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여자 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2007)

2010.03.20 23:01

DJUNA 조회 수:7073

연출: Doris Dörrie 출연: Alexandra Reinprecht, John Graham Hall, Veronique Gens, Ruxandra Donose, John Mark Ainsley, Markus Werda, Adriana Kučerová

[가짜 여자 정원사]는 모짜르트가 18살 때 작곡한 오페라입니다. 여러분은 그 나이 때 뭐하고 있었나요? 하긴 입시니 취업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바빠서 오페라같은 걸 쓸 시간이 없었겠죠.

오늘 이야기할 DVD는 잘쯔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모짜르트 오페라 전부를 공연했던 프로젝트 M22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무대 연출은 요새 오페라에 슬슬 맛을 들인 도리스 되리이고 아이보 볼튼이 지휘하는 잘쯔부르크 모짜르테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습니다. DVD 커버에는 'First Time on DVD'라고 쓰여 있는데 그게 사실인지. 전 이것 말고도 같은 오페라를 다룬 DVD를 두 개 이상 본 적이 있거든요. 그게 사실이라면 2006년 이후 이 곡을 담은 DVD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거겠죠.

이야기만 본다면 [가짜 여자 정원사]는 위장신분과 뒤얽힌 다각관계를 다룬 전형적인 18세기 희극이에요. 주인공 비올란테는 1년 전 질투심에 불탄 애인인 벨피오레 백작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지만 살아남아요. 여자친구를 죽였다고 착각한 백작은 달아나고 비올란테는 충실한 남자 하인 로베르토의 사촌 산드리아나로 신분을 위장하고 정원사로 일하고 있죠. 시장은 비올란테에게 추근거리고 시장을 짝사랑하는 하녀 세페타는 그런 비올란테를 질투하고, 나르도라는 가명으로 위장한 로베르토는 그런 세페타를 짝사랑하죠. 한 편, 시장의 조카인 아르민다가 결혼을 발표하는데, 하필이면 그 약혼자가 바로 도망중이던 벨피오레 백작이었어요. 아르민다가 전에 차 버렸지만 여전히 옛 여자친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옛 남자친구 라미오가 그들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고요.

꽤 음악이 좋은 데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그렇게 잘 공연되지도 않는데, 그건 위의 줄거리만 읽어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한마디로 리브레토가 좀 헛갈리고 괴상하고 그래요. 원칙상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에요. 하지만 살인미수는 결코 오페라 부파의 모범적인 소재가 아니지 않나요? 그것도 한 건이 아니에요. 두 건이죠. 게다가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증을 끊지 못하고 뒤얽혀 있는 비올란테와 벨피오레 백작의 관계는 무척이나 찜찜해요. 세리아와 부파가 괴상하게 얽혀 있고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도 흐릿해서 결코 잘 짜여진 각본은 아니죠.

근데 도리스 되리는 그 헛갈리는 각본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한 것 같아요. 말끔하게 18세기 식으로 정리되는 코미디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화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거겠죠. 18세기 사람들이라면 사랑, 분노, 질투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을 사용했을 설정들이, 되리 버전에서는 직장내 성희롱, 스토킹, 데이트 폭력으로 변형되거든요. 특히 서곡이 흐를 때 나오는 폭력 장면은 양식화되어 춤으로 표현되었는데도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바로 몇 초 전에 여자친구를 찌른 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용서가 되겠어요? 솔직히 그 부분은 좀 실수인 것 같아요. 결국 벨피오레 백작은 비올란테와 맺어지기 때문에. 다행이라면 서막에서 백작을 연기한 댄서와 본편 오페라에서 백작을 연기한 존 마크 아인슬리가 별로 닮아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되리가 이 이야기를 현대화하기 위해 사용한 건 무대를 바꾼 것이었어요. 도입부는 18세기 귀족들의 저택에서 시작돼요. 하지만 서곡이 끝나자마자 세트는 분해되고 비올란테와 로베르토는 21세기식 대형 철물점의 정원 물품 섹션에 던져지게 되지요. 돈 안키세는 철물점의 매니저이고 라미라와 세페타는 직원이에요. 비올란테도 정원사가 되는 대신 정원 섹션의 전담 직원으로 취직하지요. 마치 두 사람만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온 것 같은데, 나중에 등장하는 벨피오레 백작 역시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옷을 입고 있어요. 과거와 현재의 패션과 어법이 당연한 것처럼 한 자리에 공존하는 거죠.

물론 이들이 있는 철물점은 사실적인 공간이 아니에요. 그곳에서는 거대한 꽃으로 분장한 무용수들이 춤추며 돌아다니고 사람 하나를 꿀꺽 삼키고도 시치미를 뚝 떼는 비너스 플라이 트랩이 살아요. 2막 후반엔 [반지의 제왕]에 나와도 될 법한 거대한 거미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물론 철물점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등장인물들에게 대걸레에서부터 전기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소품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거죠. 모두 누런 가격표가 붙어 있지만요.

되리가 묘사한 [가짜 여자 정원사]의 세계는 모짜르트가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야하고 어른스러운 곳이에요. 원작과는 달리, 이 버전에서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이 섹스를 하고 자신의 어두컴컴한 내면과 정면 대결을 하죠. 원작의 망가진 설정은 여전히 괴상하지만 그 때문에 이들의 덜컹거리는 심리가 더 효과적으로 와닿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들의 결정을 제가 옹호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전체적인 앙상블은 훌륭한 편이에요. 알렉산드라 라인프레히트와 존 마크 아인슬리의 콤비도 괜찮지만, 전 베로니카 강스와 룩산드라 도노제의 '이제는 헤어진 연인들' 역할이 더 맘에 들더군요. 특히 도노제의 질투심과 분노로 가득 찬 옛 남자친구 역은 일품이에요. 지저분한 장발과 펜으로 그은 것 같은 턱수염은 영 별로지만(전 바지역 메조들이 수염달고 나오는 게 늘 맘에 안 들더라고요.) 전체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관객들을 장악하는 커플은 세페타와 로베르토를 연기한 아드리아나 쿠체로바와 마르쿠스 베르다예요. 이들은 죽도 잘 맞아서 보다 좋은 각본의 모짜르트 오페라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더군요. 조금 더 경력이 쌓이면 [피가로의 결혼]도 가능하겠죠. 아이보 볼튼의 해석은 열광하며 예찬하기엔 너무 모범적이고 정직하지만 그 이상의 해석을 바랄 필요는 없겠죠. 아르농쿠르의 최근 DVD를 보신 분들은 어땠는지 한 번 알려주세요.

DVD는 두 장짜리로, 1막과 메이킹 다큐멘터리가 첫번째 디스크에, 2막과 3막이 두 번째 디스크에 담겨 있어요. HD 녹화를 옮긴 것이고 PCM 스테레오와 DTS 5.1을 모두 지원해요. 영어 자막을 확인해 봤는데, 별로 안 좋더군요. 레치타티보는 그럭저럭 커버하고 있지만 아리아는 대부분 앞부분 절반에서 끊겨요. 이런 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화질은 다음 캡쳐 파일들을 참고하세요. 클릭하면 커져요. (07/03/19)

 
가발을 비닐 봉지로 감추는 비올란테.

 
직원들의 숭배를 받는 세페타.

 
철물점 내부.

 
비너스 플라이 트랩에게 잡아먹힌 백작.

 
정원용 석상들과 사이좋게 한잔하는 세페타.

 
비너스 플라이 트랩에 옷을 모두 빼앗긴 백작과 비올란테.

 
라미로와 시장, 아르민다.

기타등등

이 오페라의 공식적인 주연은 알렉산드라 라인프레히트지만 커버의 주인공은 아드리아나 쿠체로바죠. 왜냐... 더 예쁘거든요. 오페라에서는 커다란 안경으로 그 미모를 감추고 다니지만. 속지 7페이지에서는 안경 쓴 세페타를 산드리아나로 잘못 소개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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