라는 경고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수려한 화질과 사운드로 감상할 수 있어요. Celestial Pictures 에서 복원된 고전 홍콩영화들이 가끔 보여주는 지나치게 매끄럽고 뺀딱거리는 질감과는 전혀 다른, 한 시대전의 필름적인 화면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14위는 [아웃 오브 더 블루] (4K UHD Blu Ray). 컬트 여자배우 린다 만즈를 데이빗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 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에 영화계에서 퇴출당하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갔던 데니스 하퍼가 주연으로 데리고 찍은 1980년 저예산 캐나다 영화입니다만, 당시에 쏟아져 나왔던 “청춘영화” 적인 감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시각— 탐 크루즈 주연의 존나 못돼처먹었지만서도 때깔좋게 빠져나오고 크루즈를 탑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리스키 비지네스] (1983) 따위와는 거의 다른 행성에서 만들어진 한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서 만들어졌죠. 극단적인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애련함에 가득찬 동시에, 또한 폭력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성적 긴장감 (“펑크” 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실제 펑크 음악은 많이 쓰이고 있지 않습니다) 의 강도가 보통 상업영화에서 기대하는 수준을 완벽하게 상회하고 있어서, 옛날에 VHS 로 보고 났을 때 그 조잡한 화질과 처참한 화면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호러영화를 한편 본 것 같은 중압감과 더불어 엄청난 슬픔의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만즈와 하퍼, 두 사람의 예술가로서의 결기의 에너지만으로도 머리통을 권투선수에게 가격당한 것 같은 충격의 경험을 할 수 있는 한편이죠. 영국에서 BFI 판본으로도 출시되었는데 제가 본 판본은 Severin 에서 출시한 Region A 버전이고 그냥 블루 레이 디스크를 따로 하나 마련해서 온갖 특전영상을 끼워넣었습니다. 만즈와 하퍼가 아카이브 소스로라도 동참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 서글프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13위는 [악마의 덫 Ďáblova past] (1962) 으로, 2022년에 영국 레벨 Second Run 에서 복원한 다양한 동유럽 고전 이색작-숨은 걸작들 중에서 대표성을 고려하여 선출했습니다만, 같은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카렐 카치냐의 [비엔나로 가는 마차] (1966) 등, 취향과 선호에 따라서는 다른 작품이 이 자리에 놓여도 이상하지 않겠죠. [악마의 덫] 은 [마르케타 라자로바] (1967) 라는 광적으로 위대한 걸작중의 걸작을 위시해서, [벌집의 골짜기] (1968) 등 다수의 중세적 종교관에 관한 명작들을 감독한 거장 프란티셰크 블라칠의 초기작입니다. 이 한편은 후기의 블라칠 작품들과는 달리, 소비에트 이념체제와 중세기 카톨릭 교회의 종교체제의 대비가 강력하게 드러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거장의 거의 악마적인 영화적 기법의 매혹이 감퇴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웬만한 예술작품들 보다는 [이블 데드] 나 신도 카네토 감독의 [수풀속의 검은 고양이] 같은 호러영화들을 연상시키는 파격적이고 박력 넘치는 영상 묘사만으로도 놓칠 수 없는 한편이죠. 유감스럽게도 Second Run 판본은 화질이나 음향 측면에서 복원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동유럽 고전 영화의 걸작을 감상하고 싶으신 분들께는, [마르케타] 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한편이기도 하니까, (최근작 [The Witch] 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고) 절대 추천드립니다. 


12위는 [Gothic Fantastico] 라는 제목 아래서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저도 이 박스세트를 구입하기 전에는 네 편중 한편만 이름이라도 들어본 일이 있었네요) 고전 이탈리아제 흑백 영화들을 Arrow Video 에서 모아놓은 박스세트 (Region Free) 입니다. 그 중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걸작은 사회파 장르영화 전문가 다미아노 다미아니 감독 (이분은 근친상간 등의 테마의 도입으로 무척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또한 그런 시도들 때문에서인지, 예상외의 감정적인 공력을 발휘하는 [아미티빌 2: 더 포제션]을 헐리웃에서 만들기도 하셨죠) 이 1966년에 내놓은 [사랑에 빠진 마녀 La strega in amore] 이고, 그보다 사상적 수준이나 연기력의 총체적 기량라는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떨어지는 다른 세 편의 고딕 스릴러들도 당시 이탈리아영화가 자랑했던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매혹을 충분히 과시해주고 있습니다. 단, 옛 이탈리아 영화들이기 때문에, 피치 못하게 여성혐오의 혐의가 씌워질 수 있는 단초들을 각 편마다 최소 하나씩 제공하고 있긴 합니다. 그 문제도 알렉산드라 헬러-니콜라스와 케이트 엘린저를 위시한 특전영상과 코멘터리의 장르영화 연구가들이 결코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 없이 정면돌파하고 있고요. 


11위는 [Shawscope Collection vol. 2] (Region A) 입니다. 전체 리스트 중에서는 제 1집보다 순위가 조금 낮아졌는데, 이건 뭐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번 컬렉션에서는 “지랄맞다” 라는 점잖지 못한 표현이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고 여겨지는 호러영화 [마 魔] (1983) 나, 원제를 “꼰대들” 라고 번역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기는, 코메디인지 뭔지 알 수 없지만 엔터테인먼트 밸류는 상당한 유가량 감독의 괴작 [장배 長輩] (1981) 등 80년대 특유의 괴랄함을 과시하는 홍콩식 무협영화 이외의 장르에 속하는 타이틀들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컬트영화의 박스세트 출시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아마도 세버린과 애로우의 용호상박적 대치가 한동안 계속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크라이테리언은 좀 분발이 필요할 듯. 


주거니 받거니, 세버린의 경우 10위에 다시 [House of Psychotic Women] (Region A) 이라는 박스세트로 올랐습니다. 키어를라 자니스라는 영화연구가가 집필한 동명의 저작을 바탕으로, 잊혀져서 거의 아무도 모르거나, 또는 컬트 명작-문제작으로 회자되면서도 제대로 된 디븨디-블루 레이 출시가 된 적이 없었던 네 편의 북미-유럽 영화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신경증적인 연기가 견인하는 형이상학적 심리스릴러 [아이덴티키트], 플로린다 볼컨의 커리어 최고의 연기와 더불어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촬영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월면의 발자국], 괴작중의 괴작인 폴란드제 흡혈귀 코메디 [난 박쥐가 좋아], 그리고 페미니즘적인 작가영화임과 동시에, 그 작가 즉 제인 아든의 정신적 붕괴의 궤적을 도큐멘터리적으로 담아낸 [The Other Side of the Underneath]— 을 엄청난 화질로 복원하여 끌어모은 컬렉션입니다. 올려놓고 보니 애로우의 [Gothic Fantastico] 컬렉션과 여러모로 대비가 되는 초이스이긴 하네요. 애로우 박스세트가 아마도 장르적인 “재미” 에서는 앞서가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지금 이런 성향과 위상의 영화들— 한 연구자가 스스로의 연구를 위해 “수집” 한 타이틀들이라는 의미에서 보더라도— 을 모아서 이런 고퀄의 컬렉션으로 내놓을 수 있는 레벨은 역시 세버린이겠습니다. 


9위는 헐리웃의 고전 중의 고전인 프레드릭 마치 주연의 1931년도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Region A) 입니다. 이 한편도 제대로 된HD 트랜스퍼를 통해 보급된 일이 없었던 명작입니다만, 새삼스럽게 감상을 하니 그 이후 몇십년 동안의 스티븐슨 소설의 영화화들보다 오히려 더 표현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네요. 스틸사진에서 보는 모습은 그냥 털북숭이 원숭이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마치가 분장한 하이드가, 막상 본편에서는 변신 직후에 안면을 씰룩거리면서 “아~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네!” 라면서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마치 오행산에서 풀려난 손오공을 연상시킵니다. 30년대 “주류” 미국 장르영화 (이 한편도 마치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가져다 줬습니다) 가 답답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데에 일조를 할 수 있을 만한 한편입니다. 


8위는 Cohen Media Group (Region A) 에서 출시한 자크 드레이 (일본의 영향때문에 한국에는 “볼사리노” 로 알려졌던 1970년의 [보르살리노] 로 일약 프랑스의 최고 상업영화 감독까지 가셨던 분) 감독의 1963년작 [학살 심포니 Symphonie pour un massacre] 입니다. 작품 소개를 보면 마치 경쾌하고 명랑한 케이퍼 필름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만, 내실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아이러니와 냉소가 뚝뚝 듣는 본격 필름 느와르입니다. 일종의 우아함이 곁들여진 냉철함에 매혹될 수 밖에 없는 그런 한편이고, 이 리스트에 하나 이상 들어와있는, 고전 필름 느와르-범죄 영화의 팬들께 적극적으로 추천하고픈 50-60년대 프랑스 영화들중 하나입니다. 


다시금 Kino Lorber 의 독일 영화 복원 시리즈로 회귀하여, 독일 “산악영화 (Bergfilme)” 의 거장이었고 레니 리펜슈탈과 공연했던 루이스 트렝커가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확립한 문제적 역사상 인물 중 하나였던 존 서터 (원래 스위스 이민자였고 본명은 요한 아우구스트 주터였습니다) 의 일대기를 찍어낸 “나찌독일 서부극 (!)” [캘리포니아의 황제 Kaiser of California] (1936) (Region A) 가 7위입니다. 역사학적인 흥미로만 보자면 요번 리스트의 어떤 타이틀도 능가할 수 있는 한편이죠. 확실히 1930년대의 독일인이 생각할 만한 “미국 서부” 의 모습을 아름답고도 장엄하게 잡아내고 있으며, 기타 입이 딱 벌어지는 비주얼 임팩트를 자랑하긴 합니다. 그와 동시에, 나찌즘, 미국의 골드 러시와 원주민 학살, 제국주의적 이념 뿐만 아니라 일종의 숭고한 신념으로서의 “개척정신” 등 역사적으로도 불편하면서도 현재에도 전혀 해결되고 있지 못한 수많은 역사적 이슈들에 화두를 던져주는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6편은 영어 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2021년 출시작이지만 꼼수를 써서 이 리스트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자면 왜 [All the Haunts] 는 굳이 영순위로 따로 자리를 마련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별로 납득이 가는 이유를 댈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뭐 내 맘입니다. 내가 작성하는 리스트니까. 아무튼 Flicker Alley 의 UCLA 아카이브와 필름느와르 파운데이션에서 복원한 이 [쓴 맛의 줄기 Los tallos amargos] (1956, Region Free) 는 한때 유럽의 스페인영화계와 긴밀한 교류가 있었던 아르헨티나영화의 “황금기” 에 만들어진 한편이지만, 정말 그림에 그린 것 같은, 본가 미국에 하나도 꿀리거나 밀리는 점이 없는 필름느와르의 걸작입니다. 코넬 울리치 등의 고전적 미국 미스테리소설의 “반전” 을 가장 정통적으로 재현해 낸 듯한 엔딩을 위시해서, 심지어는 카를로스 코레스가 연기한 주인공의, 겉으로는 애써 씨니시즘을 가장하지만 죄의식과 불안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에 짓눌려서 뭉그러지는 내면을 표현하는 스페인어의 너레이션까지도 너무나 모범적임과 동시에 라틴 아메리카적인 풍취를 기막히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필름 느와르의 팬들이시라면 압도적인 걸작인 이 한편을 위시로 해서, 나중에 끌로드 샤브롤이 같은 원작으로 영화화했고 그 쪽이 훨씬 더 유명한 [그 짐승은 죽어야 한다 [La bestia debe morir] (1952) 와 프리츠 랑의 [M] 의 번안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검은 흡혈귀 El vampiros negros] (1953) 등 Flicker Alley 에서 2021년에 출시한 아르헨티나산 고전 필름 느와르들을 필히 구입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5위는 일전 (一轉) 해서 영어권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영화의 거장 중 거의 마지막 타자인 (스즈키 세이준도 마스무라 야스조오도 이제 블루 레이로 상당수의 타이틀들이 출시되었고 말입니다) 오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1980년대 “카도카와 아이돌 영화” 의 대표작들을 한데 묶어서 third window films (Region B) 에서 내놓은 박스세트입니다. 2023년의 시점에서 “아이돌” 소녀 스타 하라다 토모요가 노래를 부르면서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재현하는 엔드 크레딧 시퀜스가 달린 [시간을 뛰는 소녀] (1983) 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쿠시마루 히로코 주연의 [노림을 받은 학원] (1981) 을 포함한 네 편의 카도카와 제작-오오바야시 감독작들을 모아놓았는데, 일부에서는 일본 영화계를 말아먹은 주범으로도 회자되는 거물급 출판인이자 영화제작자 카도카와 하루키의 지문이 여기저기 찍힌 작품들이기는 하지만, 그 영화사적 그리고 일본 대중문화사적 (사실은 이 작품들은 그 당시에는 다 “주류” 작이죠. 시간이 지나서 마치 서브컬쳐인것처럼 위상이 격하된 것일 뿐. 요즘 쿨하다고 유행하는 것들도 언제 손발이 오글거리는 “촌티” 나는 과거의 유물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니)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하라다도 야쿠시마루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별 매력을 못 느끼겠네요. “옆집 소녀같은 친근감” 을 매력으로 포장하려는 일본 “아이돌” 문화의 동력에 무감각해서 그럴까요? 그러나 그러한 “천연소녀” 의 매력도 다른 오오바야시 감독작에서 더 잘 이끌어냈던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언제 이 일본에서 비롯된 “아이돌” 여성이라는 인공적인 존재를 주제삼아 좀 제대로 된 글을 써보고 싶긴 하네요. 


또 다시 Kino Lorber 로 복귀하여 [French Noir Collection] (Region A) 라는 이름으로 겉보기에는 수수하게 포장된 채 출시된 세 편의 50년대말 프랑스산 범죄-스릴러 영화입니다. [벽으로 귀환 Le dos au mur] (1958) 은 잔느 모로가 주연한 히치코크적인 스릴러입니다만, 제라르 우리라는 프랑스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연기자가 맡은 바람 피는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는 상류계급 남자 주인공의 실존주의적인 고뇌와 위선을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고, [도시의 목격자 Un temoin dans la ville ] (1959) 는 살인의 목격자를 제거하려다가 빠리의 택시 운전기사들의 네트워크와 전면대결을 하게 되는 재수 없는 사나이의 운명을 빼어난 앙리 드카에 담당의 야간촬영의 미학과 더불어 보여줍니다. 방추라가 훨씬 더 조연급이었을 때에 대스타 장 가방과 공연한 에드워드 로빈슨 주연의 30년대 헐리웃 갱스터 영화를 연상시키는 [붉은등이 켜지다 Le rouge est mis] (1957) 가 제일 컨벤셔널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세 작품을 동시에 감상하고 있노라면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로의 엘레베이터] (1958) 등의 동시대의 걸작들이 결코 우연히 갑툭튀해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벨 바그라는 운동의 일종의 이념투쟁을 지나치게 신봉해 온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겨납니다. [벽] 과 [도시] 의 감독이 영미권에서는 게이 코메디 [La cage aux folles] 로 가장 잘 알려진 에두아르 몰리나로라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3위와 2위의 자리는 다시금 영국으로 건너가서 Powerhouse Indicator 의 회심의 복원-출시작 [수도원의 환영들 El fantasma del convento] (1934) 과 [곡하는 여인 La Llorona] (1933) 에 갔습니다 (Region Free). 이 두 편은 1930년대 초반에 멕시코에서 제작된 “잊혀진 보물” 들인데, 당시 고전 헐리웃 호러-스릴러들의 문법을 차용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의식과 철학적-종교적 문제의식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처럼 북미-영미권 영화를 전범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한 영화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그런 체험이 아닐 수 없지요. 물론 모든 출시작마다 학문적이고 비평적인 특전과 에세이로 빼곡하게 채우는 인디케이터의 본령이 제대로 발휘된 두 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결국 2022년의 최고의 블루 레이의 자리는, 아마도 북미에서 고화질로 출시되기를 제가 가장 학수고대해 왔던 타이틀의 일순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치다 토무 감독의 [기아해협 飢餓海峡] (1965) (Region A) 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Arrow Video 는 최근에 크라이테리언을 포함한 어떠한 레벨도 넘어서는 수준의 고전 일본 영화의 걸작-명작-이색작들의 복원과 출시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2020년의 [히로시마] 와 맞먹는 2022년의 발표작이 바로 [기아해협] 이겠지요. 이 3시간 3분의 대작에 대한 언급이 없이 일본영화의 전후 황금기에 대한 총체적인 개괄은 불가능합니다. 애로우의 스탭들에게 충심으로 감사의 념과 더불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아이쿠, 3월 4일이 다 되어서야 겨우 한국어 리스트가 완성이 되긴 되었네요. 그래도 역시 올리기는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려. 그러면 내주부터는 이제 겨울학기 수업도 끝나가는데, 새로운 리뷰와 구 듀나게시판 리뷰의 업데이트를 계속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드리고, 언제나처럼, 여러분이 출생한 연도보다 더 오래된 영화를 한달에 한번도 좋고, 아무튼 정기적으로 일부러 찾아 나서서 감상해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낡은 영화” 를 무시하고 업수이 여기는 영화계에 장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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