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3 02:43
중2때 학생신문 백일장의 충격 이후 절필(?)까지는 아니지만 백일장용 글 찍어내기가 싫어져서 온갖 핑계로 출전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글은 학교 숙제로 마지못해 쓰거나 수첩에 몇 자 끄적이는 정도만 쓰게 되더군요.
그때 쓴 글 중 기억 나는 것은 도덕 시간 숙제로 내야 하는 글짓기에 '회색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악은 없다, 모든 것은 회색이다, 이순신 장군도 그에게 아비를 잃은 일본군의 가족들에게는 원수일 뿐이지 않은가 운운의 글을 제출한 것 정도네요. 제대로 중2병스럽지요.
글쓰기는 줄고 책 읽기에는 더욱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때는 계림문고 세계 명작과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등 중국 고전소설을 주로 읽었던 것 같고(특히 삼국지를 너무 좋아해서 아이에게는 바윗돌 만큼 무거웠던 요시가와 에이지 판 삼국지를 스무 번도 더 읽은 기억이 나네요. 무협지 겸 만화책 정도의 용도였던 게죠), 중학교 간 후에는 노총각 삼촌이 여자에게 사기 당해서 구매한 후 한 장도 안 읽고 깨끗이 방치하고 있던 무려 50권 짜리 한국문학대전집을 습관적으로 읽게 되었어요. 출간된지 20년 넘어 보이는 낡아빠진 김동인 전집도 역시 무협지 겸 하이틴 로맨스 역할을 톡톡이 해주었습니다. 특히 '젊은 그들'은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가슴 뛰는 내용이었어요. 대원군을 추종하는 비밀결사 활민당의 소년 검객 재영과 남장 소녀 인화가 첫 키스하는 장면에 얼마나 감정 이입이 되던지... 그러다 '광화사', '광염소나타'를 읽고는 중2병의 극치인 유미주의, 예술지상주의에 심취(?)하여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까지 어떻게 빌려다 읽고는 순진한 여대생 교생 선생님의 독후감 숙제에 예술적 천재에게 마소나 다름 없는 범인들의 도덕 따위 필요 없다 운운의 망발을 적기도 했지요. 결과는 정서불안 중2에 대한 진심 어린 교생 선생님의 정신상담과 가정 환경 상담ㅠ
이런 독서 이력을 적는 이유는 나 어릴 때 이런 책도 봤다 자랑질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랑질이 찌질하고 우습다는 것 쯤은 체득한 나이고요.^^; 요즘과 과거의 독서 형태 비교를 해보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요즘은 연령에 맞는 추천도서가 단계적으로 있고, 국어학원, 논술학원 등을 통하여 숙제로 선생님들이 선별한 책을 읽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하더이다. 제가 자랄 때는 체계적인 독서지도라는 것도 없었고, 아동이나 청소년용 도서도 부족했고 하여 책벌레 소년들은 그냥 마구잡이로 눈에 들어오는 어른 책들을 읽어대던 야만 시대였지요. 부주의한 부모님 덕에 조선조 포르노 '고금소총'에 성 지침서 '소녀경'까지 읽었으니 말 다했죠. 정말 요즘 기준으로는 독서지도의 부재로 인한 폐해지요. 그런데 자기 경험을 미화하는 편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소년기의 마구잡이 독서가 저의 대부분을 좋든 나쁘든 형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원이고 뭐고 없던 시절이라 시간은 남아 돌았고, 책은 그야말로 장난감이자 pc게임이자 만화책이자 본드였던 거죠. 누가 시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재밌어 죽겠어서 마약처럼 찾아 읽는 책이니 몰입도도 높고, 생각할 거리도 많고.
물론 어차피 어떤 고전명작이든 사춘기 사내아이의 눈에는 오로지 어른들의 성과 연애를 엿볼 기회였을 뿐이죠. 요즘과 달리 야동이 없던 시절, 문학만이 소년의 성적 호기심 충족 수단이었습니다. 아, 양주동 판 국어대사전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뒤져 지 지 지 자로 끝나는 말부터 소설에 나오는 '용두질' '공알' 운운의 고급 용어까지 습득하기도 했습죠. 특히 아까 얘기한 '한국문학대전집'은 꼭꼭 숨겨진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천일야화였습니다. 이광수 할배 같은 도덕선생류 소설은 금방 휘리릭 넘기고 치우지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명작은 이효석의 '화분'! 뒤라스의 '연인'보다 백 배는 더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작품이었어요. 일제 치하 부유층의 퇴폐적인 사생활, 동성애 코드, 유사 근친상간 느낌을 주는 관계까지... 그 탁월한 묘사력과 나른한 문체.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었습니다. 전집 진도가 나감에 따라 6. 25. 전후문학을 통해 송병수의 '쇼리 킴' 등 전쟁으로 청순한 누나가 양공주로 전락한 시대적 비극을 묘사한 작품을 보고(근데 어디에 집중해서 본 거니),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에서 신화적인 모티브로 사용되는 근친상간에 집중하여 보면서도 부수적으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려는 후진국 지식인의 고뇌를 엿보게도 되고,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물론 '버스에서 본 여자 아랫배가 숨쉬느라 부드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사랑한다'는 대화를 가장 집중해서 읽으면서도 막연히나마 그 비극적 시대의 낙오자 정서에 젖어보게도 되었던 거죠. 꼭 성 뿐만 아니라 가슴 콩닥거리는 연애 이야기 역시 사춘기 소년에게 중독성 있는 것이었기에 '그에게선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났다'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여학생들 할리퀸 로맨스 읽듯이 가슴 설레며 읽고, 손소희의 '남풍'에서 세영과 남희의 기구한 사랑에 멍해지고, 박화성의 '태양은 날로 새롭다'를 보며 비록 문학성 있는 작품이라기보다 통속적인 신파 드라마 같다고 느끼면서도 나오는 여자 캐릭들이 다 이쁘고 매력적인 것처럼 묘사되어 남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열심히 읽기도 하고....
여튼 호르몬 과잉 사춘기 소년은 불순한(?) 동기로 어른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어댔지만, 부수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체득하는 것들이 있더란 말이죠. 우리의 비극적인 근현대사의 흐름, 처절한 가난의 고통,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 작가마다 다른 문체의 매력, '이야기'의 흡입력, 글의 맛과 멋 등등....
에구, '글쓰기'의 추억이라고 해 놓고 '책읽기'의 추억만 넋놓고 주절거리고 있었네요.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 이미 알고 계시겠죠?
아직 고등학교 진학도 못한 상태에서 또 줄여야겠네요.
2014.07.13 02:53
2014.07.13 03:40
당장 이효석의 <화분>을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저는 아버지 책장에서 <삼국지> 옆에 꽂혀 있던 <열국지>를 읽으며 성에 눈을 떴는데 누구에게나 각자의 배움의 길이 있군요. 위 글의 가쁜 호흡과 숨쉴 틈 없이 쏟아지는 문장들 속에서 새로운 배움을 향한 (중학생) dmajor7님의 폭포수 같은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2014.07.13 04:27
속편이 기대됩니다 ㅎㅎ
2014.07.13 07:55
2014.07.13 07:57
2014.07.13 09:15
역시 같은 야함도 독서를 통해서 충족하는게 건전하다는 교훈을 얻고서 떠납니다ㅎㅎ
2014.07.13 22:34
문득 중학교 때 친척 어른댁에 놀러 갔다가 본 <왕비열전>이 생각나네요.ㅋ
2014.07.13 23:49
2014.07.14 00:02
아.. 늘 글쓴분의 의도나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엉뚱한 생각으로 가지를 뻗치는 버릇이 또 발동합니다. 저도 대학 가서야 해금된 문학들을 알았고, 뒤늦게야 접할 수 있는대로 읽어나가고 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가 교육받거나 구할 수 있었던 책들은 (비록 개인적인 독서열정으로 더 많은 책들을 찾아본다고 해도) 결국 당시의 시대적 상황(냉전 이데올리기 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의 순수문학논쟁)속에서 걸러지고 검열된, 반쪽짜리 문학이었다는 사실. 자진월북 문인 뿐 아니라 납북된 작가들의 작품 마저도 거의 모두 금지였다는 사실. 남한 내에서도 메이저 문단에서 외면하거나 소외된 진짜배기들은 또 쉽게 접할 수 없었다는 사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책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많은 이들이 보다 더 넓고 깊고 중요한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했었다는 사실이 큰 아쉬움으로 남네요.
아 글쓰기와 관련해선, 역시, 저도 비슷한 글짓기대회와 백일장 경험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늘 좋은 글은, 잘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 글이라고 말하곤 하죠.
2014.07.14 00:51
어제 새벽에 쓴 글 지금 다시 보니 좀 민망하기도 하네요. 아니 엊그제 일도 깜빡깜빡하면서 특정 방향(?)의 기억은 이리도 생생하단 말이냐...
중이 때 쓴 회색의 철학 제목이 후덜덜 해요.
주마등 같이 스치는 단편 제목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