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운전 이야기

2015.10.09 20:28

로치 조회 수:2383

휴일이라 집에 있는데 좀이 쑤시는 거에요. 뭐라도 주워먹을 게 있을까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죠. 

집을 나서서 다운 받아 놓은 팟캐스트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어요. 오전 9시에 시작 된 여정은 대학로를 지나, 안국을 거쳐,

아뿔사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홍대쪽으로.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거지? 햇님은 중천에 떠 있고, 다리도 슬슬 아프고.

결정적으로 도중에 쮸쮸바를 두 개나 사 먹었더니 슬슬 아랫배가 아파 오더라고요. 홍대역이나, 합정역으로 달릴까 하다가

괄약근이 움찔 하고, 식은땀이 나는 것이 큰 일 나겠다 싶더라고요. 냅다 보이는 PC방으로 달려갔죠.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오는 저를 떨떠름하게 보는 알바 눈이 민망해서 조용히 카드를 집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죠.

미안해서라도 한 시간은 버텨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씨디 게임만 하는 제게 PC방은 불모지나 다름 없었어요.

저는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몰라요. 제가 대학 다녔던 7년 전만해도 메달 오브 아너니, 이것 저것 많이 깔려 있었는데.

할 수 없이 영화를 볼 수 있길래 "분노의 질주" 를 봤죠. 

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장구한 썰은 모두 운전에 얽힌 저의 가련한 사연을 풀기 위한 준비운동인 거에요.


때는 이천년대 초. 군입대를 앞 둔 저는 뭐라도 하나 해야하지 않을까 궁리 끝에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죠.

그때만 해도 지역의 모든 후기는 입소문, 업체 검색은 "벼룩시장" 을 통해야 했어요. 

형광펜을 들고 벼룩시장을 뒤적이던 저는 유독 파격가를 자랑하는 한 운전학원에 호쾌하게 동그라미를 쳤죠.

당시 이미 장내교육 시세가 40만원. 그런데 그 학원은 단 돈 25만원에 셔틀버스도 운영을 한다는 거에요.

가진 돈이 얼마 없었던 저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죠. 그리고 며칠 뒤.
당시 대전에 살고 있던 저는 이른바 셔틀버스라 불리는 "OO수산" 이라고 적힌 봉고에 실려 충청북도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천연 요새와 같은 곳이었어요. 울창한 산세에 둘러싸인 그곳에는 덜렁 운전교육장이 놓여있고,

편의시설이라고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커피와 냉차를 파는 손수레 하나가 전부였죠.

그래도 교습생이 적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저처럼 파격가에 낚여서 온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

게 중에는 셔틀버스에서 불안한 얼굴로 내내 "저.. 아저씨, 이거 운전학원 가는 거 맞죠?" 라고 묻던 제 또래의 아가씨도 있었죠.

이 아가씨는 훗날 저에게 100원을 융통해 가시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원 시설을 보고 기겁하여 도주하는 자들이 속출했지만, 입대일을 받아 놓은 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던 것 같아요. 면허증을 발급 받은 다다음 날 입영열차를 탔으니. 떨어진다는 계산 자체가 없었어요.

제가 선택한 면허는 2종 보통.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1종 보통과, 2종 오토 차량에 오르기 위해 바글바글 대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2종 보통. 접수 받는 직원분이 묻더라고요. 1종 보통 아니고요? 네. 2종 오토도 아니고요? 네!

그리고 장내시험을 보던 날, 2종 보통은 저 혼자였답니다. 훗날 알게 됐죠. 2종보통이 제일 어렵고, 1종에 비하면 쓸모도 없으며

어차피 D로 놓고 달릴 거 스틱 놀림은 라이터 시대에 성냥 같은 기술이라는 걸.


교습은 퍽 단촐했습니다. 강사님은 지팽이를 짚으신 할배 강사님. 2종 오토는 젊고 사근사근한 강사님들도 많으시던데,

2종 보통은 그 할배 한 분이신지 저는 도로주행까지 그 할배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때라도 도주를 했어야 했어요.

입가에 침버티를 잔뜩 머금고 느릿느릿 다가오신 할배께선 보조석에 오르시면 과묵, 터프, 호쾌해 지셨습니다.

저는 맹세코 장내교육 받는 내내 단 세 마디의 말만으로 모든 교육을 이수했어요. 밟어, 멈춰, 돌려

그나마 도로주행 때는 한 마디로 줄어들었죠. 뭐해? 밟어. 

첫 도로주행의 날, 충북의 국도를 시속 90킬로로 밟으며 제가 물었죠. "선생님, 원래 이렇게 빨리 달리나요?" 

돌아온 대답은 "어." 대청호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가 심심했는지 할배 선생님은 불경 테잎을 즐겨 들으셨죠.


저는 기적적으로 단 1점의 감점도 없이 장내시험을 합격. 그러나 도로주행 시험 날에 신호등과 횡단보도를 처음 목격,

휘둥그래진 눈으로 숨을 헐떡이며 턱걸이로 합격. 빛나는 녹색 운전면허증을 받아들게 됩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지금 저는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차가 없어요. 

종종 생각합니다. 서울 시내에서 운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신께서 주물로 부어서 심장을 만들었나?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제 운전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소중한 경험을 군에서 하게 됩니다.

당시 저희 부대는 운영차량을 병사들이 몰고 다닐 수 있었어요. 수송대에서 교육을 받고 간이 면허증을 받은 병사들에겐

종이쪼가리인 면허가 나오고, 그걸로 영내 도로를 왔다갔다 할 수 있게 하는 거였죠. 저희 중대 운영차량은 흰색 아토즈.

그때 그곳에서 엑셀, 브레이크, 시동, 기어변속을 제외한 모든 조작법을 배우게 됩니다. 

맙소사, 와이퍼 켜는 법을 모르고 면허를 땄다는 게 믿겨 지세요?


그리고 한창 신나게 옆자리에 간부를 싣고 달리던 어느 날, 저는 어떤 계시처럼 운전대를 놓게 됩니다.

거만하게 핸들을 한 손으로 돌리며 후진주차를 하던 차, 누군가 손가락으로 제 엉덩이를 꾸욱 누르는 듯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죠.



아! 헌병대대 장갑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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