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6 12:32
어제 곰TV에서 영화 <쉘 위 댄스>를 봤어요.
1996년 영화니까 거의 20년 전 영화이고, 춤을 배우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영화는 그동안 제법 봐왔던 터라
이 영화에서 특별한 감동을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냥 문득 궁금해졌던 것 같아요.
이런 댄스스포츠를 다루는 영화가 90년대에는 흔하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걸까,
아니면 지금 봐도 뭔가 마음을 흔드는 게 있을까.
내용은 평범했어요. 중년이 된 회사원이 결혼 15년째에 접어들어 아이도 웬만큼 키웠고 집도 대출 받아 샀는데
앞으로도 줄기차게 회사에 충성하고 은행 빚 갚으며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맥이 빠지는 거죠.
그가 타고 다니는 퇴근 전철은 언제나 어느 댄스 교습소 앞을 지나는데 그 시간엔 항상 그곳의 창문에서 어떤 여인의 모습이 보여요.
그 모습에 끌려 그는 그 댄스 교습소를 찾아가 춤을 배우기 시작하고, 열심히 연습해서 대회에 나가고,
그렇게 예상가능한 스토리가 진행되고요.
그런데 이 영화가 단지 춤에 대한 열정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이 남자는 댄스 교습소에 있던 그 여자와 단 한 번이라도 춤추고 싶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그는 춤을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지만 춤을 향한 그의 열망은 그 작은 바람으로 시작되었죠.
그러나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춤을 잘 추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는 여전히 다가갈 수 없는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고요.
그는 나름 실력을 쌓아 대회에도 나가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춤을 그만두기로 결심해요.
그러다 그녀가 외국으로 떠나게 되어 송별회 겸 댄스 파티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지만 그는 그 송별회에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는 결국 그 댄스 파티에 가서 그녀와 함께 소원하던 춤을 추게 될까요, 아니면 그저 묵묵히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을까요?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이 시점에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
이 남자는 끝까지 관객의 애를 태우지만 결국 댄스 파티에 참석해서 그녀와 춤을 춰요.
그녀와 단 한 번의 춤이었지만 그에게는 충분했을 거예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앞으로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어도, 그가 다시 춤을 추지 않게 되더라도요.
그녀와 춤추기 위해 그가 첫 발을 내딛던 순간 시간은 잠시 멈추었을 테고 그 영원 같은 순간 속에서
그는 이걸로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느꼈을 테지요.
어쩌면 그는 그녀를 그렇게 열렬히 사모했던 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삶에 지쳐 있었던 그에게 그녀는 꿈꾸게 하는 사람, 춤이라는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가 주는 사람,
그의 마음 속에서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려주는 사람이었겠지요.
그는 사랑이라기보다는 한없는 그리움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다다를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을 향한 그리움이요.
그녀와 춤추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는 그 지극한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었을 테고요.
사랑이, 열정이, 삶에서 해결해 주는 건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건 결국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겠죠.
그녀는 그의 속에서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려주는 기름의 역할을 한 것뿐이었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녀 덕분에 그는 잠시 아름다운 춤의 세계로 건너가 그 속에서 온갖 근심을 잊고 황홀해 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건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지쳐있을 때 누군가 나의 손을 잡고 잠깐 아름다운 세계로 날아가 주길, 그 속에서 꺼져가는 내 안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길,
그리고 그 지극한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온갖 근심을 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길.
내 삶의 어느 순간을 그런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그걸로 충분해요.
2014.10.26 13:08
2014.10.26 14:29
거의 20년 전에 했던 질문이니 그게 흥미로운 질문이었다면 누군가 이미 멋진 대답을 했을 거예요. ^^ 그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거나 멋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건 그 질문이 흥미로운 질문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20년 전 질문에 아직도 대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좀 슬플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이 질문에 제가 답하지 않는 걸 용서하시길...)
2014.10.26 14:59
긴 리플에는 좀 미안하지만 그저그런 이야기입니다. 2000년 한국 개봉 당시 어떤 여자 평론가인지 기자인지가 남자의 되지도 않는 환상이나 부추기는 엉터리 영화다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만일 저기 저 아내가 남자 춤 강사에게 빠져 매일 거짓말을 조금씩 하며 돌아쳤다는 어땠을까. 남편이 마지막에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을까. 나도 스기야마상이 한 일은 별로 유쾌하지 않고-주변 사람들에게 더 정이 갔던 영화입니다. 마지막 탐정 아저씨 표정 좋았고요(내가 탐정이라서가 아니라)
2014.10.26 15:26
저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이나 영화를 평가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관점은 다른 관점에서는 보지 못하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의 관점을 취할 때 오직 그 관점에서만 보이는 진실이 있듯이 그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진실도 있을 거예요. 그게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의 장점이자 단점이겠죠. 그래서 가능하면 다양한 관점에서, 남자주인공의 관점에서, 그의 부인의 관점에서, 딸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면 더 많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테고요. 저는 <쉘 위 댄스>를 남자주인공의 관점에서 봤고 그래서 부인이나 딸의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쓰진 않았어요. 그게 제가 쓴 글의 한계겠지요. (그 남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나봐요. ^^) 그래서 영화는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말할 때, 그 모든 사람들의 협력으로 좀 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제목에 스포 표시- 남편과 아내가 바뀌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개봉 당시 어느 평론가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