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2010.03.21 19:39

DJUNA 조회 수:8939

어차피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제가 좋아할 만한 작품으로 끝날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책을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고로 다른 대안이 필요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지만 드라마와 [미인도] 이후엔 어렵죠. 저는 습관적으로 이런 작품들을 혼자만을 위한 라디오 극으로 개작하긴 하지만 그림이 중요한 작품을 이 장르로 옮기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로 한 가지 대안이 남았습니다. 2막짜리 연극 또는 뮤지컬입니다. 어느 쪽인지는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무대는 뒤에 하얀 스크린이 깔려 있는 텅 빈 공간입니다. 가장 중요한 소도구는 바퀴가 달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반투명한 커다란 스크린 네 개입니다. 이들은 무대 위에서 삼면의 벽 역할을 하기도 하고 창호지 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위에 이미지를 투영하면 산이나 강이 될 수도 있겠지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회전무대라면 동선 짜는 데 편리하겠습니다.

캐릭터는 신윤복, 김홍도, 정향, 김조년, 목계월, 신한평입니다. 정조와 신영복을 넣어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열 명 안쪽의 코러스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여러 캐릭터들을 연기합니다. 이들의 큰 역할 중 하나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재현하는 활인화(活人畵)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그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연극에서 코러스가 능동적으로 그림을 구현하는 건 효과가 전혀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스크린 위에 꾸준히 두 화가의 그림들을 영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2시간 반 정도로 압축해야 하기 때문에 잘라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드라마처럼 새 이야기를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소설에 있는 부분도 잘라낼 게 많습니다. 일단 미스터리는 축소해야 합니다. 사도 세자의 예진 이야기는 남아야 할 것이나 거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될 수 있는 한 단순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 정조의 어명보다는 김홍도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영복과 정조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영복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결말이 없고 초반을 제외하면 드라마를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정조는 나올 수도 있지만 모습 없이 목소리만 등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전 캐릭터는 원작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문근영식 신윤복은 사랑스럽지만 이렇게 하면 분위기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극적 논리를 따지더라도 (전에 제가 말했던) 임수정식 신윤복이 훨씬 그럴싸하다고 봐요. 전 김홍도 역시 박신양식 오버쟁이 대신 구스타프 에센바흐처럼 가라앉은 인물로 그리고 싶습니다. 그게 더 자연인 김홍도에 가까운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드라마에 더 맞기 때문이죠. 확장하고 싶은 인물은 신한평과 정향입니다. 신한평은 죽은 동료 화원의 딸을 가문의 영광을 위해 이용하지만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릴 것입니다. 물론 정향과 윤복의 관계를 알아낸 뒤의 혼란도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소설에서는 미스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면 갈등이 없었지만 신윤복의 비밀이 처음부터 드러나 있는 무대에서는 가능하죠. 정향은 드라마 캐릭터 수준으로 확장할 것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아무래도 유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환상성과 허구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전 여기서까지 신윤복이 여자네, 남자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군요. 정 귀찮으면 이게 김홍도의 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전 첫 장면을 신윤복의 그림자놀이로 시작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동식 스크린은 요긴할 것이며 약간의 영사 트릭을 이용해 마술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림] 스캔들은 축소될 것입니다. 전 이것을 스캔들로 확장시키는 대신 김홍도가 신윤복의 천재성을 인식하는 개인적인 순간으로 활용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것을 축소하면 [단오풍정]을 그리는 화원시험 장면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드라마 그네 신을 넣어야 할 것인가? 이 장면은 정말 매력적이지만 무대에서 가능하긴 할까요. 그리고 아마 무대 신윤복의 성격에는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의 ‘닷냥’ 장면도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닷냥’을 넣고 싶다면 새로 에피소드를 짜야죠. 단지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기 때문에’ 신윤복과 정향이 함께 있는 장면들은 드라마보다 훨씬 노출이 심하고 에로틱할 것입니다. 고로 이동용 스크린이 검열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진의 미스터리를 줄이고 신윤복의 이야기에 집중하면 1막의 이야기는 한 시간 안팎으로 쉽게 압축될 수 있습니다. 어진화사도 5회 이상 끌었던 드라마와는 달리 15분 정도로 해치울 수 있지요.

이들 에피소드를 묶는 데엔 김홍도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그는 이 연극에서 관찰자 겸 나레이터 역할을 하며 자기 역할이 없는 동안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윤복과 정향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로 후퇴하길 권합니다. 그 장면을 그의 눈요깃거리로 제공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진화사가 진행될 때는 신한평의 분량도 늘리고 싶습니다. 그의 야망이 실현되었다가 깨지는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중이니 그 역시 나름대로 주인공입니다. 실제로 드라마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무대 앞에서 자신의 마음속은 보여주어야 하지요.

제가 뮤지컬을 고려하는 것은 이 연극에서 독백과 방백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 이들의 대사가 명료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되기 바랍니다. 좋은 음악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낮고요. 고로 일반 연극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뮤지컬이 더 잘 어울리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1막은 생도청 장면, [단오풍정]의 영감을 얻으러 나가는 윤복의 모험, 계월옥 장면, 시험 장면, 어진화사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활발하고 시끄러울 것입니다. 장면도 많이 바뀌고 유머도 많이 추가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 김조년의 집 주변에서 진행되는 2막은 보다 압축적인 심리극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화사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며 각본은 이 부분의 감정 흐름에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코러스들은 여전히 조금씩 희극적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울한 분위기에 차갑고 무신경한 농담을 던져주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에 나오는 코러스처럼 말이죠.

미스터리를 압축하는 방법으로 전 어진을 숨긴 초상화 모두가 김조년의 집에 숨겨져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이동 스크린에 투영된 네 장의 그림이 하나씩 겹쳐서 사도 세자의 예진으로 완성되는 장면은 인상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논리적 설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2막 초에 김홍도가 예진을 찾으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고 그 예진이 김조년의 사화서에 숨겨져 있다는 힌트를 그에게 던진다면 그가 김조년의 집에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핑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정향의 비중을 늘릴 것입니다. 제가 닷냥 빠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죠. 하지만 이 설정에서 정향이 수동적으로 앉아있으면 드라마가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네 개의 성부가 모두 각자의 선율을 내야 하지요. 그리 쓰고 싶지는 않은 비유지만 [리골레토]의 4중창을 생각해보세요. 심지어 전 로버트 알트만 식으로 네 사람의 독백을 조합해서 5분 넘어가는 4중창처럼 만들 생각도 해봅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네 명의 주인공들이 무대를 오가는 동안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기를 반복하고 종종 겹치거나 서로의 목소리를 덮어가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건 연극적이기보다는 영화적이거나 오페라적인 아이디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사대결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물론 전 세 개의 이동 스크린을 활용할 것입니다. (신윤복의 그림을 소화하려면 두 개가 필요합니다.) 코러스도 활인화에 활용하고 싶지만 이게 좀 어렵습니다. 계원들이 이미 나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원이 부족할 겁니다. 불필요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하기도 어렵고 김홍도의 [씨름] 같은 경우 평면적인 무대에서 그 장면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뭐,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마지막 [미인도] 장면. 전 여기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신윤복이 사라진 뒤 그의 뒤를 쫓던 김홍도가 막다른 길에 세워진 스크린 위에서 그 그림을 발견하게 하고 싶습니다. 자화상이면 그건 하나의 의미를 가진 그림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냥 [미인도]라면 의미는 무한하게 확장되지요. (0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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