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9 20:28
휴일이라 집에 있는데 좀이 쑤시는 거에요. 뭐라도 주워먹을 게 있을까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죠.
집을 나서서 다운 받아 놓은 팟캐스트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어요. 오전 9시에 시작 된 여정은 대학로를 지나, 안국을 거쳐,
아뿔사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홍대쪽으로.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거지? 햇님은 중천에 떠 있고, 다리도 슬슬 아프고.
결정적으로 도중에 쮸쮸바를 두 개나 사 먹었더니 슬슬 아랫배가 아파 오더라고요. 홍대역이나, 합정역으로 달릴까 하다가
괄약근이 움찔 하고, 식은땀이 나는 것이 큰 일 나겠다 싶더라고요. 냅다 보이는 PC방으로 달려갔죠.
민생고를 해결하고 나오는 저를 떨떠름하게 보는 알바 눈이 민망해서 조용히 카드를 집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죠.
미안해서라도 한 시간은 버텨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씨디 게임만 하는 제게 PC방은 불모지나 다름 없었어요.
저는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몰라요. 제가 대학 다녔던 7년 전만해도 메달 오브 아너니, 이것 저것 많이 깔려 있었는데.
할 수 없이 영화를 볼 수 있길래 "분노의 질주" 를 봤죠.
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장구한 썰은 모두 운전에 얽힌 저의 가련한 사연을 풀기 위한 준비운동인 거에요.
때는 이천년대 초. 군입대를 앞 둔 저는 뭐라도 하나 해야하지 않을까 궁리 끝에 운전면허를 따기로 했죠.
그때만 해도 지역의 모든 후기는 입소문, 업체 검색은 "벼룩시장" 을 통해야 했어요.
형광펜을 들고 벼룩시장을 뒤적이던 저는 유독 파격가를 자랑하는 한 운전학원에 호쾌하게 동그라미를 쳤죠.
당시 이미 장내교육 시세가 40만원. 그런데 그 학원은 단 돈 25만원에 셔틀버스도 운영을 한다는 거에요.
가진 돈이 얼마 없었던 저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죠. 그리고 며칠 뒤.
당시 대전에 살고 있던 저는 이른바 셔틀버스라 불리는 "OO수산" 이라고 적힌 봉고에 실려 충청북도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천연 요새와 같은 곳이었어요. 울창한 산세에 둘러싸인 그곳에는 덜렁 운전교육장이 놓여있고,
편의시설이라고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커피와 냉차를 파는 손수레 하나가 전부였죠.
그래도 교습생이 적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저처럼 파격가에 낚여서 온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
게 중에는 셔틀버스에서 불안한 얼굴로 내내 "저.. 아저씨, 이거 운전학원 가는 거 맞죠?" 라고 묻던 제 또래의 아가씨도 있었죠.
이 아가씨는 훗날 저에게 100원을 융통해 가시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원 시설을 보고 기겁하여 도주하는 자들이 속출했지만, 입대일을 받아 놓은 저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던 것 같아요. 면허증을 발급 받은 다다음 날 입영열차를 탔으니. 떨어진다는 계산 자체가 없었어요.
제가 선택한 면허는 2종 보통.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1종 보통과, 2종 오토 차량에 오르기 위해 바글바글 대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2종 보통. 접수 받는 직원분이 묻더라고요. 1종 보통 아니고요? 네. 2종 오토도 아니고요? 네!
그리고 장내시험을 보던 날, 2종 보통은 저 혼자였답니다. 훗날 알게 됐죠. 2종보통이 제일 어렵고, 1종에 비하면 쓸모도 없으며
어차피 D로 놓고 달릴 거 스틱 놀림은 라이터 시대에 성냥 같은 기술이라는 걸.
교습은 퍽 단촐했습니다. 강사님은 지팽이를 짚으신 할배 강사님. 2종 오토는 젊고 사근사근한 강사님들도 많으시던데,
2종 보통은 그 할배 한 분이신지 저는 도로주행까지 그 할배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때라도 도주를 했어야 했어요.
입가에 침버티를 잔뜩 머금고 느릿느릿 다가오신 할배께선 보조석에 오르시면 과묵, 터프, 호쾌해 지셨습니다.
저는 맹세코 장내교육 받는 내내 단 세 마디의 말만으로 모든 교육을 이수했어요. 밟어, 멈춰, 돌려
그나마 도로주행 때는 한 마디로 줄어들었죠. 뭐해? 밟어.
첫 도로주행의 날, 충북의 국도를 시속 90킬로로 밟으며 제가 물었죠. "선생님, 원래 이렇게 빨리 달리나요?"
돌아온 대답은 "어." 대청호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가 심심했는지 할배 선생님은 불경 테잎을 즐겨 들으셨죠.
저는 기적적으로 단 1점의 감점도 없이 장내시험을 합격. 그러나 도로주행 시험 날에 신호등과 횡단보도를 처음 목격,
휘둥그래진 눈으로 숨을 헐떡이며 턱걸이로 합격. 빛나는 녹색 운전면허증을 받아들게 됩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지금 저는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차가 없어요.
종종 생각합니다. 서울 시내에서 운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신께서 주물로 부어서 심장을 만들었나?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제 운전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소중한 경험을 군에서 하게 됩니다.
당시 저희 부대는 운영차량을 병사들이 몰고 다닐 수 있었어요. 수송대에서 교육을 받고 간이 면허증을 받은 병사들에겐
종이쪼가리인 면허가 나오고, 그걸로 영내 도로를 왔다갔다 할 수 있게 하는 거였죠. 저희 중대 운영차량은 흰색 아토즈.
그때 그곳에서 엑셀, 브레이크, 시동, 기어변속을 제외한 모든 조작법을 배우게 됩니다.
맙소사, 와이퍼 켜는 법을 모르고 면허를 땄다는 게 믿겨 지세요?
그리고 한창 신나게 옆자리에 간부를 싣고 달리던 어느 날, 저는 어떤 계시처럼 운전대를 놓게 됩니다.
거만하게 핸들을 한 손으로 돌리며 후진주차를 하던 차, 누군가 손가락으로 제 엉덩이를 꾸욱 누르는 듯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죠.
아! 헌병대대 장갑차였어요.
2015.10.09 20:42
2015.10.10 10:50
ㅡ"ㅡ 클러치에서 발 떼다가 푸드득 시동 꺼먹는다에 500원 겁니다.
2015.10.10 15:55
저는 평범하게 배웠는데, 니드포 스피드를 페달과 핸들로 하던 동생넘은 18살에 처음 운전대 잡고 바로 잘하더군요. 그 다음날 합격했습니다(90년대초, 오전에 필기, 오후에 실기 바로 합격하더군요.ㅋ)
2015.10.09 21:17
저는 한 5-6년 전쯤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운전학원이 완전 최악이었네요. 여자치고는 운동신경 괜찮고 기계도 잘 다루고 그랬는데 연수 시작하기도 전에 여자들 무시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고 중간중간 욕도 하고 화도 팍팍내고 나중엔 성추행 비스무리하게 운전가르치는 척 하면서 막 어깨도 만지고 계속 스킨십을 하더군요.
학원에 남자강사들밖에 없어서 항의도 제대로 못했네요. 운전 배우러 온 남자중에 키도 작고 약해보이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강사들한테 완전 개무시당하더라구요.
정말 다시는 생각하기 싫더군요.
2015.10.10 10:53
아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 하지만, 현실적으로 타당한 뒷말을 엄청 하고 싶네요. 그런 놈들 그냥, 삼대가 쫄쫄 굶게 되야 합니다.
2015.10.09 23:01
글이 너무 재밌어서 로그인했네요. 하하.
저는 면허 딴지 5년만에 10시간 도로 연수받고 처음 혼자 도로에 나선 날 퇴근길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와이퍼 켜는 법을 모르겠는거예요.
그러다 스틱을 위로 올리면 와이퍼가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온다는 걸 발견하고 완전 초보라 운전만도 버거운데 집에 가는 내내 수동으로 와이퍼를 조작했답니다. 정말 진땀나는 경험이었어요. 크크.
2015.10.10 11:01
면허 딸 때 그런 것도 가르치고 시험도 보고 하면 좋겠어요. 트렁크 여는 법, 사고 났을 때 대응하는 법. 요즘도 50m 전진하고 장내시험 합격 주는지 모르겠네요. 카트 라이더도 아니고...
2015.10.10 08:59
2015.10.10 11:04
전 겁이 많아서 공터 아니면 자전거도 잘 못 타거든요. 차선 바꾸기가 아니라, 운전하는 것 만이라도 좀 재밌고 그러면 좋겠네요.
2015.10.10 10:44
ㅎㅎ글 재밌네요. 어서 뒷얘기 이어주세요. 현기증 날라그럽니다.
2015.10.10 11:14
군기순찰 돌았어요. "군기" 라고 적힌 방탄모에 마대자루랑 낫 들고 시무룩...
2015.10.10 11:22
처음 운전을 분당에서 했죠. 신도시가 대부분 그렇겠지만 길이 넓어서 운전하기가 쉽습니다. 차를 몰고 처음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정말 헬이었죠. 내가 이 차를 몰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그랬었죠. 신도시에서 운전과 서울에서의 운전은 차원이 다르죠.
사실 우리나라는 깜빡이 키는 법만 배워도 사고 절반은 줄어들 듯 합니다. 사람들이 깜빡이들을 안켜요. 예전에 밤 늦게 회사 후배 태우고 운전하는데 차량들이 별로 없는 길에서 나 혼자 깜빡이 키면서 차선 바꾸고 하니까 후배가 신기해하더군요. 그냥 습관이죠. 시야 사각지대도 있고 하니까 뒤에 차량이 없더라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냥 깜빡이 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고 운전이죠.
2015.10.10 12:50
2015.10.11 08:38
영화 cop car 보면 운전대 첨 잡은 애들이 잘도 달리든데요.
면허는 폼이고 감각이 조금 예민한 사람은 레이싱 게임 같이 잘하는거 같아요.