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좀전에 불안하고 슬프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무안한 농담을 했다는 듯, 부끄럽게 웃는 작은 파열음 소리를 내더군요. "무슨 일인데?"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걸 알고자 한 질문은 아니었어요. 정말 위로받을 만한 슬픔과 불안이라면 그건 이미 설명할 수 있는 이유 너머에 있는 것일 테니까요.
무릇 위로라는 건  '왜?'라는 시작의 따스한 질문과 '별일 아냐, 괜찮을거야~'의 토닥임을 끝으로 구성되기 마련이죠. 그러나 위로 받아야 할 사람만이 남을 위로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제 위로는 언제나 서툴러서 정작 끝을 잘 맺지 못합니다.

"니 옆에 내가 있잖아~ " 이런 말은 상대를 두 번 고독하게 만드는 말일 거에요. 그러니 '왜?'라는 무심하고 부드러운 질문 정도로 저무는 마음을 두텁게 감싸고 맙니다. 사실 이유를 묻고 사리를 따지는 동안 흔히  우리는 거대하고 깊은 뭔가를 망각하지 않나요? 요즘 자주 꾸는 꿈의 이미지가 그렇듯, 환한 인공조명과 두려운 바다 사이에 우린 서 있는 거죠. 그것이 삶의 패턴이라 생각합니다.

2.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 최승자/ <사랑하는 손>

방금 검색창에다 '존재의 쓸쓸함'이라고 쳐서 찾아낸 시예요.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참 좋은 구절이네요. 그 표현의 적당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쓸쓸함이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시선에 발견되고 공감받는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뭉클합니다. 세상의 변방에서, 혹은 버림받은 너머의 경계에서 몇 마디 중얼거린 흔적으로서의 시. 그 작품을 역시 시인과 같은 경계선에서 불안해진 독자가 찾아읽게 되는 인연이란.

'알 수 없는'이라는 수식도 좋습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이것저것 다 알 수 없기 마련이죠. 그 알 수 없음의 불확실함에 확연히 대비되는 몸의 감각이 손가락인 거고요. 그러니까 손가락은 몸의 감각이면서도 투명하게 존재론적인 감각인 거군요. 흠.
 
3. "Ich bin traurig, weil ich auf einmal nicht weiss, wer ich bin. Aber gott sei dank weiss ich noch, was ich sein sollte."

통화를 끝내며  dpf이 굿나잇 인사 뒤에 맥락없이 덧붙인 말이에요.  전하고 싶지만 웬지 입 밖에 내놓기가 망설여지는 말일 때만 그는 제게 또박또박 독일어를 사용하곤 합니다. 설마 그 뉘앙스의 섬세한 결을 제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뭔지.
전화를 끊고 잠언 같은 그 말을 메모지에 옮겨봤어요.
"슬프다.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하지만 다행이라면 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고나 할까."
슬프다는 뜻의 'traurig'에서 진한 포도색의 어둠과 차가움 그리고  습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포도송이를 뜻하는 단어가 '트라우벤'이어설까요.

다소 애매한 구분인데, 말/글이 갖는 선명성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그'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의 선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까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공명의 선명성입니다. 공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일방적인 이해라는 게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선명성의 성격은 좀 다른 것이죠.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잘 알겠어'와 '그래 맞아, 그런 거였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그러니 dpf? 그렇다면 낯선 땅을 떠돌며 살던 시절 내가 만들어 뒀던 <슬픔의 방>으로 들어오렴. 거기서 하룻밤 묵고 떠나거라. 따뜻한 담요 같을 거야. 내일 아침이면 그 방 창문에서 푸른 숲이 내다보일 거다. 내 말을 믿어도 된단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0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6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09
126020 생산성, 걸스로봇, 모스리님 댓글을 읽고 느낀 감상 [20] 겨자 2018.10.24 470979
126019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 - 장정일 [8] DJUNA 2015.03.12 269805
126018 코난 오브라이언이 좋을 때 읽으면 더 좋아지는 포스팅. [21] lonegunman 2014.07.20 189487
126017 서울대 경제학과 이준구 교수의 글 ㅡ '무상급식은 부자급식이 결코 아니다' [5] smiles 2011.08.22 158051
126016 남자 브라질리언 왁싱 제모 후기 [19] 감자쥬스 2012.07.31 147367
126015 [듀나인] 남성 마사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9] 익명7 2011.02.03 106095
126014 이것은 공무원이었던 어느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1] 책들의풍경 2015.03.12 89305
126013 2018 Producers Guild Awards Winners [1] 조성용 2018.01.21 76252
126012 골든타임 작가의 이성민 디스. [38] 자본주의의돼지 2012.11.13 72970
126011 [공지] 개편관련 설문조사(1) 에 참여 바랍니다. (종료) [20] 룽게 2014.08.03 71721
126010 [공지] 게시판 문제 신고 게시물 [58] DJUNA 2013.06.05 69110
126009 [듀9] 이 여성분의 가방은 뭐죠? ;; [9] 그러므로 2011.03.21 68357
126008 [공지] 벌점 누적 제도의 문제점과 대안 [45] DJUNA 2014.08.01 62753
126007 고현정씨 시집살이 사진... [13] 재생불가 2010.10.20 62415
126006 [19금] 정사신 예쁜 영화 추천부탁드려요.. [34] 닉네임고민중 2011.06.21 53604
126005 스펠링으로 치는 장난, 말장난 등을 영어로 뭐라고 하면 되나요? [6] nishi 2010.06.25 50788
126004 염정아가 노출을 안 하는 이유 [15] 감자쥬스 2011.05.29 49784
126003 요즘 들은 노래(에스파, 스펙터, 개인적 추천) [1] 예상수 2021.10.06 49764
126002 [공지] 자코 반 도마엘 연출 [키스 앤 크라이] 듀나 게시판 회원 20% 할인 (3/6-9, LG아트센터) 동영상 추가. [1] DJUNA 2014.02.12 494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