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의 엔딩을 생각하며

2022.01.20 22:03

Sonny 조회 수:497

다른 곳에 먼저 올린 거라 평서문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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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의 서사는 수지 베니언과 마녀들의 이야기일까.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면 오히려 클렘페러와 앙케의 서사처럼도 보인다. 클렘페러는 영화의 서사 바깥에서 관찰자의 역할로 페트리쨔를 만난다. 동시에 페트리쨔의 시선으로 관객은 이 정신과 의사가 누구이며 사진 속 여자에 대한 시각적 단서들을 발견한다. 클렘페러는 챕터가 지날 수록 마녀들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페트리쨔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외부의 조력자인줄만 알았던 클렘페러는 마녀들의 의식에 아예 목격자로 참가하고 후에는 수지에게 기억의 삭제라는 구원을 받는다. 영화는 클렘페러가 앙케를 그리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존재가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책임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서스페리아>의 마지막은 클렘페러와 앙케가 벽에 새겨놓았던 이들의 이니셜이다. 앙케는 죽었고 클렘페러는 기억을 잊은 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전율과 피의 연무 이후 모든 카타르시스가 지나갔지만 왜 영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노인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일까.


앙케와 클렘페러의 관계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연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뿐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구하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둬야했던 역사적 과오의 주체이다. 클렘페러는 동독과 서독을 넘나들며 과거의 집에서 앙케를 추억하고 아파한다. 클렘페러의 이 같은 의식은 개인적 연민인 동시에 구세대의 회한과 속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렘페러가 뭘 적극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시대에 소요가 일어나고 희생자들이 생길 때, 무력했던 동세대 인간들은 사회적 책임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생존자들은 늘 비겁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나만이 살아남아서, 너를 죽게 내버려둬서.


클렘페러가 영화에서 최초로 만나는 사람이 시대의 책임을 강력하게 묻는 적군파 일원 페트리쨔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시 상기하면 <서스페리아>의 시작은 이렇다. 역사적 책임을 해소하지 못하는 구세대의 사람이, 새로이 신음하고 소리지르며 세상을 바꾸려하는 신세대의 사람들에게 문답을 주고받는다. 세계는 이렇게 엉망인데 당신은 무얼 하고 있나요. 우리는 타락해가는 세계를 어떻게든 엎어놓고 싶은데 그런 우리가 정녕 미친 사람들인가요. 클렘페러는 맨 처음에는 페트리쨔의 상황을 정신과 의사로서 진단하지만 후에 추적해가면서 마녀의 실체를 가장 강하게 믿고 그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끝은 이렇다. 당신의 책임은 아닐 지언데, 당신 세대 모두를 괴롭혀서 미안했다고. 수지 배니언의 사과와 진실을 들으며 그는 비로서 참된 진혼에 도달한다. 최소한 연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일말의 안도를 얻었으니까. 생존 여부, 진상을 몰라서 작은 희망에 괴롭힘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클렘페러는 그리워하는 이의 결말에 정확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이 사라진 후의 클렘페러는 과연 행복할까. 누군가를 다시는 만날 수 없어도 그리워하던 이의 존재를 곱씹으며 아파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는 않았을까. 수지가 기억을 지운 것이 정말 자비로운 것이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지워진 평온이 과연 진정한 평온인가. <서스페리아>는 수지가 클렘페러의 기억을 지운 후 70년대에서 21세기 현재로 갑자기 건너뛴다. 그렇다면 그 때의 클렘페러와 앙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연히 잊혀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답하는 듯 하다. 어떤 젊은이들은 너무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불태우며 가혹하게 죽었고, 어떤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평생을 시달리며 아파했다고. 그런 그들 모두를 쉬게 하는 것이 마녀이자 수지 배니언이라고. 어차피 잊혀질 수 밖에 없다면, 이들에게 때가 맞는 자비를 베풀어야했다고. 그렇게 다정한 "끝"을 이들에게 주었기에 기억되지 못하는 당연한 운명이 조금은 덜 아프게 다가올 수 있다고. 아무리 치열했어도, 뭔가를 이루지 못했어도, 시간 속에서 소멸할 숙명에 이들의 마지막 안식만은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고.


영화가 마지막에 비추는 앙케와 클렘페러의 낙서는 하나의 묘비다. 우리 모두는 당신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우리만의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으며, 그 때의 우중충한 날씨와는 무관하게 햇볕 쨍쨍한 여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것, 아직까지도 시간을 버티며 남아있는 당신들의 흔적이 있어요. 직계후손도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당신의 추억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 벽에 남긴 이 낙서만큼은 아직까지 남아있잖아요. 후대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허물어지고 재구축되더라도 그 흔적이 새겨진 역사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마녀를 통해 역사적 존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 흉터를 고이 간직할거라고. <서스페리아>는 애처롭고 따스한 위령제다. 앙케와 클렘페러, 당신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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