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아닌 글 - 도서관 열람실

2013.05.30 01:10

실험정신 조회 수:1342

도서관 열람실

화장실, 담배 한 대 그리고 쿠키런 두 판 모두 합쳐 대강 15분 자리를 비운 사이 '그것'이 도서관 열람실 내 자리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통형 알루미늄 캔에 은색과 푸른색이 강렬하게 대비된 디자인 가운데 붉은 황소 두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한 캔이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이 광고하는 에너지 드링크 겉엔 형광연두색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다. 수줍게 칸막이를 향해 돌아누운 캔을 돌리자 포스트 잇에 쓰인 글씨가 보인다.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늘 보기 좋아요. 힘내세요!'

난생 처음 벌어진 난감한 사태에서도 나의 냉철한 이성은 사춘기 이후 감정의 바닥 저 밑에 묻힌 채 화석이 되어버린 감성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억누른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라' 난 뒤늦게 자격증을 준비한다고 시립 도서관을 드나드는 30대 아저씨였다. 요즘 들어 관리한다고 애는 쓰지만 여전히 볼록 튀어나온 똥배 덥수룩한 수염과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쳐있다. 옷차림은 또 어떤가 민소매 후드티에 회색 츄리닝 바지 그리고 삼선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며 나름 잇 아이템으로 신경 쓴 핑크색 크록스 신발이 절묘하게 미스매치된 패션. 아무리 생각해도 음료수는 나를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임자가 잘못 선택된 것이고 결국 누군가의 '실수'란 얘기다. 그제야 난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슬쩍 확인했다. 2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 정돈된 느낌. 얼핏 보면 수수한 차림이지만 뜯어볼 수록 자신을 꾸밀 줄 알고 관리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뽀얀 피부에 커다란 눈 비록 굵은 뿔테 안경으로 가리고 있지만 분명 미인이다.

'아하~'

피식 웃으며 난 음료수 캔을 집어들어 여자의 책상 위에 슬쩍 올려둔다. 고개를 든 여자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역시나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 저런 눈으로 직시하면 이 아저씨는 곤란해진다고.

"아니요, 아무래도 누가 자리를 헷갈린 모양이에요. 그쪽 준다는 걸 제 자리에 올려둔 거 같아서. 진짜니까 오해하진 마시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괜히 쑥쓰럽고 낯 뜨거워 얼른 자리에 앉아 영문법 책을 펼친다. 눈은 책을 향하고 있지만 온 몸으로 여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설마 내가 어설프게 작업이라도 건 줄 오해한 건가. 괜한 짓을 해버렸다. 후회가 밀려온다.

"저기요......"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세상에 목소리까지 아름답다니. 억지로 태연한 척 몸을 뒤로 빼 여자쪽을 본다. 두 손으로 받쳐든 음료수 캔을 머뭇머뭇 나에게 돌려주려 하고 있었다. 맞네, 맞어. 오해했네. 이런 써글.

"이거....."

"정말 전 모르는 거에요. 그냥 드시든 버리든 상관 없는데 제가 드리는 건 정말 아니거든요." 

"그게 아니라. 이거...... 제가 올려둔 거에요."

수줍게 시선을 피하는 여자의 모습에 내 심장이 터질듯 쿵쾅거린다. 켜켜히 쌓이 시간의 층을 뚫고 사춘기 감성이 용솟음 치는게 느껴진다. 떨리는 손으로 여자의 손에서 음료수를 받아 들려다 그만 놓치고 만다. 조용한 열람실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질까 어깨를 움츠린 순간 바닥에서 쓰러지지 않고 계속 돌고 있는 음료수 캔이 보였다. 역시 이성을 믿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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